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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덫을 피하는 방법 (2) (29/238)


(29) 덫을 피하는 방법 (2)
2023.03.31.


아리아나가 예상한 대로 마차는 저녁에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브론테 공작가문의 마차가 성문을 들어서자, 사람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직 이곳까지는 브론테 가문의 소식이 퍼지지 않은 듯, 성주인 고디언 백작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고디언 백작의 배려로 그의 저택에서 머물 수 있었다.

고용인들은 필요한 짐을 풀고 마부들은 지친 말을 쉴 수 있게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모두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아리아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브론테 공작 부부가 자신들의 두 딸만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아리아나 혼자 남겨졌다.

“아가씨도 안으로 드셔야지요.”

로잘린이 작게 속삭이는 말에 아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이곳에 있는 게 편할 것 같아.”

아리아나가 저택에 들어간다면 공작 부부는 보는 눈이 있으니 아리아나를 챙겨주는 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리아나도 이런 날까지 그들 사이에 앉아서 여리고 순진한 딸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택 밖에 나가서 도시를 구경하고 싶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아리아나는 백작저 정원의 돌 벤치에 앉았다.

“너도 가서 쉬렴.”

“저도 아가씨와 함께 있을게요.”

“불편할 텐데. 춥기도 하고.”

“아. 잠시만요.”

잠깐 사라졌던 로잘린이 모포를 가지고 돌아왔다.

로잘린은 도톰한 모포를 아리아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네 것은?”

“저는 괜찮아요.”

“밤에는 추울 거야.”

“괜찮아요, 아가씨.”

아리아나는 모포 한쪽을 들고 로잘린에게 손짓했다.

“그럼 이리로 와. 붙어서 앉아 있으면 더 따뜻하겠지.”

로잘린은 미묘한 표정으로 아리아나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 다정하시네요.”

아리아나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고, 로잘린은 조심스럽게 아리아나의 옆에 앉았다.

한 모포로 두 사람을 함께 둘러싸니 서로의 체온이 모포 안을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타인의 온기를 느끼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라서 아리아나는 어쩐지 가슴이 아릿했다.

정체 모를 하녀의 온기만으로도 마음이 무뎌지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타인의 온기를 이토록 바라는 자신이 불쌍했다.

‘그 무엇도 바라지 마. 그 무엇도 원해서는 안 돼. 이번 삶에서 내가 얻을 건 단 하나뿐이야.’

날 지옥에 몰아넣은, 고결하지만 천박한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

‘또다시 그때를 되풀이해서는 안 돼.’

사랑받기를 원했기에, 인정받고 싶었기에, 자신이 지옥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죽었다.

작은 온기 한 조각에 설레고, 마음도 담기지 않은 미소에 기뻐하며, 더 깊은 지옥으로 걸어들어갔다.

예쁘지만 멍청하고, 좋은 혈통을 가졌지만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는 여자는 이용하기에 딱 좋다. 타인의 온기와 애정을 바라는 여자를 무너뜨리는 건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아나가 부서질 때까지 이용하다가 버렸다.

로잘린의 체온 때문에 잠시 무뎌졌던 심장이 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리아나는 고개를 들어 청빛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응시했다.

별빛 하나하나에 아리아나를 지옥으로 밀어넣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새겨졌다.

그들의 얼굴을 가슴에 새기며, 아리아나는 고독한 밤을 흘려보냈다.

+++

이른 아침부터 고용인들은 출발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아리아나는 출발하기 직전에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타다가 흘긋 옆을 돌아보니 레이첼이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그녀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짓자, 레이첼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황급히 마차 문을 닫았다.

고디언 백작 가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가 출발했다.

들어왔을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 성문을 빠져나갔다.

아리아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았다.

“피곤하실 텐데 좀 주무세요.”

“응. 산이 가까워지면 깨워줘.”

로잘린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기에 깊이 잠들지는 못했다.

선잠을 자는 동안 말발굽 소리와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로잘린이 아리아나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가씨, 웨이펀 산맥에 가까워졌습니다.”

아리아나는 번쩍 눈을 뜨고 창문 밖을 확인했다.

높고 긴 산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아리아나는 빅토리아나 3황자의 명령을 받고 저 산맥을 여러 번 넘나들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아무 일 없이 제국에 도착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만약 레이첼이 정말로 이곳에서 아리아나를 죽이려 든다면, 일이 많이 어려워질 터였다.

‘만약 잘못되면 죽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각오했다.

칼을 품은 자는 칼을 맞을 각오도 해야만 한다.

아리아나는 가만히 치마를 움켜쥐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산길에 접어든 마차는 아까보다 심하게 흔들렸다.

아리아나는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산맥에 접어들고 나서도 한 시간쯤 더 달렸을까?

문득 소리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잘린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창밖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다른 마차들이 멀어지고 있어요.”

