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스며드는 온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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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스며드는 온기 (7)
2023.04.07.
아이작이 연금술사로 이름을 날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만든 약을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몸에 느껴지던 근육통이 사라졌다. 무너뜨리려는 듯 덮쳐오던 피곤도 가셨다.
‘우와.’
마법이 사라진 후, 현재의 연금술사들은 약사와도 같은 일을 했다. 옛날에는 마시기만 해도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주는 약도 있었다지만, 이제는 그런 걸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만든 약은 오래전의 연금술사들이 만든 미지의 약처럼 효과가 좋았다.
그저 생글생글 잘 웃는 예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이작이 새삼 달라 보였다.
아리아나가 아이작에게 은밀한 존경심을 품게 되었을 때, 아이작은 사이러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사이러스, 제후비도 북령에 가고 싶어 하는 거 맞지?”
“아니.”
“뭐? 그럼 지금 납치하려는 거야? 납치 결혼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결혼을 하지도 않을 거고, 납치를 하지도 않아. 대체 왜 내가 저 여자와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이작은 ‘그걸 몰라서 물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북제후의 지위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살아온 사이러스는 남녀 관계에 대해 무지한 면이 있었다.
“그럼 다들 아리아나 양을 제후비라고 부르는 데도 그냥 놔두는 이유가 뭐야?”
“저 여자를 누가 뭐라고 부르든 나와 무슨 관계지?”
“오, 그럼 자네를 연모하는 샤를로트 블렌윗 황녀를 제후비라고 불러도 괜찮겠군. 난 전부터 황녀를 제후비라고 부르고…….”
아이작은 사이러스의 서늘한 시선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사이러스가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날 너무 짜증나게 만들지 마, 아이작.”
아이작은 생각했다.
‘이것 봐! 황녀를 제후비라고 하는 걸로는 이렇게까지 화내면서! 잡아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사이러스가 루이와 함께 있는 아리아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저 여자는 흥미로워.”
“그래, 그러시겠지.”
“저택에 갇혀 하녀들이나 하는 일을 하며 살았는데, 승마술은 어디에서 익혔을까?”
“아, 그러고 보니…… 정말 어디서 익힌 거지? 한두 번 타본 솜씨가 아니던데.”
“우리가 조사해도 저 여자에 대한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어. 만약 저 여자가 그 모든 걸 어떻게 익혔는지 알아낸다면,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겠지.”
사이러스의 냉랭한 어조에, 아이작은 한숨을 삼켰다.
사이러스가 모두에게 벽을 치고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아이작만큼 잘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과거 선대 북제후 내외에게 벌어진 일이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이러스가 앉은 북제후의 지위는 견고해 보이지만, 사실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누군가 살짝 입김을 불면 덧없이 꺼질 작은 촛불.
촛불이 등잔불이 되고, 등잔불이 화염이 될 때까지 안심할 수 없는 사이러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러다가 사이러스가 후회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이용이라니. 아직도 그 소리야?”
“아니면 달리 내가 저 여자를 도울 이유가 없지 않나?”
사이러스는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는 표정이었기에, 아이작은 그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말했다.
“뭐가 됐든, 자꾸 그 소리를 해댄다면 자네는 언젠가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사이러스가 피식 웃으며 아이작의 손을 거둬냈다.
“내 인생에 후회라는 건 없어, 아이작. 지난 일에 대한 후회는 절망만 안겨줄 뿐이지.”
+++
저녁을 먹는 내내 루이와 노아가 소곤거렸다.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루이는 숲속으로 들어가고, 노아는 불에 크고 둥근 돌을 가져와서 굽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걸까?’
배불리 먹어서 나른해진 아리아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노아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북령에만 전해지는 주술 같은 건가? 아니면 북령 사람들은 돌도 씹어 먹나?’
아직도 마법이 남아 있는 북령은 신비로운 땅이었다. 아리아나가 모르는 것들이 북령에는 잔뜩 존재할 것만 같았다.
이윽고 숲에 들어갔던 루이가 커다란 통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왔다.
쿵-!
통나무를 내려놓자 땅이 살짝 울렸다. 루이는 그렇게 무거운 걸 짊어지고 있었으면서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루이가 검을 뽑더니 통나무 안쪽을 파기 시작했다. 그녀의 현란한 검술이 통나무에 쏟아져 내렸다. 통나무 안을 채우고 있던 나뭇조각들이 현란하게 튀어 올랐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건 두 사람은 족히 들어갈 크기의 커다란 나무통이었다.
‘정말로 뭘 하는 거지?’
아리아나는 점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루이와 노아가 하는 일들이 신기해서 쏟아지던 잠도 달아났다.
루이는 다시 속이 빈 통나무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호수에 가서 물을 담아 돌아왔다.
쿵-!
물이 담긴 나무통을 내려놓자, 노아가 단도 두 개를 꺼내 그걸로 뜨겁게 달군 돌덩어리를 집어 나무통 안에 넣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뜨거운 돌덩어리 여러 개가 나무통을 채운 물 안에 퐁당퐁당 떨어졌다. 루이가 물에 살짝 손을 담그더니 노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아가 물 담긴 나무통을 번쩍 들어서 수풀 안쪽으로 가지고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루이가 아리아나에게 다가왔다.
“제후비,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리아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만 휘둥그레 뜨고 루이를 올려다봤다.
“물을 따뜻하게 데웠으니 편하게 목욕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리아나가 손으로 제 입을 막고 눈을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지금까지…… 지금까지 내 목욕물을 준비한 거예요?”
