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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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4)
2023.04.21.
아리아나는 중병에 걸린 환자 취급을 받았다.
랭스티 화이트 공작은 아리아나를 번쩍 안아서 방으로 데려갔다. 아리아나가 괜찮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화이트 가문에서 막무가내인 사람은 펠로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랭스티도 만만치 않았다.
주치의 유리엘이 와서 상처를 치료해주고 돌아간 후에 이자벨이 왔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온 이자벨은 이불을 꽉 붙들고 외쳤다.
“야! 내가! 내가…… 미안해, 아리아나.”
무엇이?
눈이 동그래진 아리아나를 보며, 이자벨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지켜줬어야 했는데…… 도망쳐서 미안해, 아리아나. 도망치면 안 됐는데, 무서웠지? 미안해.”
“내가 도망치라고 했는걸. 언니가 사람들을 불러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어.”
이자벨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늦었을 거야. 마침 제오르가 귀환하던 중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제오르가 전쟁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남들보다 먼저 돌아와서 혼자 환호를 받고 우쭐해하는 성격인 게, 오늘처럼 다행이라고 느껴진 적이 없어.”
아, 그런 사람이구나.
아리아나는 오만하고 냉랭한 눈빛을 가졌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던 제오르를 떠올렸다.
“정말 미안해, 아리아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더 열심히 검술 연습을 했을 텐데……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 무슨 일이 생겨도 지킬 수 있도록 검술 연습 열심히 할게.”
이자벨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리아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며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은 이자벨만 남기고 침실을 나갔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이자벨을 달래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삼촌과 숙모 여러분. 전쟁에서 승리해 당당하게 귀환했을 뿐 아니라, 공주까지 지켰죠. 이번 귀환은 정말 성공적이지 않습니까?”
침실 문 사이로 제오르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나가서 얘기하자.”
러셀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리아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자벨이 아리아나의 앞을 막았다.
“어디 가게? 더 누워 있어. 일어나지 않아도 돼.”
“어른들께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냥 누워 있지.”
말리는 이자벨을 좋은 말로 달래며 침실을 나갔다. 막 아리아나의 방에서 나가려던 사람들이 아리아나를 돌아봤다.
티어도어가 말했다.
“왜 일어난 게냐? 더 누워 있지.”
“이번 사건 이야기를 하시는 거라면, 저도 함께하고 싶어요.”
“아가, 이런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마. 너는 그냥 잘 먹고 잘 자면 돼.”
“제 문제이니 부디 저도 동참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허락했다.
이자벨을 내보낸 후, 어른들만 아리아나의 응접실에 남았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시선들을 받으며, 아리아나가 말했다.
“제 양육권 재판은 언제 열릴까요?”
암살자에게 납치를 당한 마당에 양육권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러셀이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제국의 대재판소에 재판을 요청했다. 빠르면 5월 초로 날짜가 잡힐 것 같다.”
“제가 말씀드린 증인 두 분께서는 증언을 해주신다 했나요?”
“그래. 큰 고민 없이 허락하더구나.”
아리아나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테이블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오늘 제게 암살자를 보낸 이는 브론테 공작부인이 아닌 서제후일 거예요. 보낸 암살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제가 동령에 있다고 확신하겠죠. 서제후 또한 양육권 재판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수사청장이 위험해져요.”
“수사청장이?”
“네. 서제후는 머리 회전이 빠른 자라서 제가 모습을 감췄을 때부터 제가 동령에 의탁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학대에 대한 발언을 할 경우, 그것을 증명할 만한 자들을 감시하고 있었겠죠. 동령에서 사람을 보내 수사청장과 접촉했다면, 이미 서제후의 귀에 들어갔을 겁니다. 수사청장이 증언을 위해 서령을 벗어나려 하는 순간, 죽이겠죠.”
16살의 귀족 영애가 간파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아리아나의 눈은 전쟁을 앞둔 책사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모두 할 말을 잃고 작은 소녀를 응시했다.
“서제후의 예상이 제국의 로벤타 공작부인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로벤타 공작부인이 제게 호의를 베푼 건, 브론테 저택에서 벌어진 일. 브론테 공작부인은 아직도 서제후를 두려워하니, 작은 사교계에서 벌어진 오점까지 서제후에게 고하지는 않았겠죠.”
아리아나가 러셀과 눈을 맞췄다.
“수사청장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 그래. 사람을 보내도록 하마.”
“암살자들은 입을 열었나요?”
제오르가 대답했다.
“입을 열기 전에 죽었어. 살살하려고 했는데.”
제오르가 두 손바닥을 위로 해서 러셀을 가리켰다.
“살살 못 하시더라고. 뭐가 그리 화가 나신 건지.”
“괜찮아요. 어차피 그들의 증언은 큰 힘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 수사청장만 안전하게 제국에 도착한다면, 그와 로벤타 공작부인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
러셀은 제오르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의자에 앉은 러셀은 침통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아리아나는 필요 이상으로 영특했다. 어른들조차 간파하지 못하는 계략을 꿰뚫어 볼 만큼 똑똑했다.
그게 가슴 아팠다.
그런 문제는 전혀 모르고 살기를 바랐다. 브론테 공작가에서 귀여움을 받으며 어여쁘고 곱게, 여느 영애들처럼 철부지로 자라기를 기도했다.
