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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스며드는 온기 (8) (37/238)


(37) 스며드는 온기 (8)
2023.04.08.


사이러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대는 틈이 날 때마다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군.”

“감사하니까요. 그리고 이제 제 길을 가야 하고요.”

“그대의 길이 어딘데?”

“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아리아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괜히 어깃장을 놓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갈 길은 분명하지.”

북령으로 가겠지.

서령에서 곧바로 북령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사이러스는 제국 땅까지 함께 이동했다. 동령으로 향하는 아리아나를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제국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먼 동령까지 동행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

이미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더는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동령에 갈 건데. 그대가 향하는 곳과 같은 방향인가?”

아리아나는 그의 말에 놀라느라, 뒤에 있는 노아와 아이작의 입이 떡 벌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 루이는 여전히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하, 절 동령까지 데려다주려고 하시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부터는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대는 정말 자신만만하군. 내가 왜 그대를 위해 동령에 간다고 생각하지?”

“……아닌가요?”

“볼일이 있어.”

아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진심을 알아내려 했지만, 인형처럼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그의 부하들을 봤더니, 다들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이 다 옳고, 전하의 말씀이 다 진실입니다, 라는 듯이.

“정말로 동령에 볼일이 있으세요?”

“그래.”

“파가누스 때문인가요?”

아리아나의 질문에 사이러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대는 역시 흥미로워. 여인이 놈들의 이름을 쉽게 입에 담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파가누스.

그들은 대륙 북동쪽에 거대 도시를 이루고 살던 이교도 집단이었다. 말이 거대 도시지, 그 크기는 하나의 국가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신을 믿는 집단일 뿐이었는데, 하는 짓이 점점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을 납치해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강해지기 위해 인간의 피를 마셨다.

보다 못한 제국은 파가누스 토벌령을 내렸고, 그 전쟁에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사이러스의 부모 또한 파가누스와의 전쟁에서 죽었다.

사이러스가 북제후의 자리에 앉았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북쪽에 퍼져 있는 파가누스를 치는 것이었다. 사이러스는 대승을 거뒀고, 그 결과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지위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무리를 이뤘던 파가누스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파가누스 잔당들은 여전히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사이러스가 파가누스 잔당과 전쟁을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이유로 그가 동령에 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동쪽은 파가누스 잔당이 많이 남아 있지. 황제가 동령에서 관심을 끊은 후에는 동제후 혼자 파가누스 잔당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야. 무섭지 않나? 파가누스들은 여인을 가장 잘 먹는다던데.”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겠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파가누스에 관한 끔찍한 소문 때문에 여인들은 그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두려워했지만, 아리아나에게 진짜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그 어떤 복수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죽는 것.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위험이 존재하지요. 친모 손에 죽으나 이교도에게 먹혀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새삼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이러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화이트 가문은 여인들도 모두 뛰어난 전사라고 하더군. 그대에게도 확실히 화이트 가문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야.”

“제가 전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전쟁의 방식이 다르지. 힘을 쓸 건지, 머리를 쓸 건지는 그대가 정하고, 그 방식으로 전사가 되면 되는 거야.”

그의 단호한 말에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여행을 하는 내내 제 힘이 부족한 걸 탓하고 아쉬워했다. 루이만큼 강해지고 싶어서 사이러스에게 호신술을 배웠지만, 조금도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방식을 찾으라는 그의 말이 아리아나의 길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무력을 사용해서 그들을 짓누를 계획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고결하고, 또 어디까지나 천박하게. 그들의 방식대로 그들을 끌어내리리라.

“전하께서는.”

아리아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제 앞에 선 사내를 올려다봤다.

따지자면 사이러스는 아리아나보다 한참 어렸다. 아리아나는 28살까지 살다가 이 나이로 되돌아온 거니까.

그런데도 사이러스는 부러울 만큼 지혜로웠다.

“참으로 의젓하십니다.”

무어라 칭찬해야 할지 몰라서 내뱉은 말에, 사이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소리 내서 웃는 건 처음이라, 아리아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은빛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웃는 그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도, 크게 벌어진 입과 그 안에 보이는 가지런한 이도. 가슴에 깊이 새겨질 정도로 근사했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사이러스가 아리아나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대만 할까.”

+++

노아는 말을 타고 달리는 내내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낮게 뻗은 나뭇가지를 발견하지 못해 얼굴을 부딪쳐 말에서 떨어졌다.

앞서서 달리던 사이러스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저래야 내 주군이신데…….’

아까 사이러스가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 노아와 아이작, 루이는 얼어붙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서 웃는 주군이라니.

그런 건 상상해본 적도 없다.

루이가 말을 멈추고 성가신 듯 물었다.

“괜찮아?”

“루이, 주군께서 진심인가 봐. 정말로, 정말로 진심. 진짜, 진짜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진심.”

