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덫을 피하는 방법 (3) (30/238)


(30) 덫을 피하는 방법 (3)
2023.04.01.


용병들이 뒤쫓아 왔다.

로잘린은 빨랐지만, 아리아나는 그렇지 못했다. 로잘린은 아리아나가 자신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눈치 채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리아나는 구두까지 벗어던지고 맨발로 달리고 있었지만,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은 데다가 몸까지 약해서, 길도 없는 숲을 빠르게 달리기는 무리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용병들이 아리아나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로잘린은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용병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채앵-!

아리아나의 어깨를 향해 떨어지던 용병의 검을, 로잘린의 검이 막아서 옆으로 걷어냈다.

부딪친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계집 주제에!”

검이 막힌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로잘린은 무표정하게 왼손을 움직였다.

숨기고 있던 암기가 쏘아져나가 사내의 배를 뚫었다.

“컥!”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사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배를 움켜쥐었다. 로잘린은 옆에서 공격해오는 검을 능숙하게 피하고, 상체를 뒤로 틀어 뒤에서 공격하는 놈의 목을 베었다.

사악-

큰 힘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도 상대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터져나왔다.

로잘린은 가까이에 있는 놈의 복부를 발로 차서 밀어낸 후, 아리아나의 팔뚝을 잡았다.

“달리세요.”

“응!”

아리아나는 달렸다.

숲의 눅눅한 공기가 볼을 스쳤다. 약한 폐가 비명을 질러대고, 돌과 나뭇가지에 찔린 두 발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쌔액-!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을.

채앵-!

로잘린이 검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날아온 두 번째 화살은 막지 못했다.

푹-!

화살이 로잘린의 허벅지에 박혔다. 로잘린의 다리가 꺾였다.

“로잘린!”

“가세요, 아가씨. 전 신경 쓰지 말고 아가씨가 가야 할 곳으로 가세요.”

아리아나를 응시하는 로잘린의 보라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리아나는 떨리는 눈으로 로잘린을 바라봤다.

차마 두고 떠나지 못하는 아리아나에게 로잘린이 다시 한번 말했다.

“아가씨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습니까.”

그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아리아나는 이를 악물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미안해, 로잘린.”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단단히 쥐고 용병들을 노려봤을 뿐.

아리아나는 로잘린을 두고 달렸다.

약해빠진 제 육체가 한심스러웠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조금만 더 튼튼했다면.’

부질없는 후회를 하며 계속해서 달렸다.

챙- 채앵-!

“으하악!”

“헉!”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곧 그곳에 도착한다.

“저년을 잡아!”

누군가가 외쳤다.

“저걸 죽여야 해!”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나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발길을 서둘렀다. 무겁고 아픈 다리를 움직여 계속해서 달렸다.

폐가 타들어가는 듯 아팠다.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스치는 나뭇가지와 억센 풀 때문에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겼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무렵, 아리아나는 멈췄다.

눈앞에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크하하하하. 뭐야, 어디로 도망치나 했더니 저 죽을 곳을 찾아간 거였어?”

뒤따라오던 사내들이 아리아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리아나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아리아나를 쫓아온 사내들은 고작 3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로잘린을 상대하고 있으리라.

‘로잘린, 괜찮을까?’

로잘린이 걱정되었지만, 아리아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힘도, 권력도 없다는 것이 바로 이랬다. 돕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도울 수가 없다.

등 뒤의 낭떠러지는 도박이었다.

아리아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리아나가 상대해야 했던 건 진짜 산적이었다.

도망치던 아리아나는 이 낭떠러지에 도달했고, 산적들에게 잡혀 더럽혀지느니 죽음을 택했다.

천 길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바로 아래에 좁은 턱이 있었다. 아리아나는 운 좋게 그곳에 떨어졌고, 많이 다치기는 했지만 살아남았다.

그곳에 있는 동굴 안에는 호수가 하나 있는데, 호수 안쪽 길로 걸어가다가 보면 산 반대쪽에 도착하게 된다.

‘잘만 떨어지면 저들을 속이고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거야. 저들은 레이첼에게 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보고할 거고, 나는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절벽 아래의 턱은 아주 좁기 때문에 잘 맞춰서 떨어져야만 했다.

그렇다고 너무 조심해서 떨어지면 저들이 의심할 테니, 목숨을 끊으려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이봐, 아가씨. 죽으려면 빨리 죽어. 아니면 우리 손에 죽든가.”

“그나저나 아가씨도 참 어린데 안됐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그런데 아가씨, 예쁘게 생겼네?”

한 사내가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제 동료들을 돌아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저거 팔아치우면 돈 좀 될 것 같은데…….”

“반드시 죽이라고 했어.”

“죽였다고 하면 되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시신 따위 알 게 뭐야?”

“하긴. 시신을 갖고 오라는 말도 없었고.”

아리아나는 놈들이 그녀를 팔아치울 계획을 세우는 동안, 조용하게 뒷걸음질을 쳐서 절벽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 절벽 아래에 있는 턱을 확인했다.

