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3) (42/238)


(42)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3)
2023.04.13.


아리아나가 체이스 성에 도착한 다음 날. 화이트 가문의 차남인 랭스티 화이트 공작과 막내인 펠로스 화이트 백작이 체이스 성을 찾아온 건 거의 동시였다.

티어도어는 집무실로 밀고 들어온 그들에게 아리아나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펠로스가 분개해하며 외쳤다.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형님! 그 여자가 뭐라 하든, 일단 서령에 가서 아리아나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확인해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쉬운 일이 아니잖니. 러셀이 서령으로 움직였다면 황제가 그걸 곱게 봐줬겠니?”

“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도 형님 편을 드십니까? 세상 어느 아버지가 14년 동안 애를 방치하고 찾아가 보지도 않느냐고요! 황제가 의심을 하든, 서제후와 전쟁을 하든, 가서 애가 잘 지내는지는 확인을 했어야지요!”

“그만해라, 그만. 그래서 러셀도 후회하고 있잖느냐.”

티어도어가 나무랐지만, 펠로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인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합니까? 부모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시기가 다 지났는데!”

펠로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러셀의 폐부를 찔렀다. 모두 옳은 말이었다.

아버지의 자격이 없다. 그래서 아리아나가 동제후 전하라고 부를 때에, 감히 아버지라 불러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일단 가서 아리아나를 좀 봐야겠습니다.”

펠로스는 아리아나가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했다.

아리아나가 태어나던 날, 화이트 가문의 온 가족이 모여서 이제나저제나 그 아이의 탄생을 기다렸다.

펠로스에게는 이미 딸이 한 명 있었지만, 러셀이 그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나왔을 때 연한 하늘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칼을 보며 다짐했다.

내 딸처럼 사랑해주겠다고.

그런데 레이첼에게 빼앗겼다. 레이첼은 떠난다는 말도 없이 아리아나를 데리고 서령으로 도망쳤고, 달랑 편지 한 장을 보내 이혼을 청했다.

펠로스는 언제나 동령에서 도망칠 기회만 노리던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잘 키울지 늘 걱정이었다.

당장 아리아나의 방으로 향하려는 펠로스를, 티어도어가 막았다.

“아리아나는 잔다. 고단한지 한참을 자는구나. 행여나 깨울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 애는 깨어 있으면 계속 긴장하니까.”

“제길! 어린애가 왜 가족을 만나서 긴장해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나 귀 안 멀었으니까 목소리 좀 죽여라. 하여간 저놈의 성질머리는 어디서 배운 건지…….”

“아버지한테 배웠습니다, 아버지한테!”

결국 펠로스는 티어도어에게 뒤통수를 맞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랭스티가 입을 열었다.

“서령에서는 소식이 없습니까?”

캐러딘이 대답했다.

“그래, 아직은 없구나. 애가 도망친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서령 쪽 상황은요?”

“사람을 보냈으니 조만간 소식이 올 테지.”

“아리아나가 정말 아무 의도 없이 동령에 찾아온 건 확실해요?”

랭스티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펠로스가 빽 외쳤다.

“아니, 형!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아리아나가 첩자 노릇이라도 하려고 여기에 찾아왔다는 거야?”

“16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서령에서 이곳까지 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가능하지! 아리아나는 우리 화이트 가문 핏줄이니까! 우리 이자벨이라면 산에 던져놔도 곰을 잡아먹으면서 살아남을걸!”

“이자벨이야 그렇지. 하지만 아리아나가 이곳에 있었던 건 태어난 직후부터 며칠뿐이야. 그 후로는 쭉 서령에서 지냈고. 학대를 당했다는 것도 꾸며내려면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어.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어른스럽다면서? 만약 제 몫을 하게 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란 거라면…….”

“그만해!”

러셀이 언성을 높여 랭스티의 말을 끊었다.

푸른 눈동자가 노기를 담아 타올랐다.

“너, 지금 아리아나를 의심하는 거냐?”

“형님, 필요한 의심입니다.”

“대체 어떤 아이가 학대를 꾸며내!”

“아이니까요. 어린아이니까 제 부모가 하는 말을 믿고, 제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죠. 레이첼이 한 짓을 잊으셨습니까? 그 여자가 아리아나에게 동령에 관한 안 좋은 소리만 늘어놓고, 서령을 위해 일하라 했다면 어찌하시려고 합니까? 어린아이는 옳고 그름도 따지지 못하고 제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할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 딸이다.”

“물론 그렇죠. 저도 아리아나를 제 조카라고 생각해요. 만약 아리아나가 정말로 학대를 당하고 도망쳐서 이곳에 온 거라면 정말……. 하아. 하지만 형님, 형님은 동제후입니다. 동령을 우선으로 생각하셔야 해요.”

“그럼 동제후 자리는 네가 가져라. 나는 아리아나보다 귀한 게 없으니.”

랭스티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던 펠로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형님!”

랭스티는 한숨을 삼켰다.

물론 랭스티도 조카가 싫은 거 아니었다. 다만 그 의도가 궁금했다.

화이트 가문 사람들은 제 가족이라면 덮어놓고 믿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서제후가 동령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동제후비로 들어온 레이첼만큼은 믿었다.

그 믿음의 결과는 황제의 의심으로 이어졌다.

레이첼은 동령으로 와서 적응하지 못하는 서령 공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뒤로는 정보를 빼돌렸다. 레이첼이 화이트 가문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를, 그들은 그저 아직 적응 못 하고 어색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리아나는 레이첼의 손에 자랐으니, 레이첼의 성향을 배웠을지도 몰라.’

