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스며드는 온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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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스며드는 온기 (1)
2023.04.02.
아리아나는 굳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봤다.
‘주군? 누가? 북제후가? 로잘린의? 왜……?’
사이러스는 피투성이가 된 로잘린을 앞에 두고도 냉랭했다.
“고작 32명. 약해졌군. 하녀 노릇을 하다 보니 실력이 줄었나?”
“주의를 게을리 했습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아리아나를 지키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을 뿐인데, 로잘린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벌을 내릴 것 같아서, 아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로잘린의 앞을 막아섰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뭘 하는 거지?”
“로잘린은 절 지키다가 다친 거예요.”
“고작 한 명을 지키면서 이 지경으로 다친다면 흑기사단의 단장 노릇을 할 수 없지.”
흑기사단이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로잘린이…… 흑기사단의 단장이라고요?”
“그래. 아, 그리고 이름은 루이라고 하지.”
“루이…….”
그제야 아리아나는 하녀를 칭찬하는데 사이러스의 기분이 좋아 보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게 로잘린, 아니, 루이를 붙여놓으셨군요.”
“…….”
“절 도와주신 건가요?”
“그렇다면?”
아리아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하녀. 순박해 보이지만 영리하고, 돈 욕심이 많은 것 같은데 아리아나의 재물을 탐하지 않았던 하녀. 이상할 정도로 아리아나의 수족처럼 움직여준 하녀.
역시 이유 없이 아리아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북제후는 아리아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그 때문에 그가 보낸 ‘하녀’가 아리아나의 수족처럼 움직여준 것이다.
상황 판단이 끝나자 흔들리던 눈동자가 견고하게 얼어붙고 허물어졌던 심장이 단단해졌다.
아리아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제게는 혼자서 실행하고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계획이 있었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이 여인을 보내주신 덕에 일이 쉬워진 것도 사실이니, 후에 전하께서 제 도움을 청하신다면 반드시 돕도록 하겠습니다.”
“훗날의 약속을 어찌 믿지?”
“지금 제게는 전하를 도울 힘이 전혀 없어요. 전하께서도 지금의 절 이용할 생각은 없으시겠죠.”
“영리하군.”
“전하께서는 이리도 신출귀몰하시니, 제가 어디에 있건 그 빚을 받으러 오실 수 있겠지요. 도와주신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아리아나의 앞을 사이러스가 막아섰다. 아리아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해가 지고 있다. 그대에게는 늘 계획이 있겠지만, 산짐승들에게는 그대의 계획이 통하지 않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아리아나 역시 해가 떨어진 후, 이 숲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이 하늘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였다. 산의 밤은 빠르게 찾아오기에, 이제 곧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워질 것이다.
아리아나는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북제후와는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지만, 그런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보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이건 빚으로 달아두지 않도록 하지.”
+++
아리아나는 말했다.
“공작부인은 산맥 너머의 도시에 도착하는 대로 경비병들에게 제 소식을 알릴 거예요. 아마 제가 멋대로 마차를 세우는 바람에 쫓아오지 않는 줄 몰랐다고 하겠죠. 곧 경비병들이 이쪽으로 올 거예요.”
“그렇군.”
“저 절벽 아래에 있는 턱에서 조금 가다 보면 동굴이 하나 있어요. 그 동굴은 산맥 너머까지 연결되어 있어요.”
“그대는 공작저에 갇혀만 있었으면서 나보다도 지리를 잘 아는군.”
“늘 도망칠 계획만 세워왔으니까요.”
아리아나가 예상한 대로 사이러스는 더 깊이 캐묻지 않았다.
사이러스가 눈짓을 하자 루이가 움직였다.
루이는 용병들의 시신을 절벽 너머로 떨어뜨린 후, 짐에서 밧줄을 꺼내 손에 감았다.
“주군께서 먼저 내려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사이러스가 루이에게서 밧줄을 가져갔다.
“네가 아리아나를 안고 내려가라.”
“네.”
아리아나도 사이러스에 안기느니 루이에게 안기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루이가 입은 상처가 걱정되었다.
“저는 그냥 뛰어내리면 돼요.”
아리아나의 말에 사이러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대는 죽을 생각밖에 없나?”
“안 죽어요. 잘 뛰어내릴 수 있어요.”
“고집부리지 마.”
사이러스가 고갯짓을 하자, 루이가 아리아나의 허리를 감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제후비.”
“제, 제후비라니…….”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당황하는 틈에, 루이가 아리아나를 단단히 잡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손으로는 밧줄을 잡은 채였다.
전에 아리아나가 혼자서 떨어졌을 때와 달리, 두 사람은 안전하게 절벽 중간에 착지했다.
“주군, 저희는 도착했습니다.”
늘어져 있던 밧줄이 절벽 위로 끌려올라갔고 그다음에 사이러스가 혼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하는 그의 모습에 아리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게 저렇게 쉬운 일이라니. 나는 죽을 각오를 했는데.’
아리아나의 기억대로 절벽 중간 턱에는 동굴이 있었다. 입구가 작아서 발견하기 힘들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동굴이었다.
