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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체이스 성으로 (1) (38/238)


(38) 체이스 성으로 (1)
2023.04.09.


-“끔찍한 곳이었어. 언제나 날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지. 널 가졌는데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더라. 그 눈빛이 목을 죄는 것 같더라. 동령 시민들도 다 똑같아. 그런 군주를 가졌으니 다들 그렇게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 하루하루가 지옥 속에 사는 것 같았어.”

동령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레이첼의 얼굴에는 언제나 혐오가 가득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일 때부터 세뇌당하듯이 들어온 이야기 때문에, 되돌아온 지금도 동령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령은 모두가 의심의 눈빛을 하고 서로를 경계하며 여행자를 핍박하고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만큼 도시 성문을 들어가는 게 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쉽게 들여 보내줬을 뿐 아니라 친절하게 말까지 건넸다.

“심부름이라도 다녀오는 게냐? 이런 날씨에 덥지 않아?”

아리아나는 눈에 띄는 머리카락 색깔 때문에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망토 자락을 여미며 고개를 젓고 서둘러 성문을 통과했다.

뒤에서 병사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나이 또래 애들은 이것저것 지적하는 걸 싫어한다더군. 우리 누님도 애가 말을 안 듣는다고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몰라.”

“하긴. 우리 애도 요새 슬슬 고집이 세지기 시작했어. 지난겨울에는 추워 죽겠는데도 호수에서 수영을 하겠다고 야단이었지 뭔가.”

졸지에 말 안 듣는 어린애가 되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서령에서 온 수상쩍은 소녀로 여겨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엘르스 시는 동령의 수도이니만큼 길이 잘 포장되어 있었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은 깨끗했다.

길을 따라서 양옆으로 세워진 건물은 서령의 것보다 높은 편이었고, 대부분이 연한 회색이라서 환한 느낌이 들었다.

아리아나가 들어온 성문에서 멀지 않은 곳이 시내인 듯, 건물과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여행객들에게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아리아나를 그저 심부름 나온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듯 다가오지 않았다.

상점 앞에 내놓은 판매대에는 여러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고, 오며가며 멈춰서 상품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그런 것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총총 걷던 아리아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약초상 주인인 듯 판매대 위에 놓인 약초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할아버지.”

“음? 심부름 왔니?”

“네에. 저, 혹시 여기에 브래든 은행이 있나요?”

“브래든 은행? 브래든 은행…… 아, 거기라면 저쪽 저 길로 쭉 들어가다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단다. 은행 근처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하고.”

“네, 감사합니다.”

아리아나는 꾸벅 인사를 한 후,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브래든 은행은 다른 건물들처럼 연회색으로, 입구에 크게 [브래든 은행]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계좌를 확인하고 돈을 찾으려고요.”

“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은행 직원은 아리아나를 상대로도 정중했다. 직원이 안내해준 곳으로 가서 계좌 증표를 건네고 비밀번호를 말하자, 직원이 서류를 한참 확인하다가 말했다.

“총 35골드가 들어 있네요.”

“네? 얼마요?”

“35골드요.”

35골드라니.

아리아나가 입금한 돈은 22골드였다. 고작 한 달 사이에 이렇게 이자가 붙을 리 없는데.

‘설마 루이가……?’

루이가 로잘린으로 지낼 때, 그녀에게 심부름 값으로 매번 장신구를 하나씩 건넸다. 그걸 전부 돈으로 바꿔서 아리아나의 계좌에 입금했다면, 이 정도 금액이 될 것이다.

돈을 찾을 때는 계좌 증표와 비밀번호가 필요하지만, 입금할 때는 계좌의 번호만 알면 된다.

‘이런. 또 빚이 늘었어.’

루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받기만 한 것 같아서, 이제는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리아나가 한동안 말이 없자, 은행 직원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혹시 입금 금액이 다르십니까?”

“아뇨. 5골드만 찾을게요.”

“네, 잠시만요.”

아리아나는 금화 5개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은행에서 나왔다.

약초상 주인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발길을 서둘러 은행 주위를 벗어났다. 다행히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듯했다.

아리아나는 잠시 멈춰서 저 멀리 보이는 체이스 성을 응시했다.

‘이제.’

하얀 벽돌로 쌓아 올리고 녹색 지붕을 얹은 탑 여러 채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만 보아도 그 위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저기로…….’

아리아나가 막 발길을 옮기려 할 때였다. 누군가 망토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위화감에 고개를 돌린 아리아나는, 헌팅캡을 눌러쓴 사내가 서둘러 멀어지는 뒷모습을 발견했다. 혹시나 싶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금화가 사라졌다. 아리아나는 황급히 사내의 뒤를 따라서 달렸다.

