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스며드는 온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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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스며드는 온기 (5)
2023.04.06.
아리아나의 만류에도 루이는 기어코 사이러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사이러스는 슬쩍 눈만 들어서 아리아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강해지고 싶다고?”
약간의 조롱이 담긴 질문에 아리아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비쩍 마른 육체를 가진 소녀가 강해지고 싶다고 하면 누구라도 비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동령에 가서 공주가 되면 그대를 지킬 기사들이 수십일 텐데.”
“글쎄요. 난데없이 나타난 공주를 진심으로 지키려 할 기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땅에서 기어 올라왔든, 하늘에서 뚝 떨어졌든, 자신들의 공주라면 당연히 지키려 하겠지.”
아리아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동령의 기사들이 날 지켜?’
그럴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하들은 제 군주의 마음까지도 따르는 법. 동제후가 아리아나를 곱게 여기지 않는데, 신하들이라고 곱게 여길까.
동령에 가서 어떻게든 동제후를 설득해 공주 자리에 앉는다 해도 안심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니까.
아리아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사이러스가 입을 열었다.
“좋아.”
“네?”
“가르침을 주겠다고.”
아리아나의 미심쩍은 표정을 보며 사이러스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가르쳐주겠다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내 실력이 남을 가르칠 수준은 되는지 의심되나?”
“제가 감히 전하의 수준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기사들은 본디 자신의 기술을 타인에게 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기에…….”
“우선 나는 기사가 아니라 제후야. 그리고 내 기술은 어차피 그대가 배우지 못해. 그대는 영리하니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북령 토박이뿐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네, 압니다.”
“그대가 가진 그 단도로 제 몸을 지킬 기술 정도는 몇 개 알려주도록 하지.”
아리아나는 그가 이토록 쉽게 호신술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장난기 서린 그의 눈빛에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남아 돌아서 그러는구나. 출발할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그렇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배움을 청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많아서 갚아야 할 빚이 태산인데, 거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한들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아리아나와 사이러스는 옆에 있는 루이가 흐뭇하게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
레이첼의 계획대로라면 브론테 공작가의 마차는 지금쯤 서령을 벗어나, 제국 땅을 밟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웨이펀 산맥 너머의 작은 도시에 발이 묶여 있었다.
며칠 전, 둘째 공녀의 마차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고 수색을 하러 나갔던 병사들은 마부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왔다.
-“둘째 공녀님과 하녀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수색 중이니 곧 만나 뵈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곧 아리아나의 시신을 발견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날에 들려온 소식은 레이첼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절벽 아래에서 산적들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상태가 엉망이라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둘째 공녀님께서 무사히 도망치셨을지도 모릅니다!”
병사들은 기뻐하며 보고했지만, 소식을 들은 레이첼과 제이콥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가 무사히 돌아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레이첼은 병사들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한편, 은밀하게 용병들을 고용해서 아리아나를 찾아내라고 했다.
조만간 소식이 들려올 줄 알았지만, 벌써 닷새째 아리아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리아나와 함께 있던 하녀조차도.
딸을 잃은 상황에서 편하게 제국 행을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마차를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이러다가 사교 시즌에 맞춰서 제국에 못 가는 거 아니에요?”
헬레나는 속도 모르고 칭얼거렸고, 빅토리아는 어두운 눈으로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제이콥은 어젯밤 “이게 당신이 생각한 좋은 방법이야?”라며 화를 내고 나가더니,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아무 문제 없던 행복하고 고귀한 브론테 가문이 부서지고 있었다.
+++
드디어 동굴을 벗어났을 때, 동굴 앞에는 두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한 사내와 검은 머리에 애교가 많게 생긴 회색 눈동자의 사내였다.
“제후비께 인사드립니다. 흑기사단의 부단장인 노아라고 합니다.”
검은 머리 사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리아나는 얼떨떨했지만 우아하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폈다.
“아리아나예요.”
“저는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아이작 페런.”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 아이작 페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기에, 신기한 기분으로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아이작 페런이 마치 여인처럼 예쁜 얼굴을 가졌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소문보다 훨씬 예뻤다. 귀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의 머리칼이 그와 잘 어울렸다.
노아가 말했다.
“이제부터 길이 아닌 곳으로 달릴 거라 마차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제후비께서는 말을 타실 줄 아십니까?”
“말이라면 탈 수 있지만…….”
아리아나는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다. 이쯤에서 헤어질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사이러스를 돌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는 길이니, 동행해도 좋겠지.”