초소에 잡힌 암살자들의 고문 장면을 무심히 지켜보던 아리아나가 떠올랐다. 기가 센 이자벨도 그런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러셀은 제오르가 어떤 방식으로 적을 고문하는지 잘 알았다. 때로는 러셀조차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잔혹했다.
그런 것을 아리아나는 연극이라도 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이 안 좋구나.”
“공주 때문에요?”
“그래. 어찌 살아왔기에…….”
“과하게 영리하긴 하더군요. 똑똑한 아가씨예요. 크게 쓰일 겁니다.”
“난 그 애를 어디에도 쓸 생각이 없다.”
“흐음. 공주는 쓰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요. 하고 싶어 하는 걸 하게 해주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 애는 지금까지 충분히 괴롭게 살았어. 이제부터는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기며 편하게 살아야지.”
제오르는 아리아나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글쎄요. 인형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나저나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는데, 어째 칭찬 한마디 안 하십니까?”
“그래, 잘했다.”
“와, 되게 건성이시네요. 그래요, 뭐. 공주는 귀엽고 예쁘고 과하게 영리하기까지 하니, 저랑 비교도 안 되겠죠. 아, 그럴 수 있어요. 이해합니다. 저 같았어도 저보다는 공주가 훨씬 어여쁠 거예요. 당연하죠.”
“제오르…….”
기가 막힌 듯 쳐다보는 러셀을 향해 제오르가 싱긋 웃었다.
“울적해하지 마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동안 공주를 버려뒀잖아요. 바꿀 수 없는 지난 일이고, 공주는 아버지를 끔찍이 미워하겠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버지가 받아 마땅한 미움이라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돼서.”
“…….”
“공주가 이곳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그 미움조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상대가 미워하는 걸 알았으니 이제부터 천천히 용서를 구하면 되죠. 뭐, 쉽게 용서해주지는 않을 것 같지만.”
+++
납치 사건 후 이틀이 지났다.
아리아나는 이 저택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손목이 작게 쓸린 정도로 울먹거리며 야단법석을 떠는 사람들이 아리아나에게 궂은일을 시킬 턱이 없었다.
“네가 들어가고 싶은 곳은 다 들어가도 된다.”
아리아나가 서재를 이용해도 좋을지 물었을 때, 러셀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아리아나는 어젯밤 서재에서 책을 잔뜩 가져와 침대 옆에 쌓아두고 읽는 중이었다.
깨우는 사람도 없어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하녀가 가져다주는 식사를 침대에서 먹고, 그 상태로 책을 읽는 게으른 시간이 어색하고 간지러웠다.
이렇게 느긋하게 여유를 부려도 될지 걱정스러웠지만, 혼자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반쯤 누운 자세로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아리아나. 들어가도 되느냐?”
러셀의 음성에 아리아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잠옷 차림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동제후를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아리아나는 침대 옆에 공손하게 서서 러셀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침실에 들어온 러셀은 아리아나를 한 번, 구겨진 이불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편히 누워 있어도 된다. 내가 찾아올 때마다 일일이 일어설 것 없어.”
“제가 어찌 감히 침대에 누워서 전하를 맞이하겠습니까. 아직 잠옷 차림인 점을 용서해주세요.”
“일일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심심하지는 않고?”
“네. 전하께서 허락해주신 덕에 서재에서 재미있는 책을 많이 가져다가 읽고 있습니다.”
“네가 원한다면 재주꾼을 불러와서 구경하고 놀아도 된다.”
“네, 필요할 때는 그리 하겠습니다. 살펴주셔서 감사해요.”
거기서 대화가 끊겼다. 러셀은 뒷짐을 진 채로 아리아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데 못 하는 것 같아서, 아리아나가 먼저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아, 그래.”
러셀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리아나는 러셀이 조금 허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혹시 날 쫓아내려는 걸까?’
덜컥 불안해져서 입을 꾹 다무는데 러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화려한 포장지로 포장하고 커다란 리본을 단 선물꾸러미였다. 예상치 못한 물건이 등장해서 아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생일 축하한다, 아리아나.”
쿵-
“그동안 네 생일 때마다 브론테 공작저로 선물을 보냈는데, 받지 못했겠지.”
쿵-
“이제야 처음으로 직접 네 생일을 축하할 수 있게 됐구나.”
쿵-
자꾸 뭔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외부가 아닌 아리아나의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심장 주위를 단단하게 에워싼 얼음벽을, 그 두꺼운 얼음벽을 무언가가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견고한 얼음벽은 부서지지 않았으나 흔들리고 있었다.
“생일…….”
우아하고 기품 있게, 흔들림 없이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축하 같은 건…….”
하지만 흔들린 틈새로 비집고 나오는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하기 힘들었다.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제 생일조차 잊을 만큼, 어느 누구도 축하해주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아리아나는 자신에게 생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잊고 살았다. 성대한 파티가 열리는 헬레나와 빅토리아의 생일을 축하하면서도, 제게 생일이 있다는 건 몰랐다.
“그래서, 전하.”
아리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제게 내밀어진 생일 선물을 꽉 붙들었다. 푹 숙인 얼굴을 선물에 묻었다.
“마땅한 예의를 차리지 못하는 걸, 용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