‘정말 좁구나.’

그때는 운이 좋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운이 좋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괜찮아. 어차피 덤으로 얻은 삶이니,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어.’

아리아나가 뒤를 확인하며 조용히 절벽에서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서걱-

뭔가를 베는 소리가 들려서, 아리아나는 다시 정면을 돌아봤다.

가운데 서 있던 남자의 목이 사라지고 없었다. 양옆의 두 남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도 오랫동안 목에 붙어 있지는 못했다.

스릉-

은빛 반짝임.

툭- 투둑-

떨어지는 두 개의 머리.

털썩-

쓰러지는 몸뚱이들.

그리고 그 뒤에 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검은 인영.

그는 검은색 후드 망토를 입고 있었다. 깊이 눌러쓴 후드 때문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는 꼿꼿이 선 채, 언제든 절벽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며 그를 노려봤다.

그가 검을 툭툭 흔들어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후드를 벗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그의 은빛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났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그의 모습에, 두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꼿꼿하고 우아하게 서서 그를 마주 봤다.

“내가 너무 늦었나?”

세 사람을 순식간에 죽인 사람답지 않게 나른한 음성. 그의 표정도, 말투도 마치 자다 깬 사람처럼 여상했다.

“약속한 적도 없습니다, 전하.”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가 피로 물든 땅을 지나 아리아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마치 지상에 강림한 신처럼 보였다.

“자결이라도 할 셈이었나?”

아리아나의 옆에 선 그는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본 후 피식 웃었다.

“다음 수를 생각해두었군. 언제나 그렇듯이.”

“네, 전하. 언제나 그렇듯이요.”

“하지만 잘못 떨어지면 죽을 텐데.”

“죽는다면 그뿐. 제 운이 거기까지인 거겠지요.”

“그대는 정말 겁이 없어.”

사이러스는 신기한 듯 아리아나의 얼굴을 살피다가 그녀의 뺨에 살며시 손가락을 가져갔다.

나뭇가지에 베여 다친 곳에 손이 닿아 쓰라렸지만, 아리아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를 향해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아프겠군.”

“별 거 아닙니다.”

“사내의 얼굴에 흉터는 훈장이지만, 여인에게는 그렇지 않지.”

“제 훈장을 남이 알아줄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만 자부심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손길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느라, 뒤에 절벽이 있다는 걸 잊었다.

발이 허공을 밟아 기우뚱 떨어지려는데, 단단한 팔이 아리아나의 잘록한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그는 아리아나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절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조심성이 없군.”

“감사합니다.”

“떨어질 뻔했는데 놀란 기색도 없고. 그대는 인간이 맞나?”

“전하야말로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여인들이 전하를 달의 신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리 보이시는군요.”

“그런 말은 눈에서 힘 좀 풀고 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대의 눈빛 때문에 타버릴 것 같거든.”

그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여전히 아리아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맞붙은 몸이 신경 쓰였다. 옷깃 너머에서 전해지는 냉기에 몸이 떨렸다.

“놓아주세요, 전하.”

“아, 실례.”

그에게서 풀려난 아리아나는 숲이 너무 조용한 게 신경 쓰였다.

로잘린은 어떻게 됐을까? 살아있기는 할까?

아리아나가 로잘린을 두고 온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사이러스가 그 앞을 막아섰다.

“하녀를 찾으러 가나?”

“…….”

“가슴에 독을 품은 것 치고는 정이 많군.”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죠. 그 하녀는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잘린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 왜인지 사이러스가 기분 좋아 보였다.

아리아나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도 언젠가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볼일이 끝났으니 꺼지라는 뜻인가?”

“…….”

“일개 하녀의 생사까지 신경 써서는 그대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할 거다.”

“짐승이 되기로 했다고 해서 관계없는 이들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지는 않아요.”

“얼굴만큼이나 무딘 생각을 갖고 있군. 그대는 결코 짐승이 되지 못할 거야.”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로잘린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상황을 봐서 도울 만한 것이 있다면 돕고 싶었다. 적어도 그녀가 도망칠 틈은 만들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쪽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사이러스가 자꾸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북제후만 아니었다면,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을 것이다.

“전하, 부디…….”

비켜달라는 말을 하려는데, 사이러스 뒤의 수풀이 바스락거렸다.

로잘린을 상대하던 놈들이 오는 게 아닐까?

아리아나가 긴장하는 것과는 달리 사이러스는 느긋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까치발을 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오.”

사이러스는 작게 감탄사만 흘렸을 뿐,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리아나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야 할지, 아니면 다시 낭떠러지에 가서 뛰어내릴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수풀에서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로잘린!”

아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로잘린을 향해 달려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로잘린의 생존에 잠시 마음을 풀었다.

로잘린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가씨. 무사하셨습니까?”

“그래, 너는…… 많이 다친 것 같구나.”

“제 피가 아닙니다.”

로잘린은 아리아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절뚝거리며 사이러스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군을 뵙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