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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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6)
2023.04.16.
커다란 식당에서 기다리던 이자벨이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는 걔를 봤다고 했지? 어때? 예뻐?”
“음.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작아.”
“작아? 얼마나?”
에이버스터가 두 손으로 작은 공만 한 크기를 만들었다.
“요만한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자벨, 조용히 하렴. 아리아나는 상처가 많다고 하니까 그 애가 오면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이자벨의 어머니인 브리안트 화이트 백작부인이 말했다. 이자벨은 입술을 비쭉거리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식당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나 화이트 공주님께서 들어가십니다.”
모두 허리를 세우고 식당 문을 응시했다.
천천히 열리는 문 뒤에서 아리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워 보이는 하늘색 머리칼과 작은 얼굴, 마치 진주처럼 하얀 피부와 마른 체구를 감싼 연분홍 드레스.
꼿꼿이 허리를 세운 아리아나에게서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 기품이 흘러넘쳐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아리아나가 어느 높은 지위를 가진 귀부인이라고 착각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리아나의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치마가 거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우아하게 걸어, 시종이 안내한 자리에 멈췄다.
아리아나는 치마를 살며시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아리아나입니다.”
“오, 아리아나! 가족끼리 격식 차릴 것 없다. 얼른 앉아라.”
펠로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나는 펠로스를 향해 살풋 미소를 지은 후 자리에 앉았다.
찌르는 듯한 눈으로 아리아나를 살펴보던 이자벨이 중얼거렸다.
“저게 뭐야? 요새 누가 분홍색을 입어? 되게 촌스럽네.”
“이자벨!”
화이트 백작부인이 눈을 부라리자, 이자벨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뭐 잘못 말했어? 누가 분홍색을 입어? 요새 같은 날씨에는 연두색이 딱이라고. 동제후 전하, 설마 저 애 방이 아직도 분홍색인 건 아니겠죠?”
러셀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리아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펴주셔서 감사해요, 이자벨 님. 하지만 저는 분홍색을 좋아해서 마음에 들어요.”
아리아나의 말에 이자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무슨 이자벨 님이야. 왜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불러?”
“네?”
“언니잖아. 네 언니라고, 사촌 언니.”
“아…….”
“뭐야, 쟤 되게 멍청하네. 아니, 누가 언니한테 저렇게 정중하게 말을…… 아얏! 엄마! 왜 꼬집어!”
“이자벨. 너, 이따 집에 가서 보자.”
화이트 백작부인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쏘아보자, 이자벨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더는 아리아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펠로스가 크게 웃었다.
“미안하다, 아리아나. 내 딸이 애가 좀…… 음.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착한 녀석이니까 친하게 지내다오.”
“이자벨 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제가 영광이죠, 백작님.”
“뭐야, 아빠. 삼촌이라고 불렸다더니, 하나도 그렇게 안 부르네, 뭐.”
이자벨이 투덜거리자 화이트 백작부인이 도끼눈을 하고 이자벨을 쏘아봤다. 에이버스터는 이자벨이 또 헛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아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아리아나. 우리는 구면이지?”
“네, 전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야, 언제? 오빠가 저 애를 도와줬어? 나 몰래?”
“네가 동제후 전하의 딸이라는 걸 듣고 정말 놀랐어. 진작 얘기했더라면 더 편하게 체이스 성까지 데려다줬을 텐데.”
에이버스터는 이자벨을 깨끗이 무시했다.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어요. 소공작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큰일일 뻔했습니다. 감사드려요.”
에이버스터는 소공작인지라 아리아나의 사정에 대해 상세하게 들었기에, 그녀가 모두에게 이렇게 거리를 두고 행동하는 걸 이해했다.
아리아나가 서령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다들 짐작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만약 멍 자국이 저리 오래 남을 만큼 학대를 당했다면, 저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한 아버지를, 그 가족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문의 또래 아이들을 소개시켜주기 위한 자리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흘러갔다.
아리아나는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했으나 먼저 나서서 질문하는 법이 없었고, 시종일관 기품 있게 식기를 움직여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아리아나, 넌 정말 매너가 좋구나. 황실의 예법을 보는 것 같은걸.”
펠로스의 칭찬에 아리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실의 예법. 3황자를 돕기 위해 움직이면서,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기품을 익혔다. 승마도, 예법도, 춤과 처세술도, 모두 살아남기 위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익혀야만 했다.
그저 황후의 가호를 받고 더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한 방편으로 익힌 귀족 영애들과는 각오가 달랐다.
화이트 백작부인이 말했다.
“우리 이자벨도 좀 보고 배우면 좋겠네.”
그 말이 방아쇠가 된 듯, 계속 눈동자만 굴리며 앉아 있던 이자벨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말릴 틈도 없이 아리아나의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아리아나의 앞에 있는 접시를 집어 들었다.
“너, 당근 싫어하지?”
이자벨의 과격한 태도에 아리아나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먹지 마.”
이자벨이 접시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주스 잔을 집어 들었다.
“너, 라임 주스도 싫어하지? 그럼 이것도 먹지 마.”
“이자벨!”
에이버스터가 일어나 이자벨의 팔을 잡았다. 러셀과 랭스티가 데리고 나가라는 눈짓을 하자, 에이버스터가 이자벨을 끌어냈다.
