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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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꿈이었을까?
2023.04.17.
북령의 수도 레이커 시의 마호 성 앞은 오랜만에 귀향하는 북제후를 맞이하기 위해, 가신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는 테시오 헤른 공작이 싱글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아버지, 북제후 전하가 그리도 보고 싶으셨습니까?”
제 아들을 맞이할 때보다 기뻐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소공작 안드레이 헤른이 툴툴거렸다.
“전하께서 제후비와 함께 돌아오신다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그 제후비라는 여자가 별 볼 일 없는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이 녀석아, 전하가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뛰어나신데. 분명 굉장한 여인일 게다.”
“글쎄요. 애초에 저는 아이작이 보낸 편지 내용이 진실인지도 못 믿겠습니다. 그 녀석은 바보라고요. 분명 전하가 여인이랑 짧은 대화를 나누는 걸 가지고 오해해서 그런 편지를 보낸 걸 겁니다.”
“아무리 아이작이라도 제후비를 두고 그리 가볍게 행동할까.”
아이작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안드레이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넘치는 흥분이 담긴 편지가 도착한 것은 3월 말의 일이었다.
[제후비를 모셔가느라 늦습니다. 전하께서 제후비께 아주 푹 빠지셨어요. 진짜 예쁘고 영리한 분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사이러스가 예정보다 늦어져서 걱정이 태산이던 헤른 공작은 그 편지를 받은 이후로 벙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이러스가 어린 나이에 북제후 자리에 앉아서 아직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은 없지만, 공석인 제후비 자리는 큰 고민거리였다.
북령의 귀족들도, 일부 동령이나 서령, 남령의 귀족들도, 거기에 더해 제국의 귀족들까지도 호시탐탐 제 딸을 북령 제후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제 딸을 마호 성에 들이기 위해 은밀하게 손을 쓰는 자들도 있었고, 대놓고 청혼서를 보내는 자도 있었다. 딸을 가진 귀족 간의 은근한 알력 다툼은 북령의 골칫거리였다.
차라리 사이러스가 여자에게 관심이라도 많아서 이 여자, 저 여자 애인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더 쉬워질 것이다. 그중에 가장 좋은 가문의 여식을 제후비 자리에 앉히면 되니까.
하지만 사이러스는 한창 여자를 만나고 다닐 때인데도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이러스를 유혹하기 위해 접근하는 여자를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사이러스가 푹 빠진 여인을 데려온다고 하니, 헤른 공작으로서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마호 성에는 이미 제후비를 위한 방과 시녀들까지 마련되었다.
“저기 오십니다.”
길을 덮은 흰 눈이 말발굽에 차여 허공을 뽀얗게 물들였다. 그 사이로 말을 탄 네 사람이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앞서서 달리던 사내가 은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멈추자, 가신들이 허리를 조아렸다.
“전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헤른 공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이러스는 고개를 까딱하고 말을 탄 채로 성문 안에 들어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신들이 허리를 펴고 사이러스의 뒤를 따랐다.
헤른 공작은 사이러스를 따라가면서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어디를 봐도 제후비일 것 같은 여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여인이라고는 루이 한 명뿐.
‘설마 루이와 정분이 나신 것은 아니겠지.’
사이러스가 건물에 도착해 말에서 내릴 때까지, 헤른 공작은 의문을 삼켰다. 사이러스는 망토를 펄럭이면서 복도를 걸어가며 물었다.
“문제는 없었나?”
“네, 전하.”
“파가누스 쪽은?”
“작은 소동을 일으켰으나 안드레이가 선두에 나서서 진압했습니다. 파가누스 전사 중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가 둘 있어서 인질로 잡아놓았는데…….”
“죽여. 살려둬봐야 화근이 될 뿐이다.”
“네. 한데…… 전하, 제후비께서는 어디에 계신지?”
사이러스가 우뚝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아이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안드레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게 또 설레발을 쳤구나.’
사이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아이작을 노려봤다. 붉은 눈동자는 아이작을 집어삼킬 듯 서늘하게 빛났다.
아이작이 저절로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며, 사이러스가 낮게 명령했다.
“설명해.”
“그게…….”
안절부절못하던 아이작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여주십시오.”
“그래. 죽여.”
사이러스가 싸늘하게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안드레이가 아이작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제가 벌을 나누어 받겠습니다.”
사이러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대단한 우정이시군. 옷을 벗겨 채찍 스무 대씩을 때려라.”
채찍형은 한 대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결코 가볍지 않은 형벌이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왔다고 해도, 한 나라의 국모가 될 제후비 문제를 가벼이 입에 담은 것은 큰 문제였다.
북령에서는 그랬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헤른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작, 저 녀석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제 친구들이 끌려 나가는 데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간 사이러스는 침실 앞에 도착해 망토를 벗었다.
“쉬겠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네, 전하.”
가신들을 모두 물리고 방에 들어간 사이러스는 소파에 앉아, 서령에서 손에 넣은 편지들을 꺼내 천천히 읽었다.
레이첼이 동제후비로 있는 동안 서제후와 주고받은 편지. 거기에는 선대 북제후 내외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전쟁의 진실이 일부 담겨 있었다.
‘아주 유용하지만, 아직은 부족하지.’
