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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3) (49/238)


(49)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3)
2023.04.20.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몸을 말고 땅을 굴렀다. 고개를 번쩍 든 아리아나의 눈에 흑마의 다리가 보였다.

말을 탄 기사가 느릿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지? 웬 어린애가 뛰쳐나와서 날 환영해주는 거지?”

암살자들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일을 그르쳤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색 머리칼과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짐마차에서 도망치듯 뛰어내렸으니,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 상황.

암살자들은 빠르게 대처했다.

마차를 버리고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몸이 가벼운 암살자들은 땅을 박차고 도약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쌔액-!

대처가 빠른 건 암살자들만이 아니었다.

흑마 위의 남자 역시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고, 암살자들이 땅을 박차는 순간 검을 뽑아 던졌다.

긴 장검은 정확하고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 가장 먼저 도망치려 한 암살자의 등에 꽂혔다. 검이 피부를 꿰뚫고 폐부를 찢은 건 순식간이었다.

암살자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른 암살자들은 제 동료가 죽어 쓰러지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성문 근처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암살자들을 막아섰다.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는 암살자도 있었지만, 기사들은 이미 그들의 도주 경로로 달려가고 있었다.

조용했던 성문 근처에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 소리, 악을 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문을 나가려던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멀리 도망쳤다.

암살자들은 잘 싸웠지만, 여러 명의 기사를 한꺼번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흑마 위의 남자가 외쳤다.

“두 놈은 살려둬!”

남자가 말에서 내렸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부츠. 말을 타고 있었는데도 구김이 없는 흰색 제복. 가슴팍에 파란색으로 수놓은 호랑이 얼굴.

아리아나는 그제야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오르 화이트.’

섬세한 턱선과 가느다란 눈, 짙은 남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아리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흥미로운 듯 아리아나의 얼굴을 살피다가 물었다.

“운이 좋구나, 너. 내가 없었으면 딱 죽었을걸.”

아리아나는 얼른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할 거야. 동령 공주를 납치하려는 놈들 앞에 나타난 정의로운 기사가 놀랍도록 강한 우연은 거의 없잖아. 신께 감사해야지. 함께 기도드릴까?”

“……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저런 위험한 놈들에게 납치를 당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것부터가 신을 원망할 일이지. 함께 신을 저주할까?”

아리아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제오르를 응시했다. 제오르는 사이러스와는 다른 의미로 대하기 힘들었다.

‘이 남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눈을 깜빡거리는 아리아나를 보며, 제오르가 싱긋 웃었다.

무표정할 때는 차가운 느낌인 얼굴이 미소를 짓는 순간 부드럽게 변했다.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이 더 가늘어져서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쪽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어떡할래? 저놈들 고문할 건데 구경할래?”

차라도 한잔하자는 듯 여상한 어조로 고문을 논하는 그에게, 아리아나도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다.

“네, 기회를 주신다면 감사히 즐기겠습니다.”

제오르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너, 재미있는 애구나? 후제 자리를 되찾으러 온 거냐?”

“예?”

“얼굴은 상상보다 더 예쁘고 자태도 곱고 거기에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까지 있네. 역시 나보다는 네가 동후제에 더 어울리겠다.”

아리아나는 정말로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는 감히 동후제 자리를 노리지 않아요, 각하.”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난 내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는데.”

“각하께서 절 아시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요.”

“아, 그건 그렇겠네. 납득했어.”

제오르가 아리아나를 향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귀족 영애에게 춤을 청하듯 내민 손을 잠시 응시하다가, 살며시 그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두 사람은 마치 무대 중앙으로 향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금 전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

살아남은 암살자는 두 명이었다. 서른 남짓으로 보이는 두 남자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제오르를 노려봤다.

그들은 잡히자마자 입안에 숨겨둔 독을 씹으려 했지만, 제오르의 부하들이 억지로 입을 벌려 독약을 끄집어냈다. 혀를 깨물려는 그들의 이를 뽑아버린 건 제오르였다.

아리아나는 그 모든 과정을 제오르 옆에 꼿꼿이 서서 지켜봤다.

제오르가 피에 젖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자, 이제 죽을 고비는 넘긴 것 같으니, 누가 보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볼까? 누가 말할래? 먼저 말하는 사람은 칭찬해줄 건데.”

“저때 마 아내.”

암살자는 이가 없어서 발음이 샜다. 제오르가 아리아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가 없으면 발음이 안 좋아진다는 거 알고 있었어?”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맞아. 나는 훌륭한 선생이지.”

제오르가 뿌듯해하며 다시 암살자를 돌아봤다.

“자, 내가 짐작 가는 사람을 몇 명 말해볼게. 맞다, 싶으면 두 손을 번쩍 들자. 아, 묶여서 못 하겠구나. 그럼 고개를 끄덕이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암살자들이 대답하지 않자 제오르가 그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컥!”

“어헉!”

암살자들이 비명을 질러도 제오르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들의 비명이 훌륭한 음악이라도 된다는 듯, 계속해서 그들을 걷어찼다.

