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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6) (51/238)


(52)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6)
2023.04.23.


사이러스에게 잠의 중요성에 대해 듣긴 했지만, 이런 날에는 역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직도 어색한 푹신한 침대 때문인 것만 같아 바닥에도 누워봤지만,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방을 나서자, 방문 앞을 지키던 호위기사가 허리를 세웠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듯 보이는 호위 기사의 이름은 랜스터라고 하는데, 납치 사건 이후 러셀이 아리아나의 개인 호위기사로 붙여주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신중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잠이 좀 안 와서 정원을 걸으려고요.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랜스터는 기어코 아리아나의 뒤를 따라왔다.

소리 없이 따라오는 랜스터를 보며, 아리아나는 북령 사람들을 떠올렸다. 사이러스도, 루이와 노아도 움직일 때 이렇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동령의 백기사단도 북령 흑기사단과 견주어 언급될 만큼 강하지.’

아리아나는 랜스터와 루이가 결투를 한다면 누가 이길지 궁금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동안 동령에 적응하기 위해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느라, 그들을 떠올리지 못했다.

문득 어디에 있든 갑자기 등장하던 사이러스가 생각나서 이 근처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바쁜 분이니 볼일도 없는 동령에서 시간을 보내진 않겠지.’

향후 몇 년간, 혹은 평생 사이러스를 또 볼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사이러스가 사교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아리아나가 기억하기로 그는 사교 파티에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왜인지 울적해져서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아리아나는 랜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동령의 기사들도 은신을 할 수 있나요?”

“말씀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공주님.”

“내가 동령의 공주라면 그리하겠지만, 나는 아직 아리아나 브론테랍니다.”

“동제후 전하께서 공주님을 공주로 여기시니,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편하게 대해주시지 않으면 제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랜스터가 고집을 부렸기에, 아리아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알겠어, 랜스터. 자네가 그렇다면 그리 할게.”

“네. 백기사단 중 일부는 은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공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북령의 은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북령의 은신은 누구도 따라하지 못합니다. 북령의 은신 기술이 전해지는 것은 북령 토박이들로, 그들이 아직 지니고 있는 마법적인 힘이 상당한 영향을 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럼 그것도 마법의 일종이구나.”

“마법과 기술이 섞인 것으로 압니다. 강한 기사들이 훈련을 거듭해서 검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하실까요?”

“응. 대충 알겠어. 그럼 북령 사람들이 은신을 하고 이곳에 숨어 든다면, 알아챌 수 없을까?”

“북령의 은신을 간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능하긴 합니다.”

랜스터가 주위를 쭉 둘러봤다.

“이곳에는 은신을 한 자가 없습니다.”

“그렇구나.”

랜스터의 잿빛 눈동자에 걱정이 담겼다.

“혹시 북령 사람 중에 공주님을 노리는 자가 있습니까?”

노리는 자는 없지만, 가끔 숨어서 지켜보던 자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 자가 북제후라고 말한다면, 랜스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지만, 아리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북령 사람이 날 노릴 리 없지.”

체스트 성은 서제후가 사는 로젠 성보다 더 넓었다. 아리아나는 한참을 걸어서야 중앙 정원에 도착했다.

잘 다듬은 관목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미로 같은 곳이었다. 관목을 손끝으로 스치며 천천히 걸어가 중앙 정원의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아치문을 넘어 들어가면 커다란 분수가 있는 곳으로, 분수 근처에 여러 개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밝을 때 보면 아름답지만, 캄캄한 밤에 보니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잠이 안 와?”

분수 옆 벤치에 앉으려 하는데, 관목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오르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푹 자놓는 게 좋을 텐데.”

“산책을 조금 하고 들어가면 잠이 올 것 같아서요.”

“하긴, 좋은 일로 제국에 가는 게 아니니 잠이 안 올 만도 하지. 랜스터, 여기부터는 내가 에스코트할게.”

랜스터는 대답하지 않고 아리아나를 돌아봤다. 그의 행동에 아리아나는 내심 놀랐다.

개인 기사가 제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아리아나는 랜스터의 주인도, 공주도 아니기에 당연히 제오르의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랜스터는 아리아나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랜스터가 물러났다.

제오르가 아리아나의 앞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충성스러운 녀석이지. 고지식하긴 하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각하. 먼저 가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지식한 사람을 좋아해요.”

아리아나가 손을 거절하자 제오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옮겼다.

“얼음 조각 같은 눈빛이라서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좋아할 만하면 좋아해요.”

“나는 어때? 나는 좋아할 만해?”

“이 동령에서 각하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넌 아직 동령 사람이 아니지.”

흐드러진 별빛이 아름다운 진청색 밤하늘 아래를 아리아나와 제오르는 함께 걸었다. 제오르가 앞장섰고, 아리아나가 한 걸음 뒤에서 그를 따랐다.

아리아나는 제오르의 어깨와 견고해 보이는 등과 흩날리는 남색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

‘이 남자는 동제후가 친부가 아닌데도 그를 위해 죽었지.’