아리아나가 따라온다는 걸 눈치챈 사내의 걸음이 빨라졌다. 사내는 인파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피하며 달렸지만, 아리아나도 요령 좋게 그를 뒤따랐다.

점점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워졌다. 사내의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5골드쯤…….’

포기할까 싶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마당에 그 큰돈을 이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한 번 더 힘을 냈다.

이윽고 간신히 사내를 따라잡았지만, 그를 뒤쫓느라 주위의 풍경이 달라진 걸 깨닫지 못했다.

사람 많고 밝은 거리에서 음산한 기운이 풍기는 인적 드문 골목에 접어들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소매치기 사내가 아리아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네. 이래봬도 솜씨가 좋은 편인데 어떻게 눈치챈 거지?”

아리아나는 망토 안에서 단도 손잡이를 꽉 쥐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이쯤은 큰 문제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조용히 내 돈을 돌려준다면 관청에 고발하지는 않겠어.”

“뭐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어린애였어?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갖고 다니는 거냐? 혹시 너도 동업자냐?”

아리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그는 아리아나의 맑고 고요한 눈빛에 찔끔했지만, 곧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너도 이 바닥에서 살아왔으면 잘 알겠지. 어느 귀족을 털어서 이렇게 큰돈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손에 쥔 게 임자야.”

“이 바닥에는 상도덕도 없는 모양이지?”

“그런 게 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안 하지. 하여간 어린 계집애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만 돌아가라. 이 거리는 너 같은 계집애가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아리아나가 보기에도 그리 보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돈을 되찾지도 못하고 뒷골목의 무뢰배들을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돈 몇 푼 때문에 진흙탕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돈 5골드가 아쉬워서 목숨을 버릴 수는 없지.’

아리아나는 과감하게 5골드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음산했던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서로를 살피며 조용히 행동하던 사람들이 후다닥 소리를 내며 황급히 흩어지고 있었다.

아리아나를 상대하던 소매치기 사내도 낯빛이 달라져 도망치려 했으나, 그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말을 탄 기사들 여러 명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 나리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요.”

사내는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납작 엎드렸다. 아리아나를 대할 때의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아무 짓도 안 했다.”

가장 앞에 있던 기사가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무 살쯤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였는데, 차림새나 기품으로 봐서는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신분 같았다.

“네, 네. 저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막일꾼일 뿐입니다요. 오늘도 일이 있나 싶어서 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뿐,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 부하가 잘못 봤나? 내 부하는 아까 네가 저 아이의 돈을 훔치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고 했거든.”

“그, 그럴 리가요. 저런 허름한 옷을 걸친 애한테 뭐 볼 게 있다고 돈을 훔치겠습니까? 훔치려면,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라도 제가 훔치려 했다면 저 애보다는 고급스러운 차림을 한 사람을 노렸겠죠.”

“약초상 주인이 어린애가 은행에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걱정스럽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겸사겸사 부하 녀석을 보냈는데 이게 웬일인지, 현장을 목격해버렸다네?”

기사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 말해봐. 네가 훔친 게 아니라면 잘못 보고를 한 내 부하를 이 자리에서 목 베어 죽여야 하니까. 물론 그 후에 네 몸을 수색할 건데, 네 돈이 아닌 것 같은 돈이 1엔테 나올 때마다 살을 한 점씩 썰어버릴 거야.”

1골드는 100만 엔테. 아리아나에게 훔친 돈만 5골드이니, 500만 번 살을 썰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젊은 기사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형형해서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무 잘못 없는 아리아나조차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인데, 죄 있는 사내는 오죽할까.

그는 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며 주머니에서 5골드를 꺼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젊은 기사가 말에서 내려와, 소매치기가 내민 금화 5개를 집어 들었다. 아리아나는 젊은 기사도 소매치기처럼 자신을 그쪽 사람이라고 오해할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금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꼬마야. 금화 5개, 맞니?”

“네, 맞아요.”

“잠깐 기다려봐.”

젊은 기사가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턱짓을 하자,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소매치기를 결박해서 사라졌다.

젊은 기사가 아리아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바로 앞에 멈춰 섰을 뿐인데도 위압감이 있었다.

아리아나는 꼿꼿이 서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제야 그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남색 머리…….’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색의 머리칼은 화이트 가문의 상징이었다. 색의 농도가 조금씩 다를 뿐, 화이트의 성을 가진 자들은 전부 남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그 형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지 못해서 하늘색 머리카락이 되었는데도, 레이첼은 하늘색 머리칼만 보면 동제후가 떠오른다며 혐오했었다.

‘누구지? 이 얼굴은 본 기억이 없는데.’

이제 곧 동제후인 러셀 화이트를 만나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빨리 화이트 가문 사람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리아나가 그를 살펴보는 동안, 그도 아리아나를 가만히 살펴봤다. 기사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답게 관찰하는 눈빛이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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