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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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모른다. (1)
2023.04.18.
북령에 돌아온 다음 날부터 사이러스는 숨 쉴 틈 없이 바빴다. 처벌해야 할 자는 처벌하고 상을 내려야 할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죽여야 할 자는 죽였다.
그렇게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실무를 해결한 끝에 여유가 찾아오자, 사이러스는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4월이지만 아직도 눈이 덮인 북령을 달리는 그의 눈에,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아리아나의 머리칼을 닮은 깨끗한 하늘.
문득 궁금했다.
아니, 사실은 숨 쉴 틈 없는 가운데, 잠깐 숨을 쉬는 동안에도 궁금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
아리아나가 동령에 온 지 3주가 지났다.
그동안 동제후는 서령에서 보낸 첩자를 잡아 죽였고, 첩자의 소식을 기다리던 레이첼은 결국 동제후에게 전보를 보냈다.
[혹시 전하께서 아리아나를 데리고 계십니까?]
동제후는 답했다.
[아니.]
그러는 한편, 재판 준비를 위해 증인들과 은밀히 서신을 나누었다. 브론테 가에서 쫓겨난 하녀들은 조금 거리껴 했으나 아리아나가 말한 증인들은 선뜻 나서주겠다고 답했다.
양육권을 되찾기 위한 재판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어, 이제 레이첼에게 통보하는 일만 남았다.
3주라는 시간 동안, 아리아나는 긴장한 것이 민망할 만큼 편하게 지냈다.
선대 제후비 캐러딘이 붙여준 시녀 카트린느는 아리아나를 감시하는 기색 없이 수족처럼 움직였고, 드나드는 하녀들은 대부분 아리아나에게 친절하며 정중했다.
가끔 찾아오는 펠로스는 언제나처럼 괄괄했고, 그나마 냉정하던 랭스티조차 아리아나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기색이 없었다.
아침과 점심은 따로 먹는 일이 많지만, 저녁에는 언제나 식당에 가서 러셀, 선대 동제후 내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긴장되던 자리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동령은 서령보다 기온이 조금 낮지만 보송보송한 공기를 가진 곳이었다. 서령보다 비가 내리는 날도 적어서 하늘은 언제나 쾌청했다.
서령에 있을 때는 늘 집안일을 해야 했는데, 동령에서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서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건 처음이었기에,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동생 방에 들어가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해?”
문이 벌컥 열리고 이자벨이 화려한 연두색 드레스를 휘날리며 들어왔다. 긴 남색 머리칼을 하나로 질 묶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는 이자벨은 생기가 넘쳐 보였다.
이자벨을 보는 건, 저택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이트 가문 모두가 모여 식사를 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리아나의 앞에 멈춘 이자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직도 그 꼴이야?”
“이자벨 아가씨, 그만하세요.”
카트린느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이자벨은 무시했다.
“말했잖아, 요새는 그런 색 안 입는다니까? 전하께서 드레스를 안 사줘?”
“넘치도록 많이 있어요.”
아리아나의 옷장에는 드레스가 잔뜩 걸려 있었다.
동령에 온 후로 잘 먹고, 잘 쉬어서 몸에 살이 붙었다. 드레스가 조금 작아질 때마다 카트린느가 러셀에게 보고한 건지, 매번 재단사가 방문해 사이즈를 재고 새 드레스를 만들어왔다.
평생 저 드레스들을 다 입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차피 다 분홍색이지?”
이자벨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옷장을 확인했다.
“이것 봐, 이것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전하는 센스가 없다니까.”
아리아나는 이자벨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선 채로 그녀가 하는 걸 지켜봤다.
다시 아리아나에게 돌아온 이자벨이 아리아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가자.”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드레스 숍이지. 내가 최신 유행으로, 너한테 딱 어울리는 드레스를 사줄게.”
“이자벨 님, 저는…….”
“그거 하지 말랬지?”
이자벨이 빽 외쳤다.
“그 이자벨 님 소리, 또 하면 욕한다? 나, 지금 간신히 참고 있거든?”
“…….”
“언니라고 해. 그리고 그 듣기 싫은 존댓말도 그만 좀 사용하고. 아, 진짜 착한 척. 재수 없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카트린느를 돌아봤지만, 카트린느는 난처한 듯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래, 가족 모두 감당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 카트린느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지.’
아리아나는 이자벨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기로 했다.
“응, 언니.”
이자벨이 아리아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 잘 익은 과일처럼 싱그러운 미소였다.
“아, 좀 낮네. 가자, 축제 준비해야지. 이제 드레스를 맞춰도 완성까지 간당간당해.”
“축제?”
“응, 동령은 5월 6일부터 8일까지 풍요제라는 축제를 열거든. 올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축제야. 집마다, 가게마다 맛있는 걸 잔뜩 차려놓고 사람들을 대접해. 행상인들도 엄청 많이 찾아와서 얼마나 재미있다고.”
이자벨은 아리아나의 손을 꼭 잡고 복도를 걸어가며 풍요제가 얼마나 신나는지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이자벨이 잠시 말을 멈췄을 때, 아리아나가 말했다.
“그런데 언니. 나는 아직 동령에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돼.”
“괜찮아, 허락받았어.”
“누구한테?”
“당연히 동제후 전하…….”
“이자벨, 또 거짓말을 하는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엄한 음성에, 이자벨이 우뚝 멈췄다. 아리아나도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캐러딘이 팔짱을 끼고 서서 노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자벨이 어색하게 웃었다.
