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양육권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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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양육권 재판
2023.04.25.
서제후는 이번 재판에 큰 걱정이 없었다.
에오데스 체디오라 추기경이 판사석에 앉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히 재판관이 투베손이었다. 서제후와 투베손은 상당히 친밀하게 교류하는 관계였다.
금과 갖가지 보석, 10명의 어린 노예들까지 약속하자, 투베손은 싱글벙글 웃으며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 동제후가 이보다 더한 자금을 들여 투베손을 흔든다면, 그때는 또 그때의 수를 생각해두었다.
“우리가 이기겠죠?”
레이첼이 불안해하며 묻자 서제후가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언제 동제후에게 진 적이 있더냐.”
+++
황궁의 시녀들이 정원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을 때였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기에 다들 그렇게 신이 났어?”
유쾌한 목소리가 시녀들의 목소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녀들이 벌떡 일어나 사뿐 인사했다.
“3황자님.”
“에이,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하면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 같잖아.”
“방해라니요. 3황자님을 뵙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요. 여기 앉으시겠어요?”
“응, 좋아. 마침 쿠키가 먹고 싶던 참이었거든.”
3황자 헤럴드 블렌윗은 쾌활하게 말하며 시녀들 사이에 앉았다.
시녀들은 눈이 부신 듯 헤럴드를 응시했다.
화려한 금발 아래의 쳐진 눈은 선량하면서도 장난스러워 보였고, 그 안에 담긴 연갈색 눈동자는 태양처럼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와 잘 어울리는 붉은 입술은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3황자 헤럴드는 황궁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황제 역시 황태자보다 헤럴드를 더 아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정작 헤럴드는 황태자 자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게 말이에요. 5월 7일에 대법정에서 동제후와 브론테 공작부인의 양육권 재판이 열린대요.”
“브론테 공작부인이라면…… 서제후의 딸인가?”
“네, 맞아요. 옛날에 동제후와 결혼했다가 1년인가 2년 만에 더는 동제후와 못 살겠다면서 도망치듯 이혼했다지 뭐예요. 그때 출산한 지도 얼마 안 됐을 때인데, 딸을 데리고 서령으로 돌아갔대요.”
“그리고 좀 지나서 제이콥 브론테 공작과 결혼해 브론테 공작부인이 됐죠.”
“그런데 요새 브론테 공작가문을 두고 소문이 좀 많아요. 몇 달 전에 브론테의 가든 파티에 초대받아서 다녀온 귀부인들이 브론테 공작부인을 영 못마땅해 하더라고요. 둘째 공녀를 그렇게 학대한다고.”
“거기다 저번 달이었나? 그때는 그 댁 막내 공녀가 살인사건 범인으로 잡혀가기도 했었대요. 나중에 그 댁 하녀가 자기가 한 짓이라고 자수를 했다고는 하는데, 설마 진짜 그 하녀가 했겠어요? 덮어쓴 거겠죠.”
“하여간 그 댁 둘째 공녀도 안됐어요. 들리는 얘기로는 굉장히 안 좋은 취급을 받았다던데. 공녀인데도 빨래며 청소 같은 걸 도맡아 했다더라고요.”
“집안일뿐이면 다행이지, 맞기도 많이 맞았나 봐요. 온몸이 멍투성이였대요.”
시녀들이 너도나도 떠드는 이야기를, 헤럴드는 열심히 들었다.
동제후와 서제후가 재판을 위해 제국에 방문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속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역시 소문은 시녀들에게 듣는 게 최고다.
“둘째 공녀도 더는 못 견디고 제 아버지에게 도망친 거겠죠. 브론테 공작부인도 낯짝이 참 두껍지 않아요? 저 같으면 그냥 조용히 양육권을 넘겼을 텐데, 재판까지 열고.”
“그러게, 보통이 아닌 여자네.”
“사교 시즌이라서 다들 수도에 와 있으니, 방청객도 어마어마할 거예요.”
