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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4) (43/238)


(43)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4)
2023.04.14.


이제껏 조용히 있던 랭스티가 입을 열었다.

“양육권 문제가 있겠군요.”

아리아나의 침대 옆에 서 있던 러셀이 고개를 돌려, 제 동생을 응시했다. 랭스티가 계속해서 말했다.

“보통 부모가 이혼할 시, 큰 문제가 없는 한 여자아이의 양육권은 모친이, 남자아이의 양육권은 부친이 갖게 되죠. 그래서 그 여자가 아리아나를 데려갔을 때 빼앗아오지 못한 거고.”

“하지만 형, 그 여자는 애를 이렇게 만들어놨어! 그 여자에게 엄마 자격이 있다는 거야?”

“펠로스, 내 얘기 좀 끝까지 들어. 아리아나가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동령으로 도망쳐 왔다고 해서 우리가 이 애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만약 레이첼이 아리아나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데려가겠다고 하면 보내주는 수밖에 없어요.”

랭스티의 말대로였기에, 러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러셀은 또 악을 쓰려 하는 펠로스를 막고 말했다.

“우선 아리아나가 동령에 있다는 걸 감춰야겠군. 그 후에 학대의 증거와 증언을 모아야 하고.”

“네, 형님. 형님은 당장 아리아나를 동령의 공주라고 선포하고 싶으시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리아나의 양육권을 가져오는 게 우선이에요.”

랭스티가 어두운 눈으로 아리아나를 내려다봤다.

“아리아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 회복하는 대로 서령에서의 생활을 물어봐야 합니다. 그걸 알아야 증인과 증거를 찾아, 양육권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테니까요.”

+++

3일 만에 깨어난 아리아나의 눈에 들어온 건, 푸른 눈동자였다. 맑은 날의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

그 푸른 눈동자가 무척이나 다정한 빛을 띠고 있어서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눈동자의 주인이 러셀이라는 걸 깨달은 건 잠시 후였다.

아리아나는 러셀이 옆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냥 누워 있거라.”

낮고 굵은 목소리가 아리아나를 멈추려 했지만, 아리아나는 기어코 상체를 일으켰다.

“동제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일어나지 못하는 걸 용서해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버럭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 방에 러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

러셀 너머를 살펴보니, 러셀처럼 덩치가 좋고 외모가 비슷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말했다.

“아빠지. 네 아빠! 동제후 전하라니, 누가 아빠를 그렇게 불러?”

이 사내는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걸까? 게다가 아빠라니. 아리아나는 러셀을 아빠라고 부를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펠로스. 목소리 좀 낮춰.”

러셀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화이트 가문의 막내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펠로스 화이트 백작. 아리아나가 알기로는 백기사단의 기사단장을 겸하고 있었다.

“화이트 백작님께 인사…….”

“삼촌이다.”

“예?”

“네 막내 삼촌이라고. 동제후고, 백작이고…… 그따위로 부를 거면 아예 부르지를 마!”

펠로스의 거친 명령에, 아리아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앓아 누워 있느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럴 때에 적절한 대응책이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어른스럽고 야무지게 보일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해봐라.”

“네?”

“삼촌이라고 불러보라고.”

아리아나는 러셀을 흘끔 쳐다봤다. 러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에, 아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삼촌…….”

“크흐! 이거지!”

펠로스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외쳤다.

아리아나는 지금 이게 대체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삼촌.

서령에도 물론 삼촌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아리아나에게 삼촌이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고, 아리아나를 브론테 가문에 빌붙어 사는 노예 아이처럼 대우했다.

“봤지, 랭스티? 내가 제일 먼저 삼촌이라고 불렸어.”

펠로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제야 아리아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러셀이나 펠로스보다 체구가 작지만, 호리호리하게 키가 컸고, 차분하고 냉정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저 사람이 화이트 가문의 차남인가?’

랭스티 화이트 공작.

그는 펠로스와 달리 살피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기에, 아리아나는 긴장했다.

“아리아나. 나는 랭스티 화이트라고 한다. 네 아버지의 동생이지. 펠로스의 형이고.”

“화이트 공작님이신가요?”

“그 얘기는 레이첼…… 네 어머니에게 들었니?”

“네. 화이트 공작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일어나서 인사드리지 못 하는 걸…….”

“아리아나. 넌 아직 많이 아프단다.”

그는 냉정하고 예리한 눈빛과 달리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우선은 잘 먹고 잘 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저는 이제 괜찮아요. 질문하신다면 답하도록 할게요.”

아리아나는 애써 명랑하게 말했지만, 랭스티의 표정이 굳어져서 당황했다.

‘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하라는 대로 해야 했나?’

아리아나는 화이트 가문 사람들의 의심을 푸는 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아리아나의 방문 목적을 모르는 이상 마음이 편치 않을 터였다.

“형은 사람이 대체 왜 그래? 애를 왜 압박하고 그래?”

펠로스가 성질을 내며 랭스티를 뒤로 끌어냈다.

“내가 뭘 압박을 했다고…….”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할 말도 많다고 하면 애가 압박을 받지. 그냥 푹 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뭘 묻고 뭘 말하겠대! 안 그러냐, 아리아나?”

아리아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조용히 아리아나를 지켜보던 러셀이 말했다.

