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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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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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2)
2023.04.19.
유명한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드레스 가게는 넓고 화려했다. 이자벨은 단골인지, 주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은 내 거가 아니라 얘 걸 사러 왔어.”
“오, 이분은 어느 댁 귀한 영애님이신지요?”
“내 동생이야.”
“아. 동생…….”
가게 주인은 헤른 백작가에 딸이 또 있었는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축제 때 입을 거니까 파란색. 최고로 화려해야 해. 드레스에 맞춰서 구두도 살 거야. 장신구도 다 살 거니까 사이즈 재는 동안 섭외해두고. 아, 얘는 지금 무럭무럭 자랄 때라서 한 사이즈 크게 만들어야 해.”
이자벨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지시를 내렸다. 여자 직원들이 와서 아리아나의 치수를 재는 동안, 이자벨은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며 예쁜 드레스가 있을 때마다 아리아나에게 펼쳐서 보여줬다.
“이런 스타일도 너랑 잘 어울리겠다. 아, 이것도 예쁘네. 이건 네가 입기엔 너무 어른스럽고…… 이런 건 어때?”
이자벨은 자기 드레스를 사러 온 사람처럼 즐거워 보였다.
콰앙-! 쾅-!
거리에서 땅이 흔들릴 정도로 큰 폭음이 들려온 건, 치수 재기가 거의 끝났을 때였다.
“나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가게 입구에 서 있던 호위기사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챙- 채앵-
검이 부딪치는 소리.
“윽.”
누군가의 신음.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이자벨은 아리아나의 손을 꽉 붙잡고 가게 문을 노려보며 뒷걸음질 쳤다.
벌컥-
가게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호위 기사가 아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복면의 사내 세 명. 그중 한 명은 기사와 싸우다가 다친 듯 팔에서 심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사내와 아리아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리아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제후가 사람을 보냈구나!’
체이스 성에서의 생활이 편안하기는 해도 이런 사태를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하필이면 이자벨과 함께 나온 오늘일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빨랐다.
‘가능하면 살려서, 안 되면 죽이라 했겠지. 생각해. 겁에 질려봐야 아무 소용없어. 빠져나갈 방법은 있어. 생각해내, 아리아나.’
이곳에서 싸우려 들다가는 이자벨이 다칠 수도 있었다.
‘순순히 끌려가주는 게 좋겠어. 내가 무기를 숨기고 있다고는 생각 못 할 테니, 기회를 봐서 찌르고 도망치면 돼.’
어린 소녀에 허약해 보이는 육체를 가졌다는 건, 적들의 방심을 살 수 있다는 얘기였다. 사이러스에게 배운 호신술은 완벽하진 않아도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줄 수는 있었다.
“언니, 도망쳐.”
하지만 이자벨이 아리아나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너희는 누구냐? 내가 감히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자벨이 한 팔을 들어서 아리아나를 제 뒤로 보내며 말했다.
이자벨은 지금껏 보이던 철부지 귀족 영애의 모습을 버리고, 서늘한 눈빛을 짓는 전사가 되어 있었다.
사이러스가 ‘동령은 여인들도 뛰어난 전사’라고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복면 사내가 말했다.
“네게는 볼일 없다. 필요 없는 희생자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 살고 싶으면 물러서라.”
“하면 감사히 물러서지.”
이자벨이 아리아나의 손을 쥐고 물러나려 하자, 복면이 말했다.
“그 애는 놔두고.”
“아, 서령에서 보낸 자객인가? 동령까지 들어와서 내 동생을 납치하려 하다니, 담이 너무 크네.”
이자벨의 말에 복면이 움찔했다. 뒤에 서 있던 복면이 검을 들었다.
“우리 정체를 안다면 저 계집을 죽여야 해.”
복면이 달려들려 할 때, 아리아나가 외쳤다.
“잠깐!”
아리아나는 숨기고 있던 단도의 끝을 제 목에 대고 있었다. 달려들려던 복면이 움직임을 멈추고 아리아나를 쏘아봤다.
“날 살려서 데려가면 더 큰 보상을 주겠다 약속받았겠지. 이 소녀에게 손을 대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야.”
“허풍이다. 죽여.”
아리아나는 단도를 가차 없이 제 목에 찔렀다. 칼끝이 피부에 파고 들어 흰 목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기다려!”
뒤에 있던 복면이 외쳤다.
“저 계집을 살려서 데려가면 두 배야.”
“서둘러, 기사들이 온다.”
망을 보던 복면의 말에, 안에 있던 복면들은 욕설을 내뱉더니 검을 집어넣었다. 아리아나도 단도를 내렸다. 제 발로 걸어 복면들에게 다가가는 아리아나를, 이자벨이 붙잡았다.
“안 돼, 아리아나.”
아리아나는 이자벨을 덥석 끌어안고 작게 속삭였다.
“언니, 저 자들은 날 잡고 나면 언니를 죽일 거야. 내가 저 자들에게 가는 동안, 언니는 뒷문으로 도망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하지만…….”
“저 자들이 언니를 뒤쫓지는 않을 테니, 그게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이야.”
아리아나는 이자벨을 놔주고 휙 돌아섰다. 동시에 이자벨이 돌아서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복면이 아리아나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았다.
“어린 계집이 머리를 썼군.”
아리아나는 푸른 눈으로 겁도 없이 복면을 노려봤다.
“나 하나면 되지 않겠나? 너희들이 살아 돌아간다면, 저 어린 소녀의 증언 따위, 아무런 증거도 되지 않을 텐데.”