이자벨은 에이버스터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싫은 건 안 먹으면 되잖아. 뭘 참으면서 먹고 있어?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고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먹고 싶은 걸 먹어. 그러고 싶어서 이 체이스 성에 찾아온 거 아냐? 왜 여기서도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앉아 있어?”
바락바락 외치는 목소리가 아리아나의 심장에 박혔다.
“쬐끄만 게 기품 있는 척이나 하고! 하나도 안 예뻐 보이거든!”
아리아나는 침착하게 앉아 있었지만 가슴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자벨의 모든 말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탁-
이자벨이 끌려 나간 식당의 문이 닫혔다.
이자벨은 복도에서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못 할 말 했어?”라며 빽빽 외치고 있었다.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멀어지다가 결국은 안 들리게 되자, 화이트 백작부인이 민망한 듯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리아나. 우리 딸이 좀 드세서…….”
“아닙니다.”
아리아나는 먹기 싫어서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놓은 당근을 내려다봤다.
“살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에이버스터와 이자벨은 응접실로 이동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백작부인은 애들에게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뜨고, 나머지는 응접실로 이동했다. 시종이 다과를 내려놓고 나간 후, 랭스티가 입을 열었다.
“아리아나.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이제 시작이구나.
아리아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구나. 원하는 게 있어서 찾아왔겠지?”
“네. 저는 제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체이스 성에 머물고 싶어요. 그때까지만 저를 아리아나 화이트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머물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저도 화이트 가문의 이름에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거예요.”
“쯧.”
펠로스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리아나? 성인이 될 때까지라니…… 그 후에도 쭉 여기 머물러야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형님?”
러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은 생각을 간파하려는 듯 예리하게 아리아나를 살피고 있었다.
“감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이 체이스 성에 제가 있을 곳을 마련해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또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반드시 그 두 배로 갚을 테니, 헛된 투자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아리아나의 단호한 음성을 들으며, 러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리아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러셀의 폐부를 찔렀다. 그 어떤 도움도, 애정도 거부하는 태도가 러셀을 매섭게 질책하는 듯했다.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뭘 한 거야? 당신은 아버지잖아. 내가 이런 꼴을 당하고 살 줄, 정말 몰랐던 거야?
캐러딘이 보낸 사람들은 아리아나가 서령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냈다. 브론테 공작가에서 일하다가 작은 실수를 저질러 매를 맞고 쫓겨난 하녀들은 쉽게 입을 열었다.
하녀도 입지 않을 낡은 옷. 한겨울에도 얇은 단벌옷.
추운 날에도 얼음장 같은 물로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작은 실수만 해도 얻어맞고, 방에 갇혀 끼니를 거르며 반성문을 쓰기 일쑤.
감기가 심하게 걸려 죽어가는 데도 의사를 불러주지 않고, 아픈 몸을 이끌고 집안일을 함.
청소를 하던 아리아나가 열이 심해 쓰러지자, 공작부인은 “얘는 쓸모가 없어. 누굴 닮아서 이러는 건지.”라고 말하며 짜증만 냄.
상상한 것보다 끔찍한 보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냉정한 랭스티조차도 떨리는 주먹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 아리아나가 누구도 믿지 못하고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 자리에 있는 누가 감히 아리아나에게 ‘우리는 가족’ 따위의 말을 운운할 수 있을까?
“빚을 갚는 것은 되었다.”
러셀이 어둡게 침잠한 음성으로 말했다.
“은혜로 여길 필요도 없다. 이곳은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니, 준비가 되는 대로 너는 동령의 공주가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기 위해 네 양육권을 찾아와야 한다. 증인도, 증거도 찾았다. 하지만 서령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라, 더 탄탄하게 준비를 하려고 한다.”
“찾아낸 증인은 쫓겨난 하녀들인가요?”
“그래.”
“더 강한 영향력이 있는 증인이 있습니다.”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아리아나는 차분하게 두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어린 소녀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쟁쟁한 이름들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정작 그 이름을 꺼낸 아리아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 두 분의 증언은 하녀들 백 명의 증언보다 값지겠지요.”
“그렇겠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동제후 전하.”
아리아나가 일어나서 러셀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신하가 주군에게 하는 예를 보이는 딸에게, 러셀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달싹거리던 붉은 입술 사이로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원망스럽겠지.”
아리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하지. 원망스럽지 않을 리가 있겠어? 그렇게 버려둘 거였다면 낳지나 말지. 그렇게 방치할 거였다면 뱃속에 있을 때 죽여버리지. 그렇게 죽었더라면 고독도, 고통도 몰랐을 텐데. 외로움도, 추위도 느끼지 못했을 텐데.
죽기 직전, 목을 파고 들던 거친 밧줄의 느낌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 절망과 설움이 여전히 생생했다.
회귀하고 고작 두 달. 잊기에는 너무도 짧은 기간. 지난 28년, 어둠밖에 없었던 그 삶의 지독한 악취는 여전히 아리아나에게 진득하게 베여 있었다.
가슴에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을, 아리아나는 고요히 접어 삼켰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아리아나는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 곳 하나 흠잡을 수 없는 맑은 미소를 머금고, 아리아나는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낳아주신 부모님을 원망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