“네.”
“아…….”
나무를 베어 속을 파내고, 물을 길어오고, 뜨거운 돌을 담가서 물을 데우는 그 번거로운 일들이, 전부 나를 위한 일이었다니.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이토록 번거로운 일들을 해준 적이 없기에, 아리아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게 얼어붙은 줄 알았던 심장에 아릿한 감정이 새겨졌다.
“씻기 귀찮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이러스의 나직한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모처럼 준비한 목욕물이니 가서 씻지 그러나? 훔쳐보지 않을 테니.”
진지한 목소리지만 장난스러운 말.
아리아나는 사이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내가 시킨 일이 아니니 감사를 받을 이유도 없지.”
그렇다면 루이와 노아가 스스로 해준 일인 걸까? 그럴 이유도 없는데 어째서?
의문을 내색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루이. 노아.”
아리아나의 감사 인사에 노아가 씩 웃었다. 보기 좋은 미소였다.
+++
서령에서 제국으로 넘어갈 때는 평범하게 이용하는 길이 아닌, 험준한 산길을 이용했다.
서령과 제국의 관계는 나쁘지 않기에 경계가 삼엄하지 않아서, 산길이 험하기는 해도 감시의 눈에 걸리지 않고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제국에서부터는 서제후의 눈이 미치지 않기에, 노숙을 하지 않고 작은 마을에 들렀다. 국경 변두리에 있어서 여관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마음 좋은 이장이 빈집을 빌려주었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진 지 오래 지난 후였기에,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자마자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혼자 방을 쓰게 된 아리아나는 왜인지 모르게 허전해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대가 없는 방이라서 바닥에 누운 채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노라니, 사이러스 일행과 함께한 여정이 떠올랐다.
불편한 잠자리, 필요할 때마다 사냥해서 소금 양념만으로 구운 식사, 루이와 노아가 마련해준 목욕물과 아이작이 하루에 하나씩 공급해주는 체력회복제.
그들 덕분에 이곳까지 안전하고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동안의 여정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내 인생에서 이토록 다정한 배려를 받아본 적이 있었을까?
제아무리 사이러스에게 아리아나를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다고 해도, 넘치도록 과한 배려였다.
‘데일 것 같아.’
만약 이용하기 편리하게 아리아나의 마음을 무뎌지게 만들려는 거라면 아주 좋은 방법을 사용했다. 헤어짐이 아쉬워, 계속 이대로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안 돼.’
아리아나는 은근히 피어오르는 소망을 차갑게 잘라냈다.
‘3황자를 생각해.’
3황자 헤럴드는 더없이 달콤했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다정하고 감미로웠다.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 어여삐 여기던 눈빛, 애정을 담은 말투.
그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었기에 처절히 배신당하고 끔찍하게 죽었다.
새로운 기회를 얻어 되살아났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네 삶을 기억해.’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아이. 누구도 원치 않았던 아이. 그리하여 애정 없이 이용해도 괜찮은 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없는 아이.
‘넌 그런 아이야, 아리아나.’
친부모조차 주지 않는 신뢰와 애정을, 타인이 줄 리 없다.
‘너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런 애였어.’
외조부도, 친모도, 언니와 동생도, 남편과 시부모도 모두.
‘나를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하려 했지. 부모조차 원치 않았던 아이는 그렇게 쓰다 버려도 괜찮으니까.’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라고 다를까.
아리아나는 언제나 살피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핏빛 눈동자에 담긴 계략과 의심을 가슴에 새겼다.
‘재미있는 여행 놀이를 하려고 한 게 아니잖아.’
일련의 사건들로 브론테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오점 하나 없이 살아오던 빅토리아와 레이첼의 이름에 검댕이 묻었다.
하지만 서제후의 혈통인 그들이 그 정도의 일로 무너질 리 없었다.
그들은 조만간 평판을 회복할 것이다.
‘빅토리아가 원하는 건 황후 자리겠지. 헬레나는 제국의 공작부인 정도로 만족할 거고. 서제후와 레이첼은 그 둘을 황후와 공작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1년 정도는 평판을 회복하고 그 이후부터 물밑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3년쯤 지나면 빅토리아는 아주 훌륭한 데뷔탕트를 치를 거고, 황후의 가호도 받겠지.’
전에는 그랬다.
빅토리아는 그 해 데뷔탕트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한 아가씨라고 칭송받았고, 황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3년. 그때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최대한 높이 올라가도록 해, 빅토리아, 헬레나.’
아리아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의 아픔도 큰 법이니까.’
+++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이 밝았다.
피곤해서 뻑뻑한 눈을 비비며 방을 나가니, 사이러스 일행은 이미 일어나서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부엌과 응접실을 겸하는 좁은 공간인데 얼마나 소리 없이 움직이는지, 아리아나는 그들이 일어난 줄도 몰랐었다.
아리아나를 발견한 노아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편히 주무셨어요?”
“네, 덕분에요.”
“이 마을 이장이 식재료를 나눠줬어요. 당분간은 고기구이 말고 다른 메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잘됐네요.”
아리아나는 노아에게 생긋 웃어준 후, 사이러스에게 다가갔다. 사이러스는 낡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른하게 부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앞에 서자 그가 흘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리아나는 단정한 자세로 서서 그에게 말했다.
“이곳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이 은혜는 언젠가 전하께서 필요하실 때에 갚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