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56/238)
(56) 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56/238)
(56) 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2023.04.27.
방청권이 없어서 법정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레이첼과 함께 나오는 아리아나를 보았다. 재판 내용은 운좋게 안에 들어와 있던 기자가 중간중간 밖으로 소식을 알렸기에, 다들 레이첼 측의 주장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레이첼이 이겼다는 것은 그녀가 말한 대로 아리아나가 희대의 악녀라는 의미. 제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자매들을 괴롭힌 아리아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리아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했지만, 아리아나는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걸었다. 당당한 모습과 달리 마음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서제후가 뭔가를 눈치챘어.’
동제후도, 선대 동제후도 지략으로는 서제후를 이기지 못한다. 만약 이길 수 있었다면 과거에 서제후의 꾐에 빠져 황제와 등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제후는 선량한 사람일지도 모르나, 선량함은 이런 순간들을 피하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서제후가 먼저 손을 쓴다면 어떡하지?’
아리아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개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집을 부리며 도망쳐 동제후에게 매달리든가, 순순히 레이첼을 따라 서령에 가서 또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든가.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까 아리아나를 응시하던 서제후의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서제후는 아리아나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서제후는 조심성이 많은 자야. 한 번 도망친 나를 두 번 다시는 믿지 않겠지. 어디에 가둬두건, 누구와 결혼을 시키건 내가 또 도망칠 거라고 여길 거야.’
서령에 돌아가는 순간, 로젠 성 지하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람들이 이 재판에 대한 기억을 잊어갈 때쯤 손을 쓸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온몸이 곪고 썩어가는 채로 갇혀 있던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몸이 떨려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 안쪽의 살을 깨물고 버텼다.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데리고 기다리던 마차에 올랐다. 서제후도 같은 마차를 탔다.
레이첼과 서제후가 나란히 앉고, 아리아나 혼자 맞은편에 앉아서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법정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숨 막히는 침묵이 아리아나를 짓눌렀다. 동령에서의 나날이 꿈처럼 희미해지고 죽음의 기억이 점점 짙어졌다.
수도에 있는 서제후의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마차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별장에 들어가자마자,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휙 돌아보며 손을 올렸다. 서제후가 조용히 말했다.
“레이첼. 애 몸에 상처 만들지 마라. 수도를 떠날 때까지는 조심해.”
“……네.”
레이첼이 분한 듯 손을 내렸다.
아리아나는 차라리 레이첼이 몇 대 때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기회를 틈타 도망쳤을 때, 몸에 남은 멍을 증거로 삼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서제후가 옆에 있는 한, 레이첼이 경거망동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서제후는 기사들에게 아리아나의 방을 단단히 지키라고 이르고 시녀를 세 명이나 붙여두었다.
서제후가 경멸 섞인 눈으로 아리아나를 내려다보며 조롱하듯 명령했다.
“안 먹인다고 고발할지도 모르니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줘라. 그 옷도 갈아입히고.”
아리아나는 시녀들에게 포위당한 듯 둘러싸여 제 방으로 향했다. 시녀들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아리아나를 따라 방에 들어왔다.
한 시녀가 서령의 예복인 와인색 드레스를 가져오며 말했다.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창문 밖에도 지키는 기사들이 있으니.”
아리아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리아나는 소파에 앉았다. 방은 넓고 깨끗했으나 아리아나에게는 이곳이 지난날에 한참 갇혀 있던 지하 감옥처럼 느껴졌다.
+++
서제후는 레이첼에게 단단히 일렀다.
“2, 3일 내로 제국을 떠날 거다. 그때까지는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마. 모든 곳에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해라.”
“네, 아버지.”
“동제후는 계략이 뛰어나진 않지만 제 딸을 위해 뭐라도 할 녀석이니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
몇 번이나 당부하는 서제후를, 레이첼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희끗한 머리칼, 주름진 얼굴. 올해 65살인 서제후는 각 나라의 왕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으나 그 푸른 눈동자만은 젊은이의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보통 자식이 장성하여 결혼할 나이가 되면 제후 자리에서 물러나기 마련이었는데, 서제후는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들이 없다면 후계자로 세울 만한 아이를 입양해도 되고, 후처를 들여 아들을 낳거나 딸에게 물려줘도 되는데, 서제후는 그러지 않았다.
‘욕심 많은 늙은이.’
레이첼은 아버지가 늙어 죽을 때까지 제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서제후의 도움으로 이번 재판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이건 결국 서제후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기에 직접 나섰을 뿐.
‘아리아나가 내 곁에 있으면서 집안의 비밀 같은 걸 알아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 어린 것이 알아봐야 얼마나 알아낼 수 있다고.’
