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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나는 할 수 있다. (2) (58/238)


(58) 나는 할 수 있다. (2)
2023.04.29.


황명으로 아리아나의 양육권 재판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서제후의 마차가 법정에 도착했을 때, 그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리아나는 통증 때문에 숨이 점점 가빠졌지만, 최대한 평온하게 호흡하려고 노력하며 서제후와 레이첼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나이프가 움직여서 살점을 헤집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보다 더 아픈 적도 있잖아. 참을 만해.’

기절할 것 같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법정에 들어섰다.

‘적어도 재판이 시작되고 증인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쓰러지면 안 돼.’

동제후는 이미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동제후가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판인지라 변호사도 대동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서제후 쪽도 마찬가지였다.

동제후 러셀이 아리아나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지만, 아리아나는 그 시선에 화답해줄 정신이 없었다. 기절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윽고 원고석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 통증이 아까보다는 나아졌다.

‘빨리…….’

조급하면 될 것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초조했다.

‘내가 쓰러지기 전에.’

아리아나는 자꾸 통증으로 향하는 정신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방청석을 보다가,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는 3황자 헤럴드를 발견했다.

숨이 턱 막혔다.

‘헤럴드 블렌윗!’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곳이 어딘지도 잊고 그와 함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절규할 뻔했다.

그 달콤한 언변에 속아 불길에 뛰어들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이 어제의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을까? 단지 감미로운 말 한번 듣고 싶어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공포를 무릅쓰고 죽음으로 뛰어드는 나는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당장 달려가 그의 멱살을 쥐고 묻고 싶었다.

그리 이용하니 좋았었냐고, 사랑을 갈구하는 멍청한 여인을 사지로 몰아붙여서 앉은 그 높은 자리가 행복했느냐고.

‘참아. 아직은 아니야.’

아리아나는 헤럴드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재미있는 걸 좋아하니 구경하러 나온 것뿐이겠지. 그러니 눈에 띄어서는 안 돼.’

기절하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적어도 헤럴드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결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더운 것 같기도 했다. 눈앞이 까맣게 변하려는 걸 몇 번이나 막아냈다.

무한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재판관과 추기경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투베손 수석 재판관과 에오데스 추기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번과 달리 바로 착석하지 않고 일어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법정 문 밖에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알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나도 그리 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길게 깔린 붉은 양탄자를 소리 없이 밟으며, 제복을 입은 황제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금 자수를 놓은 붉은 망토가 펄럭거렸다.

황제는 재판관과 추기경 사이에 있는 높은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황제의 시선이 잠시 동제후에게 머물렀다. 동제후를 향한 눈빛이 미묘하게 빛난 것은 아주 잠깐, 황제는 의자에 앉아 보좌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착석하시오.”

보좌관의 외침에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아리아나도 앉아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차분하게 생각하니 이 상황이 아까처럼 좋게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게 반드시 내게 유리하리라는 법은 없어.’

황제는 동제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 증인은 동제후까지도 무너뜨리기 위해 황제가 급조한 증인일지도 몰라.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아무리 흥미로운 재판이라도 고작 양육권 재판 따위에 황제가 몸소 나설 이유가 없으니까.’

만약 황제가 서제후의 손을 들어주고 동제후에게 쐐기를 박기 위해 이 상황을 마련한 거라면, 끝이다.

‘황제가 저 자리에 앉았다는 건, 이번 재판 결과를 황명으로 처리할 생각일 수도 있어. 내 양육권을 레이첼에게 존속한다는 황명이 떨어지고, 동제후까지 무너뜨린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지금 이 시점에서 황제를 상대해야 하는 건, 아리아나의 계획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지금의 아리아나는 황명을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양육권에 관한 황명이 내리면,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대놓고 고문하거나 죽여도 아리아나는 레이첼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명은 완전무결하며 절대적이니까.

아리아나가 결과에 불복하여 도망친다면, 황실 기사들이 움직여 아리아나를 붙잡고 죽일 것이다.

황명에 굴복하지 않는 자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니까.

‘어떡하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차라리 지금 몸 상태를 드러내며 기절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근엄한 음성이 넓은 대법정에 울려 퍼졌다.

“이번 재판에 의문을 표하며 짐에게 재심을 요청한 증인이 있다. 사안이 급한 듯하여 본의 아니게 황명을 내렸군.”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감히 누가 황명을 내려야 할 만큼 황제를 서두르게 할 수 있는 걸까?

“원고와 피고의 변론은 어제 끝냈으니, 지금은 이 증인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하지. 증인은 들라.”

모두가 황제를 움직이게 한 증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길게 빼밀었다.