사이러스가 북제후의 지위를 되찾은 후, 북령은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적이 너무 많았다. 섣불리 이 편지의 존재를 알려봐야 적들에게 손을 쓸 기회만 만들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좀 더 많은 증거와 힘이 필요해.’
사이러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선대가 죽었을 때 사이러스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안팎으로 사이러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서 몸을 피해야 했다.
사이러스와 함께 도망친 유모는 적들의 손에 죽었고, 뒤늦게 사이러스를 찾아내서 돕던 헤른 공작은 오른손을 잃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었다.
호시탐탐 북령의 강력한 군사를 욕심내던 황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령에 사람을 보냈다. 비어있는 북제후의 자리를 ‘임시’로 맡겠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사이러스의 행방을 찾았다.
사이러스는 아무 힘이 없는 상태에서 발견되면 죽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살았다. 강해져야만 했고, 강한 자를 모아야 했다. 패배한 전쟁에서 흩어진 흑기사단을 되찾아야 했고,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는 힘을 길러야만 했다.
먹을 것이 없을 땐 흙을 씹어 먹고, 물이 없을 땐 말의 오줌을 받아먹으며 몇 년을 보낸 끝에, 당당히 북령에 귀환했다.
그때의 나이가 14살이었다.
‘그 후로 6년.’
사이러스는 아무래도 선대의 오명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선대 북제후는 동제후와 손을 잡고 파가누스의 힘을 이용해 제국을 삼키려다가, 동제후와 내분이 생겨서 그의 손에 죽었다는 죄목이 있었다.
황제는 선대 북제후에게는 가혹했으나, 동제후에게서는 군사지휘권을 빼앗았을 뿐 큰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움직이다가, 그 뒤에 서제후 로디안 오블렌이 있음을 알아냈다. 그 시기에 서제후의 딸 레이첼이 동제후비로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리아나 덕에 찾아낸 편지에는 그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 이 편지를 세상에 드러내 봐야 부모의 오명을 씻고 싶어 하는 발악으로만 보일 테지.’
서제후는 황제에게 신뢰받고 있으니, 그 입을 놀려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 뻔했다. 선대 북제후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에게 그 죄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과 증거가 필요했다.
‘서령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겠지. 서제후의 성은 쉽게 드나들긴 힘드니, 레이첼 브론테를 지켜보는 게 정답이었어.’
서령을 생각하니 아리아나가 떠올랐다.
동그스름한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 아래에서 반짝이는 맑고 푸른 눈동자는 맑은 날의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리아나는 꼿꼿하고 당차게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망토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뒷모습은 무척이나 작았지만,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아리아나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동제후는 레이첼 브론테에게 아리아나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으니, 형편없는 대우를 하지는 않겠지.’
만약 서령에서와 같은 대우를 한다면, 선대 북제후의 죽음과 관련 여부를 떠나서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리아나를 처음 마주했을 때, 사이러스는 흥미로운 한편 섬뜩함을 느꼈다.
고작 16살의 어린 소녀가, 저택에 갇혀 학대를 받아온 어린 소녀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움직여야만 했던 시절의 자신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표정 뒤에 감춰진 폭풍과도 같은 증오를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사이러스 또한 마찬가지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마음이 쓰였다. 레이첼에게 있을지도 모를 증거품을 찾는 것보다 아리아나의 자취를 더듬는 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리아나를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문득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아리아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보인 진짜 미소.
-“필요하다면 웃지요. 웃을 만해도 웃고요.”
사이러스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던 그 모습을 떠올리자, 북령에 들어온 이후 얼음처럼 굳어 있던 사이러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과거 선대 북제후와 북제후비를 죽이고 북제후 자리를 차지하려던 사람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완벽히 없앤 것은 아니었다. 사이러스는 북령에 있어도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자리를 노리고 제 목을 베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되기에,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도 더 예리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를 떠올리는 이 순간은 다르다는 걸, 사이러스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여느 때보다도 편안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채찍형은 루이가 실행에 옮겼다.
비명 한 번 흘리지 않고 채찍 스무 대를 다 맞은 아이작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루이, 넌 진짜 가차 없구나.”
“제 할 일은 끝났으니 나가보겠습니다. 두 분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편히 쉬게 생겼냐?”
아이작이 툴툴거렸지만, 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형벌실을 떠났다.
아이작은 끙끙거리며 짐을 놔둔 곳으로 기어가서 연고를 꺼내 돌아와, 안드레이의 등에 연고를 치덕치덕 발랐다.
“너는 왜 쓸 데 없는 편지를 보내서.”
“진짜라니까 그러네. 전하가 그 소녀, 아니, 여인이지. 그건 여인의 자태야. 하여간 그 여인에게 푹 빠졌다고. 나도 내 눈을 의심했지만,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다니. 우리가 왜 늦었는지 알아? 제후비를 동령으로 모셔다 드리느라 늦었다고.”
“동령?”
“아, 그래. 이 얘기는 안 했구나.”
안드레이가 아이작의 등에 연고를 발라주는 동안, 아이작은 서령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안드레이는 아이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이러스가 여자에게 수작질을 했다고? 도와줬다고? 이용 가치 운운하면서 먹을 것도 사다 날랐다고? 웃었다고? 잠자리를 마련해줬다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그녀가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맞춰줬다고? 동령에 볼일이 있는 척하면서 동령까지 데려다줬다고?
아이작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안드레이는 피식 웃었다.
“너, 꿈 꿨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