서제후는 레이첼이 입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리아나에게 하지 않아야 할 이야기까지 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레이첼과 절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재판에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조심성 많은 성격 덕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보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아리아나가 또 문제를 일으킨다면 아버지는 나와 연을 끊겠지. 귀찮은 일을 계속 해결해줘야 하는 것보다는 절연하는 게 편하니까.’
서제후는 끔찍이 싫지만, 서제후의 딸이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절연을 당한다고 해서 서제후의 손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절연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해.’
레이첼은 재판 내내 애처롭게 앉아 있던 아리아나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레이첼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쓰던 아리아나를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그 목을 조르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아리아나가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벗어날 수 없도록, 완벽한 어머니를 연기해야만 했다.
+++
아리아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해결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브론테 저택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서제후의 감시 하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북제후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가 떠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이러스라면 이런 순간조차 시원스럽게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북제후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을까?’
선대 북제후 내외가 죽은 뒤, 북령은 혼란에 빠졌다. 아직 어린 사이러스를 밀어내고 북제후 자리를 차지하려는 일당을 피해, 사이러스는 북령을 떠나야 했다.
문득 동굴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대의 눈빛은 항상 처절하게 빛나고 있거든. 난 그런 눈빛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지.”
누가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느냐 물었더니,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아리아나는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버려지고 죽었기에 이런 눈빛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는 건 사이러스 또한 아리아나와 비슷할 정도로 처절한 인생을 보냈다는 것.
지금의 고귀한 북제후는 저절로 생긴 게 아니었다.
‘북제후는 그 처절함을 넘어서서 훌륭하게 북령을 되찾았어. 지금 내가 겪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상황도 있었겠지.’
흐려졌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나도 방법을 찾을 수 있어. 이 정도로 무너지면 안 돼.’
아리아나는 아까부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음식을 노려봤다. 어젯밤 시녀들이 갖고 온 음식. 식고 말라붙은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생각해, 아리아나. 어둠 속이라고 해서 생각을 멈추면 안 돼.’
아리아나는 자신이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응시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서제후는 시녀들을 시켜 아리아나의 몸수색을 꼼꼼하게 했다. 그 때문에 지니고 있던 단도들을 전부 빼앗겼다.
포크와 나이프는 무디지만, 상처를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몸에 나는 상처는 두렵지 않아. 더 두려운 건 아무것도 못 해보고 서령으로 끌려가는 거야.’
아리아나는 시녀들이 잠시 눈을 뗀 틈에, 포크와 나이프를 소파 쿠션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두 팔로 테이블을 쓸어냈다.
와장창-!
놓여 있던 그릇들이 바닥에 떨어져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시녀들이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날 내보내줘!”
아리아나가 외쳤다.
“날 내보내달라고! 난 돌아가고 싶어!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날 놔줘! 보내줘!”
지금껏 인형처럼 고분고분 행동하던 아리아나의 아우성에 시녀들은 당황했다. 아리아나의 양쪽 팔을 붙들고, 하녀를 불러 깨진 식기들을 치웠다.
하녀들은 소란 속에서 청소를 하느라 포크와 나이프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됐어.’
하녀들이 방을 나간 후에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아리아나는 계속 몸부림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서제후가 들어왔다.
서제후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아리아나를 노려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날 보내줘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저는 절대로 서제후 전하께 불리한 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이 입이 열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제발 절 보내주세요. 네?”
“흐음…….”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전하.”
아리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지만, 서제후는 표정 변화 없이 아리아나를 가만히 살폈다. 서늘한 눈이 제 얼굴로 향하는 동안, 아리아나는 계속해서 절규하며 간청했다.
서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어린애처럼 구는 이유가 뭘까?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거지?”
서제후는 펑펑 우는 아리아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방 안을 둘러보다가 기사들에게 턱짓을 했다. 방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들어와 방 안을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 서제후는 시녀들에게도 아리아나의 몸수색을 하라고 지시했다.
아리아나는 침실에 끌려 들어가 거친 손길로 몸수색을 당하는 내내, 이를 악물고 방문을 노려봤다.
‘기사들이 찾아내지 못해야 하는데.’
몸수색이 끝나고 침실에서 나갔을 때, 기사들은 도로 방 밖으로 나간 후였다.
‘찾아냈나?’
조용히 아리아나를 주시하는 서제후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서제후가 아리아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서제후가 가까이 올수록 거대한 산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3황자와 서제후. 아리아나가 이번 생에서 넘어야 할 거대한 두 개의 기둥.
아리아나 앞에 멈춘 서제후가 허리를 굽혀 아리아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번들거리는 푸른 눈을 아리아나에게 고정하고 서제후가 말했다.
“도망치고 싶겠지, 아리아나.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여길 게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