“펠로스 말이 옳다.”

펠로스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코 랭스티의 팔을 끌어당겨 침실 밖으로 내보냈다. 다시 돌아온 펠로스가 침대 옆에 서서 아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펠로스의 손은 곰처럼 크지만 따뜻하고 다정했다. 조심조심 쓰다듬는 손길이 당혹스러워서, 아리아나는 얼어붙었다.

“아리아나, 랭스티는 원래 말을 밉게 하는 성향이 있으니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다. 삼촌이라고 부를 것도 없어. 네 삼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있어라. 알겠지?”

“예에…….”

“의사가 그러는데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고 하더라. 영양이 부족하대, 영양이! 그 미친 것!”

펠로스가 또 버럭 해서 아리아나는 움찔했다. 펠로스가 얼른 표정을 부드럽게 바꿨다.

“너한테 한 소리가 아니니 무서워할 거 없어.”

“네에.”

“삼촌이라고 한 번 더 불러볼래?”

“네, 삼촌.”

“크흐. 그래, 이거지.”

“…….”

“아리아나, 네가 요만할 때.”

펠로스가 검지 한 마디 정도를 보여줬다.

“그때 보고 처음 보네.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했는데, 정말 예쁘게 자랐어. 정말로 아주 예뻐.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 정말 잘 자랐다, 아리아나.”

뭉클한 무언가가 가슴을 채워서, 아리아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칭찬 감사드려요, 그리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믿으면 안 돼, 기대면 안 돼,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렇게나 따뜻한 칭찬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서, 이렇게나 다정한 손길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꾸만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엉엉 우는 어린애처럼 보이면 안 된다. 성가신 아이라고 여겨지면 안 된다.

아리아나는 이불 안에서 주먹을 꽉 쥐고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나한테 딸이 하나 있거든. 너보다 한 살 많은 앤데, 애가 좀…… 음, 좀 그렇긴 해도 착한 애야. 그 녀석도 널 많이 궁금해해. 나중에 몸이 많이 나아지면 소개시켜줄게.”

“네.”

“펠로스.”

러셀의 나직한 부름에, 펠로스가 아, 하고 연신 쓰다듬던 손길을 거뒀다.

“배고프겠다. 사람을 시켜 식사를 가져오도록 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펠로스가 나간 후, 아리아나는 러셀과 둘만 남겨졌다.

러셀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예리한 눈빛으로 아리아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아리아나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흠 없는 자세로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이윽고 하녀들이 식사를 가져왔다.

침대 위에 작은 상이 놓였다. 하녀들은 그 위에 그릇을 하나씩 올려놨다. 전부 씹기 삼키기 좋은, 부드러운 음식들이었다.

하녀들이 나간 후에도 러셀은 계속 침대 옆에 있었다.

‘내가 먹는 걸 관찰하려는 걸까?’

아리아나는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에 스푼을 들었다. 오랫동안 앓다가 깨어나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스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은스푼이 상에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런.’

식기를 떨어뜨리는 건 최악 중에서도 최악. 큰 실수를 저질렀다.

수습하기 위해 얼른 스푼으로 손을 뻗는데, 러셀의 손이 더 빨랐다. 먼저 스푼을 손에 쥔 러셀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손에 힘이 없나?”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이 아니다.”

러셀은 스푼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조용히 수프 접시를 노려봤다.

‘왜 저러는 거지?’

아리아나는 러셀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냉랭하고 무심한 얼굴 안에 어떤 생각을 감추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한참이다 싶은 시간이 흐른 후, 러셀이 손을 움직였다. 아리아나는 스푼을 돌려주려는지 알고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는데, 러셀은 그 스푼으로 수프를 떴다.

‘수프를 먹고 싶었던 걸까?’

의아해하는 아리아나의 입 앞으로 수프를 가득 담은 스푼이 다가왔다.

“입 벌려라.”

“네?”

“입 벌려.”

이건 또 뭐지? 새로운 고문 방법인가?

아리아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을 벌렸다. 입안으로 다가오는 스푼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눈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입안에 깊고 풍부한 수프의 맛이 느껴졌다.

아리아나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뭘까?’

러셀은 또 수프를 한 스푼 뜨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다시 스푼을 입가로 가져가던 러셀은, 아리아나의 눈에 담긴 의문을 읽은 듯이 말했다.

“내가 먹여주마.”

“네에?”

“입 벌려라.”

“제가……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전하.”

“이 정도는 하게 해다오.”

왜인지 상처를 받은 듯한 러셀의 음성에, 아리아나는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러셀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수프를 떠서 아리아나의 입에 넣어주었고, 아리아나는 아기 새처럼 그 수프를 받아먹었다. 불편하고 버거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리 했다.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워갈 무렵, 러셀이 말했다.

“지금 당장 널 동령의 공주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리아나도 예상한 바였다.

“마땅한 준비를 끝내고 양육권을 가져오게 된다면, 그때 널 정식으로 동령의 공주라 선포하겠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나요?”

“무엇을?”

“동령에 온 목적이나 제 의도 같은 것이요.”

“랭스티는 알고 싶은 듯하지만, 나는 됐다.”

러셀은 부드러운 푸딩을 스푼으로 떠서 아리아나의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네 목적이 무엇이든, 의도가 무엇이든, 너는 내 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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