법원 문이 열렸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검은 인영으로만 보였다.

그는 황제가 밟았던 붉은 양탄자 위를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흩날리는 망토,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은빛 머리칼.

아리아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들어오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마치 달처럼 반짝이는 은발과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 희고 아름다운 얼굴, 짙은 회색 눈썹 아래의 매서운 눈매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

달의 신이 강림한 듯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사내의 정체를,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황제의 앞에 선 그가 말했다.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가 귀찮은 부탁을 들어주신 폐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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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중이 고요했다.

그들은 빼어난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

황제와 북제후.

황제의 눈 밖에 난 동제후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이기는 했지만, 북제후는 그를 넘어섰다.

황제가 직접 파티에 초대하고, 수많은 귀족이 방문을 청해도 결코 응답하지 않는, 북쪽 나라의 고고한 왕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눈을 의심케 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아리아나의 경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리아나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말했다.

“증인은 증언하라.”

사이러스는 아까부터 자신을 노려보는 서제후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지난 3월에 서령을 방문했습니다. 서제후의 로젠 성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북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황제의 앞이라서 사이러스의 말투는 정중했다.

“웨이펀 산맥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움을 청하는 여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가 보니, 무장한 사내들 여럿이 여인 하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무장한 사내들과 싸워 여인을 구한 후, 살아남은 이에게 무슨 일로 여인을 해친 거냐 물으니, 그자가 답했습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저 어린 소녀를 죽이려 했다.

그 말에 방청객에 있던 몇 명이 숨을 들이켜고, 몇 명은 흥미진진한 듯 허리를 구부렸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 누군가는 누구고, 저 어린 소녀는 누구냐. 그러더니 답하더군요. 브론테 공작부인의 사주를 받아서 브론테의 둘째 공녀를 죽이기로 했다고.”

“어머나!”

“저런!”

사이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는 그 어떤 증인의 증언보다 무거웠다.

비명을 지르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 울렸다. 레이첼과 서제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서제후가 벌떡 일어났으나 황제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발언을 막았다.

서제후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도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고, 레이첼은 거의 기절할 것처럼 거칠게 헐떡거렸다.

“브론테 가문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하나, 어린 소녀가 위태로운 처지에 처한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북령 행을 잠시 미루고 소녀를 동령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나와 아리아나 양이 동행했다는 사실은 잠시 머문 각 도시의 여관에 묻는다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사이러스가 레이첼을 돌아봤다.

“또한 브론테 공작부인이 우리의 동행을 빌미 삼아서 아리아나 양의 명예를 실추시킬까 봐 미리 말해두자면, 여행길의 수발은 내가 아닌 흑기사단의 단장 루이아나 체베니 자작이 들었으니 오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끝낸 사이러스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 투베손을 응시했다.

“수석 재판관, 자네가 어제 재미있는 판결을 내렸던데. 그 판결에 한 조각의 부끄러움도 없나?”

갑자기 지적받은 투베손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금과 보석, 어린 노예 10명에 관해 아는 게 없는지 묻고 있는 거네.”

“그…….”

투베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사이러스가 차가운 미소를 그리며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오는 길에 거리에서 이런 걸 주웠지 뭔가. 자네와 서제후 로디안 오블렌의 서명이 쓰여 있어서, 혹시 중요한 분실물이 아닌가 싶어 가져왔는데.”

황제가 서류를 가져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사이러스는 황제의 앞으로 가서 공손히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읽는 황제의 표정이 굳어질수록, 서제후와 투베손의 표정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투베손은 두 눈을 꿈뻑거리고 엉덩이를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으며, 서제후는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들의 반응으로, 방청객들은 저 서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했다.

좋은 재판 결과를 위한 뇌물.

그렇다는 건 어제의 결과가 뇌물에 의한 결과라는 의미. 뇌물을 쓸 정도로 다급한 사안이라면, 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명백했다.

서류를 내린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명한다.”

연이어 터지는 놀라운 일들에 시끌벅적했던 법정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모두가 황명을 듣기 위해 고개를 조아렸다.

“아리아나 브론테는 이 시각 이후 아리아나 화이트가 될 것이며, 누구도 그 권한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어린 자식을 지속적으로 학대해왔으며, 거짓 증언으로 자식이 살길조차 막으려 한 레이첼 브론테의 죄는 엄히 다스린다. 벌금 3천만 골드와 금고형 6개월을 내린다. 재판관에서 뇌물을 써서 공정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려 한 서제후 로디안 오블렌에게는 천만 골드의 벌금을 낼 것을 명한다.”

황제가 싸늘하게 덧붙였다.

“이의를 고할 자가 있는가?”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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