흥미진진한 사건이었다. 둘째 공녀의 처지가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서제후와 동제후의 싸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재판은 그 결과가 명백한 것 같아도 마지막에 판결이 뒤집히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이다.
헤럴드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방청권을 얻어봐야겠는걸.”
+++
5월 7일.
동제후 러셀 화이트와 서령 귀족 레이첼 브론테의 양육권 재판이 열리는 대법정은 인산인해였다.
넓은 대법정의 방청석은 재판이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가득 차 있었다. 방청권을 얻지 못한 귀족이나 평민들은 근처의 살롱이나 가게에서 재판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재판은 각 변호사의 변론과 증인들의 증언 이후, 법을 대표하는 재판관과 종교를 대표하는 대주교가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후, 재판관이 판결을 선언한다.
이번 재판에는 수석 재판관과 추기경이 판사석에 앉게 되어서 그 중요성과 의미가 남달랐다.
아리아나는 원고석에 앉았고, 왼쪽에 동제후가 동제후의 옆에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피고석에는 레이첼과 변호사가 있었으며, 그 바로 뒷자리를 서제후가 차지했다. 피고석은 아니지만, 작은 목소리로 적절한 조언을 해주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레이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한지, 아무 죄도 없는데 누명을 쓰고 끌려 나온 것처럼 보였다.
아이를 네 명이나 낳았는데도 청초함을 잃지 않은 레이첼의 속상한 듯한 모습이 방청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제 딸을 학대한 희대의 악녀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속사정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방청객들의 마음은 아리아나를 보는 순간 또 달라졌다. 16살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작은 체구, 비쩍 마른 몸과 애처로운 눈빛. 살짝 내리깐 눈 위를 덮은 풍성한 속눈썹은 물기에 젖은 듯 반짝거렸다.
방청객들은 명백해 보이기만 했던 이 재판이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걸 예상했다.
이윽고 투베손 히언 수석 재판관과 에오데스 체디오라 추기경이 법정에 들어와 판사석에 나란히 앉았다.
투베손이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재판을 시작합니다.”
아리아나 측 변호사가 먼저 말했다.
“저희는 아리아나의 양육권이 화이트 가문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속적인 학대를 해온 브론테 가문의 접근을 금지하는 요청하는 바입니다.”
레이첼 측 변호사가 말했다.
“저희는 아리아나 브론테의 양육권이 브론테 가문에 존속되어야 하며, 권한도 없이 아리아나 양을 감금한 러셀 화이트를 고발하려 합니다.”
투베손 수석 재판관이 말했다.
“원고 측부터 변론을 시작하도록 하세요.”
아리아나 측의 변호사가 중앙으로 나갔다.
“아리아나는 브론테 공작 저택에 있는 내내 아이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왔습니다.”
변호사는 그동안 아리아나에게 들은 학대 사실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 내용이 어찌나 길고 참담한지, 방청객은 물론 재판관과 추기경의 얼굴까지 일그러졌다.
“하여 아리아나는 살아남기 위해 서령을 떠나, 어린 소녀 혼자의 몸으로 동령을 찾아가 러셀 화이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피고 측에서는 그 어린 아이가 생존하기 위해 처절한 용기를 낸 것을 두고, 러셀 화이트가 감금했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리아나를 보호하려 한 러셀 화이트에게도 죄를 묻고 있으니, 그 잔혹함의 끝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재판관님과 추기경님께서는 가련한 소녀의 미래를 위해 마땅한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레이첼 측의 변호사가 나섰다.
“레이첼 브론테와 제이콥 브론테는 아리아나를 사랑으로 키워왔습니다. 다만 아리아나의 타고난 성정이 괴팍하여 어릴 때부터 부모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행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작게는 제 몸에 상처를 만드는 것부터 크게는 사람들 앞에서 학대당하는 척을 해 자신을 불쌍히 여기게 만드는 것까지.”
언제나 레이첼이 변명처럼 해오던 말을, 변호사는 줄줄이 읊었다.