암살자들이 비명을 지를 힘조차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콰앙-!

초소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리아나!”

러셀과 펠로스가 뛰어들어왔다.

달려들어온 러셀이 아리아나를 끌어안기 직전, 아리아나가 말했다.

“동제후 전하.”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한 음성에, 러셀이 우뚝 멈춰 섰다. 끌어안으려던 팔은 허공만 스치다가 덧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는 무사합니다. 동후제께서 도와주신 덕에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요.”

“아무 짓도 당하지 않긴, 뭘 아무 짓도 안 당해! 손목이 다 까졌잖아!”

펠로스가 거칠게 외치며 아리아나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밧줄에 쓸린 것보다 펠로스가 잡고 흔드는 게 더 아팠다.

“삼촌. 공주 팔이 그렇게 해서 떨어지겠습니까?”

제오르의 지적에 펠로스가 깜짝 놀라서 아리아나의 손목을 놔줬다.

“아, 아팠냐?”

“괜찮아요.”

“그, 그나저나…… 제오르, 너는 애를 왜 이런 데 데려와서 그런 끔찍한 꼴을 다 보여주고 있어?”

“삼촌, 벌써 차별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뭐. 공주는 예쁘고 전 예쁘지 않으니 절로 차별을 하게 되시겠죠. 그래도 너무 대놓고 하시면 저는 웁니다. 펑펑 울어요.”

“이리 와라, 아리아나. 네가 저런 걸 볼 필요는 없어.”

제오르가 저런 말을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인지, 펠로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아리아나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밖으로 이끌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러셀은 아리아나가 나가자 제오르 옆으로 가서 섰다.

제오르가 흘끗 러셀을 보며 말했다.

“예쁘네요. 들은 것보다.”

“그래, 예쁘지.”

“차갑네요. 상상한 것보다.”

“내가 그리 만들었지.”

“네, 뭐. 우선은 이놈들 입부터 열게 만들죠. 잘만 하면 양육권 재판 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

펠로스는 아리아나를 마차에 태워 체이스 성으로 데려갔다. 가는 내내 펠로스는 안절부절못했다.

“너, 정말로 괜찮은 게냐? 응? 손목이 그렇게 까져서…… 가자마자 주치의를 불러야겠다.”

“괜찮아요. 이런 건 그냥 놔둬도 금방 낫습니다.”

“뭘 자꾸 괜찮대! 그렇게 벌겋게 부었는데!”

아리아나가 입술을 오므리자 펠로스가 허둥거렸다.

“노, 놀랐지? 이 삼촌이 원래 목소리가 커서……. 미안하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리아나는 눈에 힘을 주고 제 손목에 생긴 상처를 노려봤다. 그러면 눈가에 고인 눈물이 들어갈 것 같아서.

하얀 손목에 남은 상처는 별것 아니었다. 심하게 까져서 피가 맺히긴 했어도, 단단히 묶였던 부분이 붉게 부어오르기는 했어도, 이런 건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아리아나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적도 많았다.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제때 치료하지 못해 심하게 곪아 그 상처를 부위를 도려내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에 누군가 이토록 내 상한 몸을 걱정해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아리아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쓸모가 없으니까.

고작 이 정도의 상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당혹스러웠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알맞은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제 상처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리아나가 겁에 질려서 말이 없어진 거라고 생각한 펠로스는 성에 도착할 때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서령에서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무서웠지? 정말 미안하다, 아리아나. 앞으로는 더 강한 기사를 여러 명 붙여주마. 미안하다, 미안해.”

굵직한 음성에 담긴 다정함이 너무 뜨거워서, 아리아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차가 체이스 성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렸을 때, 아리아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체이스 성의 모두가 달려 나와 아리아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대 동제후 내외부터 화이트 공작 내외, 시종과 시녀들, 하인과 하녀들까지.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아리아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지켜봤다.

‘정말 별 거 아닌데.’

서제후가 순순히 자신을 놓아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서제후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 아리아나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제 집안에 들였던 이상 하나쯤은 오블렌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길 터였다.

게다가 아리아나는 학대를 당했다.

이 일이 크게 번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면, 황제조차도 눈살을 찌푸리며 오블렌 가문과 브론테 가문을 멀리할 것이 틀림없었다.

입을 열기 전에 납치해서 데려온다, 그게 안 되면 죽인다.

서제후가 할 만한 생각이었다.

납치를 당하거나 죽을 만큼 다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언제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베게 안에 하나, 몸에 하나, 단도를 언제나 숨겨두었다.

그러니 별일 아니었다. 언제든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나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걸까?

죽지도 않았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난 것도 아닌데, 왜 이리들 호들갑인 걸까?

선대 동제후비는 왜 날 끌어안고 우는 걸까? 선대 동제후의 눈가는 왜 저렇게 벌건 걸까? 화이트 공작은 왜 저렇게 화가 나서 악을 쓰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려 하는 걸까?

‘정말 모르겠네.’

아리아나는 노부인의 따뜻한 품에 안긴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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