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덫을 피하는 방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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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덫을 피하는 방법 (1)
2023.03.30.
레이첼은 파들파들 떠는 어린 하녀에게 속삭였다.
“네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난데없는 일을 당한 하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공작부인에게 반발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리고 시골에서 올라와 아는 게 많지는 않아도, 눈앞의 공작부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시골에서 사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공작부인의 손짓 하나에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었다.
몇 시간 후, 어린 하녀는 수사청에 찾아가 수사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고했다.
“제가 죽였어요. 제가 파고라에서 그 남자를 죽였어요.”
새파란 입술로 바들바들 떨면서 죄를 고하는 하녀를, 수사관들은 안쓰럽게 지켜봤다.
뒤늦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돌아온 수사청장의 눈에 들어온 건, 죽음으로 사죄하겠다며 독을 마시고 죽은 하녀의 시신이었다.
누구도 하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하녀가 독까지 마시며 죄를 고백한 마당에 더는 빅토리아를 잡아둘 수 없었다.
레이첼은 미소 띤 얼굴로 찾아와 빅토리아를 데리고 돌아갔다.
빅토리아와 레이첼에게 엄벌을 내리라며 모여 있던 사람들도 막상 브론테 공작가의 마차에는 돌을 던지지 못했다.
수사청장은 멀어지는 마차를 굳은 표정으로 지켜봤다.
“빅토리아 브론테가 평범한 가문 여식이었다면 이 정도 증거로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빅토리아는 공작의 딸이고 서제후의 손녀이기에, 정황 증거뿐 아니라 목격자가 필요했다.
수사청장은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녔지만, 빅토리아가 사내를 죽이는 걸 직접 목격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수사청장처럼 제국에서 파견된 수사관이 중얼거렸다.
“신분이 무기고, 신분이 죄지요. 죽은 하녀만 불쌍하게 됐습니다.”
+++
빅토리아가 풀려나긴 했지만, 소문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이제는 레이첼이 하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소문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레이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 따위, 더 큰 소문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레이첼은 사람을 시켜 여러 가지 준비를 한 뒤, 서둘러 제국 수도를 향해 떠날 채비를 했다.
한심한 듯 레이첼을 지켜보던 제이콥이 말했다.
“제국에 가봐야 웃음거리만 될 거야.”
“제국 사람들은 생각보다 서령 소식에 관심이 없어. 서령은 변두리에 있는 시골 나라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서령 사람들은 제국 소식에 관심이 많지.”
서령에는 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사교 시즌에는 파티 소식이 자주 실리니, 거기서 우리 애들이 돋보이면 신문에도 좋은 기사가 실릴 거야. 우리 애들 이미지도 많이 달라지겠지. 신문에 실리는 기사에 휘둘리는 개돼지 같은 것들이니, 좋은 기사만 접하다 보면 이런 사건 같은 건 금방 잊을걸.”
“……정말 그럴까?”
“그렇다니까. 지금 당장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차라리 서령을 떠나 있는 편이 나아. 우리가 보이지 않으면 소문도 수그러들겠지. 그럴 때 헬레나가 황후 폐하의 가호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분위기가 바뀔 거고.”
“아리아나도 데려가야 하는 거 알지? 가든 파티 때의 일이 있으니, 아리아나만 놔두고 갔다가는 얘기가 나올 거야.”
“걱정 마, 당연히 데리고 가야지.”
레이첼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아주 좋은 마차에 태워서 데려가야지.”
+++
제국 행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아리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멀리 돌아가기는 했으나 빅토리아는 풀려났고, 레이첼은 예상한 대로 움직였다.
‘소문이 누그러질 때까지 서령을 떠나 있을 생각이겠지.’
오늘 아침 찾아온 레이첼은 아리아나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내일 제국으로 출발할 건데, 네가 원한다면 하녀든, 시녀든 한두 명 데려가도록 하렴. 긴 여행이 될 테니 네 시중을 들어줄 사람도 필요하겠지. 그리고 그 옷, 날 골탕 먹일 때마다 입은 그 옷을 당장 내다 버리지 않으면 제국에 데려가지 않을 테니, 잘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해.”
이제 허름한 옷을 입어야 할 필요는 없기에, 아리아나는 그렇게 했다. 유행이 지나서 촌스럽기는 해도 질이 좋은 원피스를 입고, 레이첼이 가져다준 구두로 갈아 신었다.
되살아난 후에 처음 신는 구두라서 발이 아팠지만, 이 통증도 곧 익숙해지리라는 걸 알았다.
아리아나는 로잘린에게 동행하고 싶다 했고, 로잘린은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국에 도착하면 네가 한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두둑이 챙겨주마.”
아리아나의 말에 로잘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그렇게 제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공작저택 앞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공작가문 사람들이 탈 마차들, 그리고 고용인들이 탈 마차와 짐마차.
마차가 많은 만큼 지키기 위한 기사들도 많았다.
“아주 복이 텄네. 신나겠다, 네 주제에 제국에도 가보고.”
제국 행으로 들뜬 헬레나는 지금까지 저택 분위기가 어두웠던 걸 깨끗이 잊어버린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빅토리아는 어두운 안색으로 음침하게 아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른 마차에 올라라.”
제이콥 브론테 공작의 채근에 헬레나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마차에 올랐다. 빅토리아도 아리아나를 쏘아보던 시선을 거두고 마차에 탔다.