사이러스는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휘파람을 불었다. 눈처럼 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사이러스의 어깨에 앉았다.
사이러스는 독수리의 발목에 쪽지를 매단 후 다시 날려 보낸 다음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아나와 사이러스가 나란히 걷고, 루이가 뒤에서 따라왔다.
아리아나는 어둡고 축축한 동굴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걸어갔다.
동굴 안의 호수까지는 길이 하나뿐이라서 굳이 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이곳을 통해서 산맥 너머로 도망칠 계획이었나?”
동굴 안이라서 사이러스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네.”
“이렇게 어두운데 겁도 없군.”
“어둠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 그래. 그대는 어둠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지. 그럼 뭐가 두렵지?”
“지금 당장은 전하가 제일 두렵습니다.”
“충격이군. 나는 지금껏 그대를 도왔는데.”
“제게 잔뜩 빚을 지우셨지요. 앞으로 제게 뭘 바라실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여옵니다.”
레이첼의 마수에서 일단은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앞으로 동령까지 가는 동안에도 여러 위험이 뒤따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 심장이 반응하다니. 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군.”
“달의 신이 강림한 듯 아름다우신 전하를 앞에 두고, 제가 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참으로 거짓말을 잘해. 그나저나 발은 괜찮은가?”
그가 지적한 후에야 통증을 깨달았다.
도망치는 동안 너무 많이 다쳐서 여기저기가 아프고 쑤셨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잠이 쏟아졌다.
“괜찮습니다.”
“안 해도 될 거짓말도 잘하는군.”
다음 순간, 아리아나의 몸이 붕 떠올랐다. 사이러스가 아리아나를 안아 든 것이다.
아리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남자는 왜 매번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걸까?
“전하. 전하의 팔은 적을 섬멸하는 데 사용하는 귀한 팔이지 않습니까?”
“나 따위에게 안기고 싶지 않으니,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놓으라는 뜻인가?”
“제게 귀한 힘을 낭비하지 마세요.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사내의 시신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대가 몸 둘 바를 모를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궁금한데.”
“전하께서는 북령의 평화를 위해 생각하실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쓸 데 없는 궁금증 품지 말고 당장 내려놓으라는 뜻인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루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에게 익히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랫동안 사이러스를 곁에서 모셔온 루이는 사이러스가 여인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 처음 보았다.
‘주군께서는 연모하는 여인을 앞에 두면 약간 모자라지시는군.’
루이는 영리했기에, 노아처럼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두 사람의 뒤를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재잘재잘 들려오던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지고 작아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멈췄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사이러스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루이, 앞쪽을 확인해.”
“네.”
루이는 재빨리 길을 이동해 앞쪽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호수가 펼쳐진 넓은 공간이 나왔다.
루이는 근처에 위험한 것이 없는지 확인한 후, 사이러스에게 돌아왔다.
“호수가 있습니다. 안전합니다.”
“그래.”
“제후비께서는 어제 오늘 끼니를 거르셨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먹이는 게 좋겠지. 피곤하면 입맛도 없을 테니.”
“먼저 가서 준비할까요?”
“그래.”
루이가 떠난 후, 사이러스는 제 품에서 잠든 아리아나를 내려다봤다.
사람은 잠이 들면 편안한 표정을 짓기 마련인데, 아리아나는 그렇지 않았다. 잠이 들었는데도 어깨는 뻣뻣했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마치 지옥불 안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울 때도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저번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게 좋은 걸 넘겨주었으니.’
아리아나 덕분에 과거의 사건과 관련된 편지를 손에 넣었다.
‘그 보상으로 그대를 웃게 해주지.’
아무래도 아이작과 수하들은 사이러스의 감정을 오해하는 듯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에게서 이용 가치를 발견했기에, 아리아나가 잘 여물 때까지 지켜볼 요량이었다. 아리아나는 협박을 하거나 목줄을 움켜쥔다고 해서 가진 것을 내놓을 여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심스럽고 귀하게 대해줘야지. 아리아나를 이용할 날이 올 때까지.
+++
아리아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맡은 것은 고소한 냄새였다. 맛있는 냄새가 나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꼬르륵-
“배가 고픈가 보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제 몸에 도톰한 모포가 둘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눅눅한 공기와 물 냄새를 맡고 나서야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분명 사이러스의 품에 안겨서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설마 그대로 잠든 거야?’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무방비하게 잠들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홧홧했다.
“여긴 동굴 호수인가요?”
“그래.”
“제가 얼마나 잤나요?”
“나흘쯤?”
“그렇게나요?”
“농담이야.”
아리아나가 사이러스를 지그시 노려봤다.
호수 동굴은 곳곳에서 빛을 뿜어내는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버섯이 내는 푸른빛에 그의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도 마치 하늘처럼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사이러스가 접시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세 시간쯤 잤어. 독을 넣진 않았으니 안심하고 먹어도 좋아.”
“감사합니다.”
접시 위에는 잘 구운 고기가 몇 조각 놓여 있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고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리아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접시는 어디서 구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