어린아이는 하얀 도화지 같아서, 누구 손에 자라느냐에 따라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랭스티는 레이첼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아나에게 검은 물을 들였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때 시녀장 에프린이 찾아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아리아나 님이……!”

러셀이 벌떡 일어났다.

“아리아나가 왜?”

“열이 펄펄 끓어요. 많이 아프신 것 같습니다.”

소동이 벌어졌다.

집무실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서 의사를 찾으며 달려 나갔다. 랭스티조차도 그랬다.

화이트 가문의 주치의, 혹시 몰라 시내에서 이름난 의사들까지 불러오라고 지시한 그들은 아리아나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리아나는 유독 작아 보였다. 뼈가 드러날 만큼 마른 몸과 오래된 흉터가 남은 팔, 시간이 지나서 누렇게 변한 멍 자국.

열이 끓어 흘린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었고, 파랗게 질린 입술은 트고 갈라져 피가 맺혀 있었다.

“이럴 수가……!”

펠로스에게는 아리아나 또래의 딸이 있었다. 그래서 아리아나 정도 되는 나이의 소녀가 어느 정도의 체격을 갖는지 알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게…… 이게 어딜 봐서 학대를 꾸며낸 겁니까!”

펠로스가 버럭 외치는 소리에, 랭스티는 찔끔했다.

랭스티가 보기에도 아리아나의 상태는 일부러 꾸며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는 너무 작고 너무 마른 데다가 여기저기 오래된 멍 자국이 남아 있어서, 마치 빈민가의 아이처럼 보였다.

“이걸 봐, 형! 이게 어딜 봐서 학대당한 척, 도망친 척하는 거냐고!”

펠로스의 고함 소리 때문일까.

안 그래도 고통스러워 보이던 아리아나의 작은 얼굴이 더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잘못……했어요…….”

작은 입술이 벌어지며 쉬고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절박한 애원, 처절한 사죄.

화이트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리아나의 마른 팔이 들썩 움직여 제 얼굴 앞을 가렸다. 쏟아지는 폭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그렇게 비참하게 움직였다.

“제발…… 어머니…….”

모두가 숨도 쉬지 못 하는 고요 속에, 어머니를 향한 사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남편과 함께 전쟁터를 오가며 검을 들었던 캐러딘조차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한때는 ‘전쟁터의 마녀’라고 불리던 노제후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괜찮다. 이제 괜찮아.

그리 말해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 저 마르고 작은 육체가 바스라져 사라질 것만 같아,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럴 때, 가문의 주치의인 유리엘이 들어왔다.

“아이고. 이런.”

침대 옆에서 아리아나의 상태를 살펴본 유리엘이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이거. 아이고. 멍이 왜 이렇게…… 하이고.”

그녀는 아리아나의 상태를 살펴보는 내내 침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러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리아나는 괜찮은가?”

“전하, 이 아가씨는…… 그런데 이 영애는 누구시죠?”

“내 딸이네.”

유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은 제 호기심을 채우는 게 우선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차분하게 설명했다.

“전하, 공주님께서는 오랫동안 영양실조에 시달려 오신 듯합니다. 전신에 멍 자국이 있는데, 최근에 생긴 건 없어 보이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해온 걸로 보이고요. 멍 자국이 사라지려면 한참이 걸릴 겁니다. 그리고 발에 난 상처로 보아 맨발로 다니다가 생긴 상처인 것 같은데…….”

유리엘이 아리아나의 상태에 대해 말할 때마다, 화이트 가문 사람들은 움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지금 이렇게 열이 오르신 이유는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가 덮쳐와서 그런 듯합니다. 안 그래도 약하신 몸이라서 피로를 견디지 못하신 거겠죠. 우선은 푹 주무시게 하고 깨어나시면 영양가가 풍부한 식사를 하시며 체력 회복에 좋은 약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러셀이 목 메인 소리로 물었다.

“문제는 없겠나?”

“이미 문제투성이라…….”

중얼거리던 유리엘은 러셀의 표정을 보고는 아차 싶었는지 말을 부드럽게 바꿨다.

“잘 드시고 푹 쉬시면 서서히 좋아지실 겁니다. 아이의 몸은 회복이 빠르니, 영양가 많은 음식을 드셔서 건강해지시면 흉터도 서서히 사라질 거고요. 우선 돌아가서 약을 지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유리엘이 나간 후에도 모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침대에 오도카니 누워 있는 자그마한 소녀를 그저 눈에 담았다.

두 주먹을 꽉 쥐고 턱 근육이 움찔거릴 만큼 이를 악물고 있던 펠로스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내 이 미친 여자를 그냥……!”

탁-!

티어도어가 당장이라도 레이첼을 잡으러 갈 듯한 펠로스의 뒤통수를 때렸다.

“넌 좀 조용히 좀 해라, 이 녀석아.”

“애를 저 꼴을 만들어놨는데 그냥 놔둡니까? 네?”

“그냥 놔두지 않으면? 전쟁이라도 일으키게?”

“그래야죠! 황제가 떨어뜨리는 꿀이나 빨아먹고 사는 서령 놈들을 치는 데 군사가 많이 필요하기나 하겠습니까?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가서 싹 죽여버리고 레이첼, 그 계집의 목을 가져오면 아리아나도 마음이 편해지겠죠.”

티어도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막내아들은 너무 과격하고 생각이 짧은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티어도어야말로 지금 당장이라도 서령에 찾아가, 레이첼을 잡아와 아리아나 앞에 무릎을 꿇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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