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스며드는 온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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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스며드는 온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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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스며드는 온기 (4)
2023.04.05.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얼어붙은 채 두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짙은 잿빛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가며, 맺혀 있던 물방울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화눈을 장식한 긴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서 퇴폐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뺨에 묻은 물방울들이 야릇하게 빛났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정신없이 응시하는 아리아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침 떨어지겠어.”
아리아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상태로 눈만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그의 나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쏴아- 쏴아-
그가 물을 가르며 호숫가로 걸어 나오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는데,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사내의 몸을 본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자꾸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잘 만든 조각상 같은 그의 몸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리아나는 치마를 살며시 움켜쥐고 격하게 반응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가 호숫가의 땅을 밟을 무렵, 아리아나도 평정심을 되찾았다.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잘 잤나?”
사이러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하게 물었다.
아리아나는 입술을 오므렸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씻으러 왔나 보군.”
“잠이라도 깰까 싶어 산책하는 중이었습니다, 전하.”
“안 볼 테니 씻어. 나는 남이 목욕하는 걸 지켜보는 취미가 없거든.”
“……저도 없습니다, 전하.”
“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흘린 후, 잠자리가 있던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목욕하는 장면을 들킨 사람답지 않게 무척이나 당당해서, 헛것을 본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야영지로 돌아간 사이러스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아리아나가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보며 말했다.
“내가 있어서 신경 쓰이나?”
“아니요. 그저 이 물이 씻기에는 너무 차가워서.”
“아, 그대에게는 차갑겠군. 루이를 시켜 물을 데울 만한 통을 찾아오라고 하지.”
“친절은 감사하지만, 거둬주세요. 씻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앞으로 걸어가서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하게 섰다.
“전하. 그동안 베풀어주신 친절과 배려를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덕분에 편히 쉬어 체력이 회복되었으니, 이제 떠나려고 합니다.”
“비 와.”
“네?”
“폭우.”
아리아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이 시기에는 비가 많이 오는 편이기는 했다.
비를 좀 맞는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산속에서 만나는 폭우는 달랐다.
‘자꾸 미뤄지네.’
브론테 저택을 벗어나긴 했지만, 레이첼의 마수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테고, 아리아나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암살자를 몇 명 고용해서 아리아나를 찾는 척하며, 찾자마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서령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비가 오는 산길은 위험하지. 이틀쯤 더 내릴 것 같으니, 하루 더 쉬고 내일 출발하도록 해. 그러면 동굴을 벗어날 때쯤엔 비가 그칠 테니까.”
“네, 그게 좋겠네요.”
아리아나가 한숨을 삼키며 대답하고 있을 때, 루이는 노아, 아이작과의 접선을 위해 동굴 밖에 나와 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로 맑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루이는 중얼거렸다.
“날씨 참 좋네.”
+++
아이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일 출발한다고? 왜? 제후비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아?”
“주군께서는 제후비를 이용하기 위해 마음을 얻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전하는 아직도 그 소리야?”
“네. 제후비의 속도에 맞추면 3일 후에나 여기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겠구만. 생각보다 너무 늦어지는데. 헤른 공작님한테 혼나는 건 전하가 아니라 나라고.”
난처해하는 아이작에게, 노아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후비와 함께 가면 헤른 공작님도 화내지 않으실 걸요.”
“뭐, 그렇긴 하지만……. 제후비 상태는 어때? 편지에는 많이 다쳤다고 쓰여 있던데.”
“아이작 님의 연고를 발라서 좀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흉터가 남을 듯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건 전하나 너희처럼 강철 피부를 가진 괴물들 용으로 만든 거니까. 여인 피부에 흉터가 남으면 좋지 않을 텐데.”
아이작은 검지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다가 말했다.
“우리가 꼭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네.”
“그럼 저 도시 너머에 있는 마을에서 기다릴게. 흉터가 남지 않을 만한 약을 만들어야겠어.”
“네, 전하께서 기뻐하시겠습니다.”
“그 정도야?”
“네?”
“제후비한테 흉터가 안 남을 약을 만들어두겠다는 말로, 전하가 기뻐할 정도로 푹 빠졌냐고.”
“네. 사실은…….”
루이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아리아나와 함께인 사이러스의 태도는 너무 놀라워서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수는 없기에, 고르고 골라 가장 강력한 것 하나를 끄집어냈다.
“제후비께서 딱딱한 동굴 바닥에 누워 주무시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밖에 나가서 나뭇잎을 잔뜩 모아와 침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위에 주군의 망토를 깔았고요.”
“헉!”
“으억!”
아이작과 노아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두 사내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휘둥그레 뜬 상태로 잠시 멈춰 있었다. 이윽고 노아가 말했다.
