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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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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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2)
2023.04.12.
하얀 대리석이 깔린 욕실은 넓고 호화로웠다.
커다란 창문은 녹색, 적색, 금색 등 현란한 색상으로 꾸민 스테인드글라스로, 밖에서 안을 볼 수는 없지만 햇빛이 들어와 하얀 대리석 욕실에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큰 욕조에 가득 채운 따뜻한 물에는 향수를 몇 방울 떨어뜨린 듯 좋은 향기가 났다. 욕조 옆의 트롤리에는 쿠키가 담긴 접시와 시원한 포도 주스가 놓여 있었다.
사이러스 일행과 함께 이동한 덕에 편하게 올 수는 있었지만, 오랜 여행으로 누적된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긴장이 풀려, 그동안 참고 있던 여독이 짓누르듯 몰려왔다. 이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으나 아리아나는 꾹 참았다.
‘화려하구나.’
아리아나는 피곤해서 자꾸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욕실을 둘러봤다.
‘그래, 원래 서령보다는 동령의 세가 크지. 그것 때문에 서제후가 동제후를 경계한 거였고.’
북령과 동령은 북동쪽에 자리 잡은 파가누스를 상대해야 하기에 강한 군사를 키우는 것이 허락되었다. 본디 기후가 좋고 자원이 풍부한 곳에 자리 잡은 동령은 군사력까지 더해지자 제국과 비교될 만큼 강해졌다.
언젠가 황실의 외척이 될 꿈을 가진 서제후는, 동령이 너무 커지는 걸 경계했다. 그래서 레이첼을 보내 몇 가지 수작을 부려 황제와 동제후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안 그래도 의심 많은 황제는 그 작은 이간질에 동제후에게서 등을 돌렸다.
파가누스 잔당이 아직 남아 있지 않았다면, 황제는 동제후를 짓밟아 뽑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동쪽에서 파가누스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기에, 동령을 그냥 놓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필요할 때는 제국의 군사들을 부릴 수 있는 군사지휘권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동령은 오로지 동령의 힘만으로 파가누스를 막아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삿된 신을 섬기며 기묘한 술수를 부리는 파가누스 때문에 동령의 동쪽 국경은 늘 경계가 삼엄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동령의 분위기도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화로워 보였다.
‘동제후는 이런 곳에서 살았구나.’
아리아나는 살아남기 위해 모두의 눈치를 보며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온갖 모멸감을 감내해야만 했다. 저 좋을 대로 사용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웃어야만 했고, 그들의 뜻에 따라 몸을 바쳐야만 했다.
그러다가 죽었다.
그렇게 치열하고 절박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동안, 동제후는 이토록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살았다.
일순 차오르는 원망을 간신히 억눌렀다.
분노하여 서럽게 절규하는 대신, 옆에 놓인 쿠키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쿠키는 달았으나 가슴은 쓰디썼다.
아리아나는 제 얼굴만 한 쿠키를 전부 먹은 후에야 욕조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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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좋은 인상의 시녀장은 자신을 에프린 로만 백작부인이라고 소개했다.
“다들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더니 온몸이 노곤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리아나는 마음을 다잡고 시녀장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체이스 성의 식당은 여러 개였는데, 그중에서도 좁은 편에 속하는 식당으로 안내를 받았다. 크지 않은 식탁에서 오순도순 식사를 하자는 노부인의 배려였으나, 아리아나는 좁은 식탁에 붙어 앉아야 하는 게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시종이 꺼내주는 의자에 앉았다. 동제후의 옆자리였다.
맞은편에는 선대 동제후 내외가 앉아 있었다.
아리아나는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앉아서, 살피는 듯한 그들의 시선을 받아냈다.
선대 동제후비 캐러딘이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일단은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마련했는데.”
그제야 아리아나는 제 앞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
짧은 시간에 준비한 게 놀라울 만큼 예쁘게 장식한 음식들은 하나 같이 맛있어 보였다.
“저는 무엇이든 감사한 마음이니, 선 동제후비께서는 안심하세요. 갑자기 찾아뵈었는데도 이리 귀한 음식으로 대접해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딱히 차린 것도 없는데 아리아나가 과할 정도로 감사 인사를 늘어놓자, 러셀이 미간을 좁혔다.
얼마나 못 먹고 살았기에, 이걸 귀한 음식이라고 하나.
티어도어가 말했다.
“아가. 어서 먹거라.”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리아나는 포크를 들고 차분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우아하게,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 황후의 앞에서 식사를 했을 때처럼 품위 있게.
트집 잡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태도에, 티어도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린 것이 얼마나 눈치를 보면서 살았으면, 먹을 때도 저리 조심스러운 건지.
아리아나의 행동은 마치 황실 사람처럼 고귀해 보였으나,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소녀가 가질 만한 품격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저러한 예법을 익혀야만 했던 아리아나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가슴이 미어져서 차마 포크를 들지 못하는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며, 아리아나는 시험을 당하는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후식으로 나온 셔벗까지 흠 하나 잡을 수 없게 완벽한 매너를 갖춰서 먹었다.
캐러딘이 물었다.
“부족하지는 않니?”
“네, 살펴주셔서 부족함은 전혀 없었습니다. 잘 먹었어요.”