“할머니…….”
“아리아나를 어디에 데려가는 거니?”
“얘, 옷이 너무 별로잖아요. 이런 옷 입고 나가면 영애들한테 비웃음만 산다고요.”
“내 눈에는 예쁘게만 보이는데.”
“할머니 눈에 예쁜 건 소용없죠. 할머니는 다 늙었는데.”
아리아나는 이자벨의 무례함에 할 말을 잃었다. 대놓고 저런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인 듯, 캐러딘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 아리아나는 남들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거 모르니?”
“뭐 어때요. 얘 머리카락은 하늘색이라서 누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화이트 가문이라고는 생각 못 할 텐데. 제 동생이 이런 꼴로 축제에 나가는 건 못 봐요. 드레스 사줄 거예요.”
이자벨은 반드시 아리아나를 데리고 나갈 각오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캐러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이제 마무리 단계이니 상관없겠지. 호위를 데려가렴.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고.”
+++
서제후는 웨스튼 시의 수사청장이 외부에서 온 자와 은밀하게 접촉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행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분위기가 남달랐습니다. 성문을 나갈 때 뒤를 쫓았지만, 멀리 가지 않아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리아나가 실종된 후, 서제후 역시 그 행방에 신경 쓰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이기는 하지만, 그 아이가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브론테 가문에 더해 오블렌 가문의 평판까지도 떨어질 수 있었다.
레이첼은 아리아나의 행방을 묻는 전보에 동제후가 [아니.]라고 답해왔다고 알렸지만, 서제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실력 좋은 자들을 섭외해 엘르스 시에 잠입시켰다.
‘어린 것이 의지할 곳은 결국 제 부모겠지. 동제후는 정이 많은 놈이니 제 딸을 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동제후가 할 일은 뻔했다.
아리아나의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학대 증거를 모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증언을 할 만한 사람들에게 감시를 붙였다.
그 선두에 있는 자가 제국 소속인 수사청장이었다.
제국 출신인 데다가 황제가 직접 선택하여 보낸 자이니, 그의 증언은 양육권 싸움에서 승패를 좌우할 터였다.
‘돈으로 움직일 놈이 아니니, 제거하는 수밖에.’
제국 소속의 수사청장을 죽이는 건 큰 모험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이상으로 가문의 평판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그 어린 계집의 양육권이 동제후에게 넘어간다면, 지금 퍼지는 소문은 진실이 되고 관심 없던 자들도 관심을 갖게 될 거야. 그전에 어떻게든 해야 해.’
서제후는 심복에게 명령했다.
“수사청장을 잘 지켜보다가 서령을 떠날 기미가 보이면 제국 땅을 밟기 직전에 죽여라. 파가누스나 도적의 짓으로 위장하고.”
+++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아리아나를 살펴보던 이자벨이 물었다.
“너희 엄마가 널 엄청 학대했다면서? 진짜야?”
“응, 진짜야.”
“때리고 그랬어?”
“응. 감옥에 가두고 며칠씩 밥도 안 주기도 했어.”
“하. 미친X. 친딸한테 그런 짓을 한다고?”
“그러게. 친딸한테도 그런 짓을 하더라.”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아리아나를, 이자벨은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래서 우리도 못 믿겠어? 우리가 그 미친 여자처럼 널 막 때리고 가두고 그럴 것 같아?”
아리아나는 그저 미소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할까. 내 지난 삶을. 모두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진 그 처절한 생애를.
다정한 자에게는 속셈이 있고, 상냥한 자에게는 꿍꿍이가 있었다.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바보처럼 믿어버린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믿지 말아야 했다.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이번 생은 그리 살기로 했다.
누구에게 사랑받지도 않고,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단단한 벽으로 자신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뭐, 그래. 이해해. 하지만 전하는 널 때리지 않을 거야. 외모가 좀 무서워서 그렇지, 다정한 분이시거든. 눈물도 많고.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하셨는데.”
거짓말.
아리아나는 마차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 찾아왔겠지. 그곳이 불길 속이라도 걸어왔겠지. 어떻게든 그 지옥에서 날 건져줬겠지.
그런 시도라도 했다면, 그때의 나는 당신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지옥도 걸었을 텐데.
아리아나의 입가에 퍼지는 쓸쓸한 미소에, 이자벨은 입을 다물었다.
작고 어린데도 어째서인지 자신보다 어른처럼 느껴지는 아리아나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평생 제멋대로 살아온 이자벨이지만, 저런 미소를 짓는 사람 앞에서까지 멋대로 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자벨은 울컥해서 말했다.
“야, 너 사람 눈치 보이게 좀 하지 마.”
“응?”
“화를 내고 싶으면 내고!”
이자벨이 두 손을 쭉 뻗어서 아리아나의 양 볼을 꼬집어 늘렸다.
“욕을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렇게 억지로 웃지 말고.”
“언니.”
“왜?”
“아파.”
“아, 미안.”
아리아나는 얼른 손을 떼고 입술을 비쭉거리는 이자벨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한참을 달린 마차가 드레스 가게 앞에서 멈췄다. 호위기사가 문을 열어주자 이자벨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아리아나가 내렸다.
손을 잡고 드레스 숍에 들어가는 두 영애의 뒷모습을, 골목 사이에 서 있는 사내가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