어떤 여자는 제 친딸도 죽이려 하는데, 어떤 사람은 친부모가 아닌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는 게 신기했다.

동제후를 위해 제 목숨을 던진 제오르가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신기했다.

둘은 꽤 오랫동안 말없이 걸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체이스 성의 성벽에 붙어 있는 탑 꼭대기였다. 그곳에 서자 엘르스 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야.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거든.”

“아름답네요.”

깊은 밤에 잠긴 엘르스 시는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연한 색상의 건물들이 달빛을 받아 은은한 광채가 났고, 거리 중간중간에 세워진 가로등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밤하늘의 별 같았다.

“5월 6일부터는 이 도시에서 3일간 풍요제가 열려. 풍작을 기원하는 축제인데, 아주 호화롭지. 그 시기에는 행상인도 많이 찾아오고 서커스 같은 것도 열려서 볼거리가 많아. 너도 풍요제를 즐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재판이 그때 열려서.”

“그러게요. 어떨지 궁금하네요. 축제에 가본 적이 없거든요.”

“서령에도 여러 축제가 열린다고 아는데? 이 시기에 풍요제와 비슷한 축제가 있지 않아?”

“있죠. 하지만 제게는 허락되지 않았어요.”

제오르가 옆에 서 있는 아리아나를 흘끗 돌아봤다.

“내년에는 어때? 내년은 너도 풍요제를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거야 재판 결과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만약 재판에 져서 서령에 돌아간다고 해도 아버지는 전처럼 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 말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과연 그럴까?

아리아나는 16살에 16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했었다. 황실 파티에서 마주친 동제후는 16살에 팔려가듯 결혼한 제 딸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번에 서령에 돌아가게 되면, 나는 저번처럼 그 남자랑 결혼을 하게 되겠지. 아니면, 죽거나.’

서령을 도망쳐서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아리아나를 서제후가 살려둘 것 같지 않았다. 또 다른 불씨를 키우기 전에 죽여버리는 게 편할 거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이었다.

‘재판에 지면 끝이야.’

이번 재판에서 서제후가 할 만한 것들을 예상하고 대비해두긴 했어도 불안함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아리아나도 양육권 재판은 처음이었기에, 그 결과가 어떨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가슴에 이는 선득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히 엘르스 시를 내려다보는데, 제오르가 말했다.

“동령은 아름다운 곳이야. 파가누스가 때때로 침범하는 국경을 제외하면 조용하고 평화롭지. 그래서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느긋한 성격이 되었어.”

“그런 것 같아요.”

“화이트 가문도 그렇지. 다들 의심이 없고 선량해.”

“네, 다들 좋은 분이시죠.”

제오르가 아리아나를 돌아봤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찌를 듯 아리아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아리아나. 나는 네가 그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의심스러워.”

아리아나는 고개를 들어 제오르와 눈을 맞췄다. 찌르는 듯한 눈빛을, 푸른 눈동자는 조용히 받아냈다.

“네 양육권 재판 때문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동령의 큰 기둥인 두 분이 제국으로 가게 됐어. 그동안 동령은 비게 되지. 혹은 큰 기둥인 두 분이 동령을 벗어나게 되지. 그 순간을 노리고 서제후가 움직인다면 동령에는 피바람이 불지도 몰라.”

“서령의 병력이 동령에 비할 바가 될까요?”

“물론 서령의 병력뿐이라면 걱정이 없지. 하지만 과연 서령의 병력이 서령인들뿐일까?”

아리아나는 내심 감탄했다.

제오르는 서제후와 파가누스의 결탁을 벌써 의심하고 있었다. 아직 21살밖에 안 됐는데도.

“황제 역시 서제후의 혀에 휘둘려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렸지. 황제는 욕심과 의심이 많고 귀가 얇은 자야. 서제후가 또 그 혀를 놀려 황제를 움직이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고작 기사단 한 부대를 데려간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두 번 다시 동령 땅을 밟지 못하게 되실 수도 있어.”

마땅한 의심이었다.

아무도 이와 같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니, 어쩌면 다들 의심하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동제후나 선대 동제후가 제오르를 시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자신들이 핏줄에게 내보이기에는 미안한 의심을, 피를 나누지 않은 제오르에게 떠넘겼을 가능성도 있다.

화가 나지도,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무엇도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는 신뢰를 기대한 적도 없으니까.

서령에서 갑자기 찾아온, 태어났을 때 잠깐 봤을 뿐인 딸을 믿어달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나는.”

제오르가 아리아나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고 묵직한 살의가 별빛을 가렸다. 변방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나가 패한 적 없는 전사의 기운이 아리아나의 마른 어깨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움츠리지도, 그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이런 사람이 속을 드러내는 일이 오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딸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가족들이라니. 아리아나의 인생에 그런 좋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리도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고개를 들고 담담히 올려다보는 아리아나를 노려보며, 제오르가 말했다.

“동령을 위해 여기서 널 죽여두는 게 낫지 않은지 고민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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