아리아나도 마차에 타려는데 마부가 마차 문을 닫았다.
“아가씨는 이 마차를 타시면 됩니다.”
시종이 뒤에 있는 마차로 아리아나를 안내했다.
헬레나와 빅토리아가 탄 것보다는 좀 작지만, 공작가문의 문장이 박힌 화려한 마차였다.
‘어째서 내게 이런 화려한 마차를 따로 타라고 하는 걸까?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 잠시 마차를 응시하는데, 레이첼이 아리아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헬레나가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니. 이제는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좀 떨어져 있어라. 심심할 것 같으니 하녀 한 명 데리고 타도 좋고.”
아리아나는 로잘린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아리아나는 창문에 드리운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창 바깥을 응시했다.
배웅을 나온 고용인들과 브론테의 저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살아온 화려한 저택. 이제는 돌아올 일 없는 저택.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날개에 걸린 갈고리가 빠져나간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만약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저 저택을 박살내기 위해서겠지.’
지금 가진 힘으로 이 저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아리아나가 던진 작은 돌은 그만큼 작은 상채기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언젠가 필요해지면 그 상처는 크게 벌어져 치유할 수 없는 흉터로 남게 될 것이다.
‘다만…… 편지를 손에 못 넣은 게 아쉬워. 편지가 없어도 동제후가 날 내치지 못할 방법을 찾아야 해.’
여러 마리의 말이 내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덜컹거림 때문에 생각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하필이면 레이첼의 방을 뒤지고 있을 때 찾아온 사이러스가 떠올라서 또 울컥했다.
그가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더라도 편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을 곱씹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에 넣기 직전에 빠져나간 자신의 무기가 아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도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보름이 넘게 걸리겠죠.”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 있던 로잘린이 입을 열었을 때에야, 아리아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로잘린의 깊은 눈동자가 아리아나를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해요, 아가씨.”
로잘린의 보라색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얼마 전부터 아리아나는 로잘린이 평범한 하녀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돈 때문에 아리아나를 돕는다고 해도 로잘린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마차에 오른 순간부터 눈빛까지 변해 있었다.
순박해 보이지만 돈 욕심 많고 약삭빠른 하녀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보다 더한 비밀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로잘린을 경계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브론테 가문은 적이 많아. 브론테 때문에 죽은 하녀나 평민의 가족이거나 친구겠지.’
지금쯤이면 로잘린도 아리아나가 브론테 가문에 좋은 감정이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맞는 한, 로잘린이 굳이 아리아나의 뒤통수를 칠 이유는 없었다. 아리아나는 로잘린의 좋은 돈줄이니까.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을 거야. 공작부인이 나를 따로 마차에 태운 걸로 봐선, 아무래도 이 마차에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거든.”
“마차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요. 제가 어젯밤에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차에만 따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겠지. 로잘린,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네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겠니?”
로잘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고, 로잘린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가씨도 지켜드릴 수 있어요.”
“아니, 나까지 지킬 필요는 없어. 나는 어떻게든 할 테니, 너도 어떻게든 위험을 피하도록 해. 만약 우리가 여기서 헤어지게 된다면 네 계좌로 돈을 보내놓을게.”
로잘린은 미묘한 표정으로 아리아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네, 아가씨.”
“이 속도라면 오늘 저녁에 작은 도시에 도착할 거야. 거기서 하루 묵고 새벽에 출발하면 오후에 웨이펀 산맥에 접어들겠지.”
웨이펀 산맥은 서령을 가로로 길게 가로지르는 산맥이었다.
“만약 일이 벌어진다면 웨이펀 산맥에 접어들 무렵일 거야. 거기는 근처에 작은 마을 하나가 전부라서 도움을 주러 올 사람이 없거든.”
레이첼이 이대로 순순히 아리아나를 제국에 데려갈 리가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리아나는 레이첼이 파고라 살인사건의 전말을 알아냈을 거라고 여겼다. 아까 아리아나에게 다른 마차에 타라고 하던 레이첼은 아리아나를 향한 증오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마부도, 기사들도 브론테 가문 소속이니 내가 멋대로 마차를 돌릴 수는 없겠지. 지키는 눈이 많다는 건 감시하는 눈도 많다는 것. 말을 빼돌려서 도망칠 수도 없어.”
레이첼은 아리아나를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내게 하녀나 시녀를 한 명 데려가라고 한 것도 나중에 할 말을 만들기 위해서일 거야. 날 잘 돌보라고 사람을 붙여줬는데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면서.”
로잘린은 조금 놀랍다는 눈으로 아리아나를 보고 있었다.
사정을 알면 놀라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리아나는 레이첼을 몹시 잘 알았다. 3황자 헤럴드를 만나기 전까지, 아리아나는 레이첼의 수족이 되어 온갖 궂은일을 처리했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계획할지, 어떤 식으로 적을 궁지에 몰아넣을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문제일 뿐.
아리아나는 로잘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작고 마른 손이 로잘린의 단단한 손등 위에 놓였다. 푸른 눈이 보라색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로잘린. 공작부인은 날 죽이려고 할 거야. 그러니 일이 벌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도록 해. 날 구할 생각은 하지 말고.”
“제가 도망치면 아가씨는 어쩌시게요? 제가 사다 드린 단도로는 사내 한 명 죽이기 힘들 거예요.”
“알아. 생각이 있어. 난 여기서 죽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