아리아나의 성격이 안 좋은 탓이다, 어린애답지 않게 제 부모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다, 학대를 당하지 않았으면서 그런 척 꾸며냈다,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제 자매들을 아가씨라고 부른다…….
변호사가 자신을 변호하는 동안, 레이첼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방청객들도 ‘저런 지독한 애가 있나?’라는 눈빛으로 아리아나를 노려봤다.
아리아나의 변호사가 말했다.
“아리아나는 이제 막 16살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린 소녀가 더 어릴 때부터 그런 짓을 했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캐론 시의 도나는 고작 12살의 나이인데도 독을 써서 제 오라버니와 여동생을 죽였습니다. 단지 부모의 재산을 자신이 다 물려받으려는 생각에서. 비에나 시의 배너는 8살의 나이에 친구들을 강물에 빠뜨리거나 절벽에서 미는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잔혹한 성정은 타고나는 것으로, 그 나이가 몇이든 중요치 않다는 걸 증명할 만한 일이 넘치도록 존재한다는 걸, 원고 측의 변호인도 알 겁니다.”
방청객들이 수군거렸다.
레이첼의 변호사가 말한 사건들은 요 몇 년 사이에 실제로 벌어진 일로, 어린아이가 저지른 사건이라서 세상을 더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리아나가 정말로 모든 것을 꾸며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리아나의 변호사는 상대측이 그 사건을 언급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기세를 몰아, 레이첼의 변호사가 말했다.
“증인을 요청합니다.”
레이첼이 준비한 증인들이 나왔다. 서령에서 쟁쟁한 가문의 귀족들. 제국의 사교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귀부인들이 나와, 레이첼의 말이 진실임을 고했다.
아리아나는 제멋대로 굴다가도 갑자기 자매들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며 자신이 하녀 취급을 받는 척했다.
수가 틀리면 고용인들에게 발길질을 하고 침을 뱉기 일쑤였다.
레이첼이 당황해서 말리면 레이첼에게까지 발길질을 했다.
손님이 온다는 얘기를 들으면 자기 몸을 마구 때려서 상처를 내고, 가련한 척하며 손님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줄줄이 이어지는 증언에 방청객들이 혀를 찼다.
아리아나의 변호사가 말했다.
“증인이 전부 서령 출신의 귀족이라는 것은 레이첼 브론테가 서제후 로디안 오블렌의 영애인 탓이 크지 않습니까?”
“원고 측은 아무 상관없는 문제로 레이첼 브론테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증인이 거짓을 고했다면 그 증거를 가져오는 게 우선입니다.”
“물론 원고도 증인을 준비했습니다. 3월에 브론테 공작 저택의 숲에서 라운더라는 사내가 살해당한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수사를 했던 수사청장이 그 사건을 수사할 때 브론테 가문 사람들이 자꾸 아리아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한다는 의문을 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수사청장을 증인으로 모시려 했으나, 왜인지 수사청장이 제국으로 오는 길에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이 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레이첼의 변호사가 부르짖었다.
재판관도 레이첼 쪽의 말이 맞다며 편을 들어주었지만, 이미 흘러나간 말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청객들이 수사청장의 실종은 정말 이상하다고 소곤거렸다. 그 사건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일로 브론테 가의 막내 공녀가 잡혀갔다던데.”라고 중얼거렸다.
아리아나의 변호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변호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원고 측은 피고 측과 달리, 동령과도, 아리아나와도 아무 관계가 없는 증인을 섭외했습니다. 줄리아나 로벤타 공작부인을 증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벤타 공작부인의 등장에 법정이 조용해졌다.
로벤타 공작부인은 황제의 사촌동생으로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이 황후 다음으로 강했다.
레이첼은 잠시 로벤타 공작부인을 노려봤지만, 곧 지금까지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돌아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로벤타 공작부인은 증인석에 서서 레이첼을 한 번, 아리아나를 한 번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