“그래.”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입안이 바싹 말랐다.

머리를 쓰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몸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없었다.

며칠 전 파고라에서 라운더가 덮쳤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라운더는 무예를 익힌 자가 아닌데도, 아리아나는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괜찮아.’

아리아나는 술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괜찮아. 이 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잖아. 당황하지만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어.’

아리아나는 품 안의 단도를 확인했다.

무예를 익히지 못한 상황에서 단도를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가 없다는 건, 지난 사건 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있을 때에, 로잘린이 낮게 말했다.

“옵니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도망칩니다.”

로잘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순진하고 여린 하녀의 눈빛에서 목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맹수의 눈빛으로 변했다. 음성 또한 평소보다 낮아졌다.

아리아나는 로잘린의 돌변한 모습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로잘린이 풍성한 치마 안쪽에서 긴 장검을 꺼내든 것이다.

“아가씨. 제 뒤를 따라오십시오.”

“너는……?”

로잘린의 정체를 물어보려던 아리아나는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왼쪽으로. 왼쪽으로 가야 해.”

“알겠습니다.”

로잘린이 마차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사내들의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귀족의 마차다! 습격해라!”

+++

레이첼은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았다.

제국 행을 결정했을 때, 레이첼은 시녀를 보내 용병단과 접촉했다. 말이 용병이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평판 나쁜 용병단이었다.

-“반드시 죽여. 그 자리에서 죽여야만 해. 살려서 팔아치울 생각 따위는 하지 마.”

웨이펀 산맥의 산길은 아주 위험하지는 않지만, 종종 산적이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산길을 지나갈 때는 기사나 용병을 여러 명 고용해야만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제이콥이 레이첼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잘못되지 않겠지?”

이번 계획에 관해서는 제이콥에게도 말해두었다. 그도 말을 맞춰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산맥을 벗어나자마자 나오는 도시에 들어서게 되면, 그들은 위급한 척 경비병들에게 달려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마차 줄이 길어서 미처 몰랐는데, 마지막으로 따라오던 둘째 딸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둘째 딸이 잠시 마차를 멈춘 모양인데 가서 확인 좀 해달라고.

산길을 달려간 경비병들은 산적에게 당해 부서진 마차와 칼을 맞고 죽은 하녀의 시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련한 둘째 공녀의 시신도.

“잘못될 리 없어. 마부에게도 언질을 해두긴 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죽을 거야. 모두 죽이고 산적들은 자취를 감출 테니, 우리는 그저 딸 잃은 부모 역할만 제대로 하면 돼.”

“딸을 잃고 파티를 즐길 수는 없잖아. 사망 확인을 하는 대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장례식을 치르는 척은 해야지.”

“장례식은 제국에 있는 별장에서 치르면 돼. 아리아나가 제국에 한번 와보는 걸 간절히 원했다고,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제국에서 보내주고 싶었다고 하면 되지.”

그러면 모두 브론테 가문 사람들을 안쓰럽게 여기리라.

딸을 잃은 레이첼, 언니, 동생을 잃은 빅토리아와 헬레나.

다들 위로해주러 찾아오고, 위로해주기 위해 초대하겠지. 친분이 없는 귀족들도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할 것이다.

“오히려 황후 폐하의 눈에 띌 기회야. 우리는 이번 사교 시즌에 이야기의 중심이 될 거야.”

+++

무기를 손에 쥔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확인할 수 있는 사내들만 20명이 넘었다.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치밀했다. 이번에 반드시 아리아나를 죽일 생각으로 일을 진행했다.

아리아나는 슬쩍 눈을 움직여서 왼쪽으로 펼쳐진 숲을 확인했다.

“상대는 방심하고 있습니다.”

로잘린이 검을 든 채로 앞을 노려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대로 적들은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일개 하녀일 뿐인 여인이 장검 한 자루를 들고 있다고 해서, 자신들의 몸에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리아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로잘린, 날 구할 필요는…….”

“왼쪽을 뚫겠습니다. 제 뒤로 바짝 붙으세요.”

로잘린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아리아나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로잘린이 움직이자, 놈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차 왼쪽에 서 있던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렇게 하면 로잘린과 아리아나가 바짝 굳어서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로잘린도, 아리아나도 그들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스릉-!

로잘린의 손에서 검이 번뜩였다.

은빛 궤적이 지나간 곳에 붉은 피보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아리아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저 로잘린의 등만 똑바로 응시하며 그녀를 따라 달렸다.

당황한 건, 산적으로 위장한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귀족 영애와 하녀만 상대한다고 들었지, 검을 쓸 줄 아는 이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무예가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 궂은일을 다 하며 살아온 용병들이었다. 때문에 검을 든 하녀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녀가 사용하는 검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을 죽인 두 여인을 이대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이쪽은 수가 많으니, 여자 혼자서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용병들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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