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스며드는 온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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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스며드는 온기 (2)
2023.04.03.
사이러스가 피식 웃으며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작은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여행의 필수품이지.”
“아까는 못 봤는데.”
“망토 안에 매고 다니거든. 루이의 옷 안에 뭐가 감춰져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다.”
“그러고 보니, 루이는?”
“버섯을 캐고 있어. 이 동굴에 약재로 쓰이는 귀한 버섯이 자라고 있더군. 궁금한 게 많은 건 이해하지만, 일단 먹지 그래? 그대의 위장이 쉴 틈 없이 비명을 지르는데.”
아리아나는 얼굴을 붉히고 고기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춘 고기는 짭조름하고 고소했다. 부드러운 고기를 오물오물 씹어 삼킨 후 물었다.
“고기는 어디서 난 건가요?”
“아까 신선한 고기들이 널려 있었잖아.”
“아까……? 아!”
아리아나는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사이러스가 담담히 말했다.
“농담이야.”
“……전하께서는. 참으로. 짓궂으시네요.”
“화났나?”
“아니요.”
“화난 것 같은데?”
“이리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어찌 감히 전하께 화를 내겠어요?”
“한 대 후려치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지만, 받은 게 있으니 참아주겠다는 의미인가?”
아리아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봤다.
사이러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고기는 그대가 자는 동안 동굴 밖에서 잡아 온 거니 안심해.”
“전하께서 잡으신 건가요?”
“그래.”
“부럽네요.”
“무엇이?”
“강하신 점이요.”
“작은 토끼 한 마리 잡는 데는 그리 큰 힘이 필요하지 않지.”
“저는 그 작은 토끼 한 마리도 스스로 잡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날 움직여서 토끼를 잡게 만들지 않나? 내게 끼니를 위해 사냥을 하게 시킨 여인은 그대가 처음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네,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아리아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말을 하지 않자 또옥, 또옥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은은하게 퍼지는 푸른빛에 감싸인 호수의 정경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게 아름다웠다.
예전에는 도망치는 데 급급해서 이 정경을 제대로 눈에 담지도 못했었다.
“발은 좀 어떤가?”
“발이요? 아…….”
그러고 보니 발에 느껴지던 통증이 많이 가셨다.
“아까는 정말 아팠는데 이제는 별로 안 아파요.”
“좋은 연고를 사용했지. 훌륭한 연금술사를 알고 있거든.”
“연고…….”
아리아나는 꼬물꼬물 움직여서 제 발을 확인했다.
맨발로 숲속을 달려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었을 줄 알았는데, 깨끗이 닦여 있는 데다가 연고까지 발라둬서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작은 발을 살펴보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누가……?”
“내가.”
“예?”
“농담이야.”
“전하…….”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의 발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지. 루이가 한 거니 안심해.”
“네. 참으로. 안심이. 되네요.”
“또 화났나?”
“아니요!”
사이러스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나는 어째서 사이러스를 앞에 두면 감정을 자제하기 힘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고기를 마저 먹었다.
“부족한가?”
“충분합니다.”
“그대는 너무 적게 먹어. 그래서는 평생 작을 거야.”
“잘 먹어서 전하만큼 강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먹을게요.”
“나만큼 강해지는 건 힘들지. 이 대륙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거든.”
“참으로 부럽습니다.”
“방금 그건 진심이 아니군. 비아냥인가?”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전하를 앞에 두고 비아냥거리겠어요?”
“오, 또 비아냥거리는군.”
아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이러스를 쏘아봤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들어온 소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 인물이 정말 북제후가 맞는 걸까? 사실은 다른 인물인데, 비슷한 외모 때문에 착각한 거 아닐까?
아리아나는 사이러스를 초상화로만 알고 있었다. 초상화와 닮게 꾸미는 건 극단 배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실제로 얼음 마법을 사용했어.’
북령의 선택받은 몇몇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게다가 은신도 완벽하고. 북제후가 맞긴 맞겠……지?’
사이러스가 호수에 시선을 던진 채로 말했다.
“내가 북제후가 맞는지 의심스러운가?”
“전하께서는 남의 마음을 읽으십니까?”
“그런 기술이 있다면 좋겠군. 그러면 그대가 무얼 꾸미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저는 그저 편안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사이러스가 고개를 돌려 아리아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대의 눈빛은 항상 처절하게 빛나고 있거든. 난 그런 눈빛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지.”
“누가 저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나요?”
사이러스가 검지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전하께서요? 제가 보기에는 무척 여유로워 보이시는데요.”
“연습과 노력이지. 그대도 연습하도록 해. 형형하게 타오르는 눈빛은 아름답지만, 상대를 경계하게 만드니까.”
“귀한 조언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어찌할 거지? 제국에 갈 건가?”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에게 계획을 말해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곧 마음을 정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숨길 필요는 없었다. 영리한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뭘 하려는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서 그의 환심을 사두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인제 와서 제국에 들르는 것은 무의미하겠지요. 동령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래.”