잘 씻기고 잘 먹였으니, 앞으로 화이트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쫓아낼까, 아니면 내 가치를 증명하게 할까?
어느 쪽으로 나오든 대응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티어도어가 말했다.
“그럼 그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구나.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텐데.”
“네?”
이건 아리아나의 예상에서 벗어난 말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쉬라니. 이렇게 쉽게 방을 한 칸 내어준다고?
다른 꿍꿍이가 있나 싶어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캐러딘이 먼저 일어나서 아리아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나는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노부인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캐러딘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오랫동안 검을 쥔 자의 손.
문득 사이러스가 화이트 가문은 여인들도 전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가?”
캐러딘이 채근하듯 부르는 소리에, 아리아나는 손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캐러딘의 얼굴로 옮겼다. 그리고 당차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동령의 문화에 익숙지 않아 선 동제후비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순간, 캐러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져서 아리아나는 뭔지는 몰라도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른 일어나서 사과의 말을 하려는데, 그전에 캐러딘이 아리아나의 손을 꽉 잡았다.
“이 할미가.”
캐러딘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가 손을 좀 잡고 싶어서.”
아리아나는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캐러딘을 올려다봤다. 한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노부인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리아나의 작은 손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굳은살 때문에 거칠기는 해도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캐러딘의 손에 이끌려 식당을 나가며, 아리아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손을…….’
물론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이렇게 잡고 걷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브론테 공작이나 공작부인만 해도 헬레나와 빅토리아가 어릴 때 항상 이렇게 손을 잡고 걸었으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당연히 누리는 그것이, 아리아나에게는 허락된 적이 없었다. 아리아나가 잘 걷지 못하는 나이일 때도, 아리아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혼자서 해야만 했다.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것도 오롯이 아리아나의 몫이었다.
당연히 혼자 해야 하는 일이기에, 욕심낸 적도 없었다. 레이첼의 손을 잡고 걷는 헬레나와 빅토리아를 부러워한 적도 없었다.
소망한 적도 없는 일이 현실이 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들어찼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캐러딘을 따라서 걸었다.
중앙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가서 왼쪽 복도를 걸었다. 캐러딘은 커다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온 시녀들이 방문을 열자, 캐러딘은 아리아나의 손을 꼭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아리아나는 그 화려함에 놀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넓은 응접실과 두 개의 침실, 드레스룸과 욕실. 커다란 창문은 햇빛이 잘 들어와서 방 안의 공기를 따뜻하게 덥혔고, 온 곳에 은은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응접실의 가구들은 하나, 하나가 고급스러웠고, 커다란 벽난로까지 있었다.
빅토리아나 헬레나조차 이렇게 넓고 멋진 방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아리아나는 이 방이 필시 선대 동제후비의 방일 거라고 생각했다. 방을 장식한 가구나 장식품의 색깔이 조금 미묘하긴 해도, 제게 주어진 방일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네 방이란다, 아리아나.”
그래서 캐러딘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제 방이요?”
“그래. 언젠가 네가 동령에 놀러 올 수도 있으니, 늘 네 방을 준비해두고 있었단다.”
생각지 못한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피로와 놀람으로 머릿속이 멍해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 방을…….”
“방 안을 함께 구경하고 싶지만, 많이 피곤하겠지. 푹 쉬고 일어나면 그때 같이 이 할미랑 얘기도 하고, 방 구경도 하자꾸나. 알겠지?”
캐러딘은 아리아나를 침실까지 데려가서 아리아나가 침대에 눕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리아나는 평생에 이렇게 푹신하고 커다란 데다가 좋은 향기까지 나는 침대는 처음인지라, 이런 곳에서 잠이 올지 의문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누적된 여독은 햇빛 향기가 나는 보송보송한 이불을 오롯이 받아들여, 아리아나를 깊은 수면에 빠지게 만들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든 아리아나를, 캐러딘은 안쓰럽게 내려다봤다.
“잠들었습니까?”
아리아나가 무서워할까 봐 한 발 늦게 따라온 러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애는 제 손을 잡아주려는지도 모르더구나.”
캐러딘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러셀이 침통하게 고개를 숙여 작디작은 딸을 눈에 담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연하늘색 머리칼이 베개에 흐트러져 있었다. 깨어 있을 때는 틈 하나 주지 않고 완벽한 자태를 자아냈지만, 잠든 모습은 어린아이 같았다.
다만 잠이 들었는데도 일그러진 얼굴이 러셀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괜찮다, 이제 괜찮아.
그런 마음을 담아 어린 딸의 뺨을 쓰다듬어주려던 손을 거뒀다. 행여나 부서질까 봐, 혹여나 깨어나서 또 그렇게 경계와 긴장으로 가득 찬 눈빛을 지을까 봐.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 작은 아이는 모든 순간에 그리도 완벽한 자태를 자아낼 수 있었던 걸까?
그제야 러셀은 자신이 아버지로서 딸에 관한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절감했다.
레이첼이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서령에 발을 딛기 힘든 상황이라서 그랬다는 건, 이 아이에게 전부 변명으로만 들리리라. 제 귀에도 그렇게 들리니까.
“이제 알게 해줘야지요.”
러셀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걸을 때, 부모 손을 잡아야 한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