아리아나의 말대로 암살자들이 전부 살아서 돌아간다면, 이자벨의 증언은 서제후에 대한 모함으로만 들릴 터였다.
게다가 암살자들은 서령 출신도 아니기에, 이곳에서 죽어 시체를 남긴다 한들 서제후가 보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암살자들은 아리아나만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
입과 눈을 막고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 어딘가에 태워졌다. 딱딱한 바닥, 눅눅한 냄새, 달리는 소리로 보아서 짐마차인 듯했다.
두꺼운 모포로 아리아나를 말아놔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위장용으로 넣어둔 꾸러미들이 이리저리 굴러 아리아나를 치고 지나갔다.
‘행상인으로 위장해서 성문을 벗어날 생각인가 보군. 서제후는 역시 빈틈이 없어.’
레이첼이 암살자를 보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나라 간의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을 과감하게 벌일 사람은 서제후뿐이었다.
서제후가 보낸 암살자는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 소동을 벌려 호위기사와 떨어지게 만들고 그를 먼저 처리한 거겠지. 호위가 없으면 나 한 명 잡아가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니까.’
아리아나는 한숨을 삼켰다.
‘아직 나를 제대로 증명하지도 못한 상황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가문의 호위기사 한 명이 죽고, 이자벨도 죽을 뻔했다. 성가신 아이라고 생각해서 내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조심해서 행동한 것이 소용없게 된 것 같아 힘이 빠졌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런 일은 예상했잖아.’
이런 일이 생기면 어딘가에서 나타나 도움을 주던 사이러스는 지금쯤 북령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나에게는 그에게 전수받은 몇 가지 기술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인생은 평탄치 않을 듯하니, 납치를 당했을 때 쉽게 도망칠 수 있는 방법부터 알려주지.”
그의 느른한 말투가 떠올라, 이런 상황인데도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아리아나를 내려다보던 오만한 눈빛이 떠오르자, 왜인지 쭉 빠졌던 힘이 되돌아오는 듯했다.
-“묶이기 전에 기절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납치를 피할 수 없겠다 싶으면 차라리 순순히 잡혀서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리고 있어. 그래야 도망도 쉬워.”
아리아나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밧줄의 감촉을 확인했다.
그들이 아리아나를 묶고 있을 때,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에게 배운 대로 밧줄 끝을 둥글게 말아서 움켜쥐었다. 다행히 놈들은 서두르느라 아리아나가 밧줄에 수작을 부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서둘러, 성문이 막히기 전에 나가야 해.”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아리아나는 꽉 쥐고 있던 밧줄을 놓았다.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자 단단히 조이던 밧줄이 느슨해졌다.
거친 밧줄이 손목에 쓸려서 상처가 났지만, 이를 악물고 손목을 빼냈다.
‘성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도망쳐야 해.’
자유로워진 손으로 눈가리개를 벗고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그다음에는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려고 했는데,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잘 풀리지 않았다. 어둡고 덜컹거리는 공간이라서 더 어려웠다.
밧줄 매듭을 풀려고 끙끙거리는 동안에도 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성문을 벗어나겠는데.’
성문을 나가게 되면 마차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도움의 손길을 바랄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짐마차의 덮개를 걷어내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누가 도와주러 오기도 전에 저놈들은 날 죽이고 도망칠 거야.’
그러니 스스로 도망칠 수 있는 상태에서 짐마차를 벗어나야만 한다.
문득 저들이 몸수색을 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상황이 급한지 저들은 아리아나의 몸수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짐마차에 태웠다.
‘아, 그래. 그게 있지.’
동령으로 오는 길에 몸에 숨길 만한 작은 단도를 몇 개 더 구입했다. 오늘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암살자들은 아리아나가 단도 한 자루만 가지고 있을 거라고 방심했을 것이다.
풍성한 치마 안주머니에 숨겨둔 단도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작았지만, 밧줄을 잘라내기에는 충분히 날카로웠다. 아리아나는 몸을 감싸고 있던 모포를 걷어내고 짐마차 덮개의 이음새 부분으로 기어갔다.
작은 틈으로 밖을 살펴보니, 아직 도시 안쪽이었다. 번화가에서는 벗어난 듯 건물이 드문드문 있었다.
‘이자벨은 도움을 청했을까?’
이자벨은 화이트 백작의 영애이니 기사들이 움직일 터였다.
‘암살자는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이겠지.’
폭발 소동을 일으킨 자가 한 명, 그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자가 세 명, 마차를 준비한 자가 한 명.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다섯 명.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해도 화이트 가문의 호위기사를 쉽게 해치운 걸 보면, 실력이 상당한 자들일 거야. 내가 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기척 정도는 금방 알아채겠지.’
그렇다면 이 암살자들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탈출해야만 한다. 각 성문에는 초소가 있으니,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여러 명 있을 것이다.
‘에이버스터는 자기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으면 초소에 알리라고 했어. 그렇다는 건, 일반 병사들뿐 아니라 기사들도 상주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탈출은 성문에 가까워지는 순간.
아리아나는 짐마차 덮개의 이음새에 걸린 줄을 단도로 끊어내고,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며 밖을 주시했다.
아리아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후, 마차를 끌던 암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기사들이……. 벌써 여기까지 소식이 닿았나?”
“그럴 리가. 도망친 계집애가 아무리 빨라도 이제야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텐데.”
“침착하게 가. 동령은 상인들에게 박한 곳이 아니니 수상하게 행동하지만 않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여기서 괜히 말을 돌려봐야 더 수상해 보여.”
마차는 아까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계속해서 움직였다.
아리아나는 속으로 셋을 센 후, 마차의 덮개를 걷어내고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