“다만 동제후가 순순히 절 받아들일지 모르겠네요. 며칠은 묵게 해주겠지만, 그동안 그에게 제 쓸모를 증명해야겠죠.”
“동제후는 그대를 기쁘게 받아들일 테니 걱정할 거 없어.”
“글쎄요. 체이스 성 안에 방 한 칸이라도 내어주면 감사한 일이지요.”
“날 믿어봐. 동제후는 그대를 내치지 않아.”
“저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전하.”
사이러스가 아리아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말했다.
“그래, 좋은 자세야. 그렇다면 그대 자신을 믿어봐. 그대처럼 영리한 아이를 누가 싫어할까?”
아리아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한 번 죽기 전에도 영리하게 행동했다면 모두가 날 사랑해줬을까?
‘그렇지 않겠지.’
영리하게 굴어봐야 죽을 날만 빨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아리아나가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하니, 레이첼은 아리아나를 죽이려고 했다.
동제후도 마찬가지이리라.
적당히 영리하고 적당히 멍청하게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16살짜리답게, 그러나 학대받고 눈치를 많이 봐서 조금 빨리 조숙해진 가련한 아이답게. 동령에서의 지위를 확보할 때까지는 그리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이러스는 도리어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하기 편했다.
그는 아리아나가 이상할 정도로 성숙하게 행동해도 딱히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아니라, 내 모든 면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거겠지. 그래서 내 앞에서는 저렇게 덜떨어진 남자처럼 행동하는 걸 테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버섯을 채취하러 갔던 루이가 돌아왔다.
루이는 커다란 물고기를 한 마리 손에 쥐고 있었다.
“호수에서 잡았습니다. 제후비께서는 굽거나 끓이는 것 중 무엇이 좋으십니까?”
아리아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로잘…… 루이. 나는 제후비가 아니에요.”
“네, 제후비. 어떤 걸 원하십니까?”
“제후비가 아니라니까요.”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루이의 말실수를 고쳐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들이지?’
아리아나는 기가 막혔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리아나라고 불러요, 루이.”
“네, 제후비. 구운 고기를 드셨으니, 이번에는 수프가 낫겠죠?”
“루이.”
루이는 대답하지 않고 구석으로 가서 물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리아나는 모포를 두른 채로 꼬물꼬물 움직여 사이러스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루이가 절 왜 제후비라고 부르는 거예요?”
“모르지.”
“전 제후비가 아니에요.”
“알아.”
“못 하게 하세요.”
“내게 명령하는 건가?”
“전하, 부디 루이가 저를 제후비라고 부르지 못하게 꾸짖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제후비라는 호칭은 너무 무겁습니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미안하지만, 내 부하들이 타인을 부르는 호칭까지 신경 쓰는 옹졸한 주군이 되고 싶지는 않군.”
“전하의 위대한 이름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하들이 누구를 무어라 부르든, 그 때문에 내 이름이 더럽혀질 리는 없으니 걱정을 거두시게.”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지독히 잘생긴 옆얼굴을 노려봤다. 하지만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두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사이러스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루이가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거죠?”
“누구라도 장난을 칠 자유는 있지 않나?”
“절 두고 장난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루이를 꾸짖도록 해.”
아리아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루이를 꾸짖다니.
그런 건 못 한다.
루이는 아리아나를 도왔고, 아리아나를 지키다가 화살에 찔렸으며, 그럼에도 아리아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이번 삶을 살아가며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꾸준히 도와준 사람을 냉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동안, 루이가 생선 수프를 완성했다. 루이는 둥근 그릇에 수프를 가득 담아 아리아나 앞으로 가져왔다.
“드십시오, 제후비.”
“루이, 아리아나라고 불러요.”
“입맛에 맞으면 좋겠습니다.”
아리아나는 한숨을 삼키고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릇에서 전해지는 따끈따끈한 열기 덕분에 차갑게 식어 있던 손이 따뜻해졌다.
루이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고 간이 딱 맞았다. 끓이기 전에 비늘과 가시를 완전히 제거해서 먹기도 편했다.
루이와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수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수프를 반쯤 먹고 나서야, 아리아나는 그들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분은 안 드시나요?”
“우리는 고기를 많이 먹었거든. 그대나 많이 들어.”
아리아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들을 잠시 살펴보다가 다시 수프를 먹는 데 열중했다.
루이가 사이러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후비께서 드시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그래.”
“제후비께서 생선을 좋아하시는 듯하니, 앞으로 끼니는 생선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주군께서는 아무것도 안 드셔도 됩니까?”
“저 애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며?”
“네, 저야 그렇지만…….”
사이러스는 손등에 턱을 괴고 조용히 아리아나를 지켜봤다.
아리아나는 흘러내리는 하늘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뜨거운 수프를 호호 불어 열심히도 먹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 저렇게 먹다 보면 살이 붙을까?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생선살을 오물오물 씹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나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