아리아나는 원래 마차를 타고 제국까지는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저택에서 출발하는 날 아침, 아리아나만 다른 마차에 태울 때에야 레이첼의 꿍꿍이를 짐작했고, 살아남기에 급급해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레이첼의 사람들이 아리아나를 찾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동행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리아나는 사이러스를 마주 보며 말했다.
“이리 친절을 베풀어주시니, 쌓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평생 갚으면 된다고.”
아리아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노아와 아이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두 남자는 입을 떡 벌리고 사이러스를 쳐다보다가, 흐뭇하게 서 있는 루이를 발견했다.
루이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것 봐. 지금의 주군이라면 여인의 침상도 손수 준비해주실 것 같지 않아?’
사이러스가 옆에 있는 흑마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말했다.
“말을 탈 줄 안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나 탈 줄 알지?”
“방해는 되지 않을 거예요.”
아리아나는 3황자를 돕기 위해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만 했기에 자연스럽게 승마를 익혔다.
사이러스가 훌쩍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기대되는군. 힘들면 우는소리를 해도 좋아.”
“필요하다면 울겠습니다.”
아리아나가 말고삐를 잡자, 루이가 돕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필요 없는 행동이었다.
아리아나는 무척이나 우아하게,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말에 올라탔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전쟁의 신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아이작이 혀를 내둘렀다.
“평범한 소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기묘하단 말이야. 어떻게 저택에만 갇혀 있던 소녀가 저렇게 아는 게 많지? 행동거지도 보면 볼수록 묘하고.”
“소녀가 아니라 여인입니다, 아이작 님.”
루이가 아이작의 말을 고쳐주며 말을 탔고, 아이작과 노아도 제각각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사이러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나무와 수풀로 뒤덮여 길도 없는 산을 달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뒤를 잘 따라갔다.
‘엄청 빠르네.’
사이러스가 탄 말은 선두에서 달리면서도 나는 듯이 빨랐다.
이런 험한 길을 잘 달리려면 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말을 다루는 이의 능력도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승마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리아나를 보호하기 위해 뒤에서 달리던 아이작이 노아에게 말했다.
“전하가 천천히 달리시네.”
“제후비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서겠죠.”
“사랑이군.”
“네, 사랑이에요.”
입이 무거운 루이는 그저 흐뭇하게 앞서가는 남녀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
죽기 전까지는 말을 탈 일이 자주 있어서 익숙해졌지만, 이 육체로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단련되지 못한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팔이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사이러스의 뒤를 따라 달렸다.
개울 앞에 이르렀을 때, 사이러스가 말을 멈췄다.
“쉬었다가 가지.”
사이러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쉬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모르는 아리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에서 내렸다.
동굴에서 쉬는 동안 간신히 회복했던 육체가 다시금 욱신거렸다.
사이러스의 얼굴을 흘끔 살폈지만, 그는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느릿하게 산책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개운해 보였다.
‘부러워…….’
그의 강함이 부러웠다.
저만큼만 강하다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그때, 아이작이 다가와서 물었다.
“제후비, 힘드시죠?”
“괜찮아요.”
“제가 좋은 약이 몇 개 있거든요. 잠시만요.”
아이작은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약병 몇 개를 꺼냈다.
“일단 이건 상처에 바르면 흉터가 사라지는 약이고요, 이건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약이에요.”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괜찮아요.”
아리아나는 이 이상으로 사이러스에게 은혜를 입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이 억지로 약병을 아리아나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저는 전하랑 달라요.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어서 여인에게 베푸는 일을 일일이 빚으로 달아두지 않죠.”
“아이작 님.”
사이러스를 깎아내리는 말에, 루이가 엄하게 눈짓하자 아이작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물론 전하는 제후비에게만 하해와 같은 마음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아이작.”
사이러스의 경고에 아이작이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사이러스가 아이작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받아둬. 독을 넣진 않았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그럼 뭐가 문제지?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둬. 이 녀석은 멍청해서 이용하기 좋지.”
사이러스가 아이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멍청하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아이작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제후비. 그러니 약은 받아두세요. 이미 아물어버린 흉터에도 잘 들을 테니, 더 늦기 전에 발라두시고요.”
“네, 그런데…… 아이작, 나는 제후비가 아니에요.”
“네, 네. 알아요.”
알면서 왜 자꾸 제후비라고 부르는 걸까?
아리아나는 제후비라고 불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사이러스가 ‘쓸데없는 장난은 관둬!’라며 버럭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개울가에 앉아 잠시 쉬고 나서 다시 달렸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작은 호숫가에 도착해 야영을 하기로 했다.
루이와 노아가 오는 길에 사냥한 짐승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리아나는 아이작에게 받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약병 안에는 녹색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이쪽을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는, 약병을 열어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