“그걸 인제 알았어?”

“그런데 왜…… 제후비를 동령으로 보내드리는 거지? 그냥 북령으로 모셔 가면 안 되나?”

“글쎄. 주군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

제국은 넓은 데다가 사람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기에,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동쪽 국경을 넘을 때까지 15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3월 초중순 약간은 쌀쌀한 날씨에 출발했는데 어느새 따뜻해졌다.

정글이 많고 습한 서령과 달리, 동령은 보송보송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같은 대륙에서 제국 하나를 사이에 끼고 있을 뿐인데도 이렇게까지 경치가 달라진다는 게 신기했다.

동령에 접어든 후에도 며칠을 더 달린 끝에 동령의 수도인 엘르스 시 외곽에 도착했다.

성문 밖은 농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밭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아리아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직전에 들른 도시에서 구입한 망토의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높은 성벽을 응시했다.

동제후가 사는 체이스 성은 성 밖에서도 보일 만큼 견고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구나.’

동령 부근까지 와본 적은 있지만, 동제후가 사는 엘르스 시까지 온 적은 없었다. 3황자가 동제후를 제거하려고 계획할 때, 그 물밑 작업을 도울 만큼 동제후에게는 정이 없었다.

황실 파티에서 딱 한 번 본 적 있던 동제후의 냉랭한 눈빛이 방금 전에 본 것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찌푸린 미간, 불쾌한 듯 일그러진 표정, 굳게 다문 입술과 선을 긋는 듯 차가운 눈빛. 그 눈빛이 얼마나 서늘한지, 아리아나는 그에게 가벼운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서령에서 도망쳐 이곳까지 쳐들어왔으니, 황실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보다 더 불쾌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내가 레이첼의 편지만 손에 넣었더라도…….’

그때 사이러스의 방해로 편지를 손에 넣지 못한 게 떠올라, 일순 그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은 곧 사라졌다.

사이러스 덕분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일은 이제 됐다.

‘괜찮아. 최악이라고 해봐야 브론테 저택에서의 대우가 반복될 뿐이겠지. 그런 건 익숙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차피 동제후에게 기대하는 것은 동령의 공주 자리일 뿐. 딱히 그의 애정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 신경 쓸 바가 아니다.

“긴장했나?”

사이러스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제 아닙니다.”

“그래, 긴장할 거 없어. 그대처럼 영특한 여인을 누가 싫어하겠나.”

모두가요. 모두가 싫어하더라고요.

아리아나는 그 말을 삼키고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사이러스를 돌아봤다. 하지만 사이러스는 이미 사라졌고, 그의 부하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는 넓은 밭 사이로 난 길에 혼자 남겨졌다.

지금까지 사이러스 일행과 있었던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들의 흔적은 없었다. 모습도, 향기도, 발자국조차도.

순간,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울적한 기분이 아리아나를 덮쳐왔다.

아리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걸로, 그 기분을 몰아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어. 꿈결처럼 스쳐 가는 인연이었을 뿐이야.’

언젠가 아리아나에게 이용 가치가 충분해진다면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올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이러스의 주위에는 아리아나가 아니더라도 영리하고 다재다능한 인물이 수없이 많을 테니까.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서 있던 자리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한 후, 엘르스 시 성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모습을 감춘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걷는 그녀의 뒷모습은 당당하고 씩씩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지 말라고 그 팔을 붙잡고 싶기도 하고, 이대로 그녀를 납치해 북령으로 데려가고 싶기도 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지 못한 채, 멀어지는 아리아나를 눈에 담았다.

아이작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이대로 북령에 돌아가려고?”

“그래.”

“루이나 노아라도 남겨두고 가지 그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루이나 노아도 반드시 그러고 싶다는 듯 눈을 빛내며, 사이러스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이러스는 단호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동제후는 서제후랑 달라. 그의 눈을 속이는 건 쉽지 않을 테지. 그리고 동령은 아리아나에게 따뜻할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 동제후는 제후비가 저 꼴이 될 때까지 모르는 척해왔어. 인제 와서 자기 딸이 나타났다고 잘해줄 리가 있겠어?”

사이러스는 레이첼의 코트 안에서 찾아냈던 편지들을 떠올렸다.

서제후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 끼워져 있던, 동제후의 편지.

“그 부분은 딱히 걱정이 안 되는데, 헤른 공작의 잔소리는 걱정되는군.”

“아…….”

아이작은 북령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헤른 공작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예정보다 훨씬 늦게 돌아가게 된 데다가, 미래의 제후비도 데리고 가지 못하게 생겼다.

“헤른 공작님한테 서신을 보내뒀었는데…… 큰일 났네.”

“서신? 무슨 내용인데?”

사이러스가 궁금한 듯 물었지만,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북제후비를 모셔갈 거라는 내용이었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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