“루이, 안 본 새에 거짓말이 늘었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지. 주군께서 아무리 여인에게 푹 빠졌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하실 리가 없잖아. 안 그래요, 아이작 님?”
“응. 확실히 그래. 여인의 침상을 준비해주는 전하라고?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었어, 루이.”
아이작이 루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루이는 진짜라고 항변할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이들도 곧 그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리라.
+++
아리아나는 타인과 한 공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는 건 처음이었다.
아리아나 브론테일 때도, 아리아나 알프레히일 때도, 아침부터 밤까지 삼시세끼를 함께 나누며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였다. 혹여 그에게 흠이라도 잡힐까 싶어서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느라 몹시 고단했다.
꼿꼿이 앉아서 그를 살피는 아리아나와 달리, 그는 얄미울 만큼 편안하고 느긋했다.
루이가 잡아 온 물고기와 들짐승을 재료로 호화로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검을 닦았다. 루이가 식기를 정리하는 걸 아리아나도 도우려 했지만, 루이가 만류했다.
“제후비께서는 이런 일을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제후비가 아니고 이런 일에는 익숙해요.”
“그럼 서툴러지셔야 합니다.”
루이가 식기로 향하는 아리아나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진지하게 아리아나를 응시했다.
“귀한 손을 이런 일에 사용하셔서는 안 됩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심장이 울렸다.
지금까지 누구도 아리나아의 손을 이토록 아껴준 적이 없었다.
입으로는 다정하게 말하던 3황자조차도 온갖 궂은일을 시켰었다. 그래서 아리아나는 그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 하는 일로 여기고 살아왔다.
루이의 배려에 고마웠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동령에 가면 동제후가 아리아나를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 모를 일이다. 서령에 있을 때처럼 하녀들이 하는 일이나 할 생각은 없지만, 공주처럼 게으르게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내 손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예요, 루이.”
아리아나가 고집을 부리자 루이도 더는 막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식기를 닦기 위해 호숫가로 향했다.
호숫가에 나란히 앉아서 식기를 닦았다. 물이 차가워서 손이 시렸지만, 아리아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한겨울에 찬물로 설거지를 하다가 손이 부르터서 피가 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북제후께서는 원래 이렇게 자주 여행을 하시나요?”
질문을 받은 루이는 흘긋 아리아나를 돌아봤다.
‘주군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건가?’
그동안 루이의 눈에는 사이러스와 아리아나의 관계가 사이러스의 일방적인 구애로만 보였다. 아리아나의 차디찬 태도는 명백히 사이러스를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러스에 관한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호감의 시작은 상대를 향한 궁금증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루이는 입이 무거웠지만, 미래 제후비의 질문에 기쁘게 대답했다.
“종종 하십니다.”
“북제후께서 북령을 오래 비우시면 다들 불안해하지 않으시나요?”
“주군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일을 처리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전하께서 많이 신뢰하는 분인가 보네요.”
“네.”
“은신은…… 마법인가요?”
아리아나는 루이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사는 자신이 가진 기술에 관해 타인에게 알려주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기술입니다. 훈련을 통해 사용할 수 있지만, 그 훈련법을 아는 이가 많지 않죠.”
“그럼 전하께서 얼음을 사용하시던 건…….”
“마법입니다.”
“루이도 사용할 수 있나요?”
“조금은요.”
루이는 흘끔 뒤를 돌아서 사이러스가 뭘 하는지 확인한 후, 아리아나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렸다.
루이의 손바닥 위에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생겨났다. 마치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아리아나는 놀라운 눈으로 지켜봤다.
“아름답네요.”
“주군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렬합니다.”
“부럽네요. 루이는 여자인데도 강하고 마법까지 쓸 줄 알잖아요.”
“선대 제후비께서는 저보다 더 강하셨습니다.”
“나도 강해질 수 있을까요?”
아리아나의 질문에 루이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에게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다. 선대 제후비가 강했었다는 말에, 자신도 강해지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제후비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강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루이는 사이러스를 위해 기회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주군은 훌륭한 교관이기도 하십니다. 주군께 배우신다면 제후비께서도 강해지실 겁니다.”
루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아리아나는 사이러스를 돌아봤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는 이쪽에 관심을 주지 않은 채 계속 검을 닦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일련의 사건들로 제 육체가 한심할 정도로 약하고, 이렇게 약한 육체로는 계속 위험에 빠지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매번 다음 수를 생각해두기는 하지만, 제 몸을 지킬 기술이 있다면 지금까지보다는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청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무예를 타인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누가 언제 제 등에 칼을 찌를지 모르니,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만 기술을 나눴다.
‘북제후가 날 가르치려 하진 않을 텐데.’
아리아나의 생각을 읽은 듯, 루이가 말했다.
“주군께는 제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