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너도 느껴봐, 절망. (6) (27/238)


(27) 너도 느껴봐, 절망. (6)
2023.03.29.


사이러스의 조용한 도움이 아리아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그가 이유 없이 도와줄 리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마음만 무거웠다.

게다가 사이러스의 도움은 아리아나의 계획에 방해가 되기만 했다.

소문 때문에 레이첼은 함부로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방에 틀어박혔다. 레이첼이 저택을 비웠을 때 그녀의 방에 들어가서 옷장을 뒤지려던 아리아나의 계획은 차이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아예 제국 행이 취소될지도 몰라.’

아리아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빅토리아가 돌아와야만 한다.

그러면 레이첼은 빅토리아를 둘러싼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서령을 떠나 있자면서, 서둘러 제국 행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풀려나지 못했고, 레이첼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방에서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답답한 마음을 내리누르고 로잘린에게 말했다.

“로잘린, 내게 단도를 하나 더 구해다줄 수 있겠니?”

“네, 아가씨.”

명을 받고 떠나려던 로잘린이 잠시 멈춰서 아리아나를 돌아봤다. 아리아나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로잘린이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참으로 치열하게 사시네요.”

아리아나는 옅은 미소만 지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로잘린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살며시 고개를 숙인 후 방에서 나갔다.

‘치열하다.’

아리아나는 로잘린에게 들은 말을 곱씹었다.

‘그래, 치열하지.’

빅토리아는 생전 처음 감옥에 갇혀서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도울 수 없는 레이첼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직 아니야. 당신들은 내가 느낀 절망의 반의반도 느끼지 못했어. 고작해야 귀족용 감옥에 갇혀 있을 뿐이잖아.’

평생을 고결하게 살아온 빅토리아에게는 귀족용 감옥도 지옥처럼 느껴지겠지만, 아리아나는 이쯤에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당신들은 내가 걸었던 그 지옥을 똑같이 걸어봐야 해. 그게 내가 또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이라 해도.’

+++

레이첼은 서제후에게서 온 편지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찾아오지 마라.]

편지에는 단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웨스튼 시 곳곳에서 레이첼과 빅토리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식인들이 모여서 빅토리아의 죄에 대한 강력 처벌을 요구했고, 자식을 학대하다 못해 무뢰배에게 끔찍한 짓을 하도록 사주까지 한 공작부인을 엄벌하라고 외쳐댔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첼이 믿을 곳은 아버지인 서제후뿐이었다.

그런데 찾아오지 말라니. 이게 곤경에 빠진 딸에게 할 소리란 말인가.

편지를 노려보는 레이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

서제후 로디안 오블렌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로디안이 빅토리아의 소식을 들은 건 이틀 전 아침. 소식을 듣자마자 몸소 수사청으로 가기 위해 채비를 하는데, 시종장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전하. 부, 부, 북제후가…… 북제후가 방문했습니다.”

북제후가 서령에 온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에 퍼져 있긴 했지만, 그저 북제후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어 하는 여인들이 제멋대로 낸 헛소문일 거라고 여겨왔다.

사이가 좋지도 않은 북제후가 굳이 서령에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로 북제후가 서령에 왔을 뿐 아니라, 서제후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것도 빅토리아가 살인죄를 덮어쓰고 갇힌 상황에서.

북제후가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 그를 홀대할 수는 없었다.

로디안은 수사청에 가려던 걸 관두고 사이러스를 맞이했다.

“북제후가 이리 먼 길을 올 줄은 몰랐군. 기별이라도 하지.”

“기별이라면 진작했는데. 내가 온다는 소문이 서령 전체에 퍼지지 않았나?”

손자뻘인 사이러스의 건방진 말투에 로디안은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보며 사이러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왜? 어릴 때는 할아버지라며 존대를 하던 내가 동등한 자리에 있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나?”

“……못 본 사이에 건방져졌군.”

“건방지다니. 자네나 나나 같은 제후 아닌가? 내가 건방진 거라면 자네도 건방진 게 되지. 안 그런가, 서제후?”

건방을 떠는 사이러스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사이러스는 혼자 찾아왔지만, 그를 익히 아는 로디안은 그가 진짜 혼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북령에는 신묘한 무예를 익힌 자들이 많았다. 특히 사이러스가 이끄는 흑기사단은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기사라고 알려져 있다.

강한 군사를 갖지 못한 서령은 북령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처지였다.

로디안은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억누르고 간신히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건가?”

사이러스는 애써 미소를 짓는 로디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부모님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드디어 이 자리에 도달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아직은 서제후에게 속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벨 수는 있지만, 그 후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힘은 없다.

그러니 지금은 이 증오할 만한 얼굴을 눈에 담는 것으로 참아야겠지. 서제후에게 작은 불안 한 톨을 안겨주는 것으로 끝내야겠지.

‘내가 무언가 알고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초조해하다가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을 테니.’

그리하여 사이러스는 은은한 미소를 완벽하게 그려내며 말했다.

“서령은 참으로 야박한 곳이군. 멀리서 온 사람에게 차 한 잔 안 내주다니.”

로디안은 이를 으득 깨물며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시종들이 차를 내온 후에도 사이러스는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로디안은 초조해졌다.

손녀인 빅토리아가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 데다가, 웨스튼 시에는 브론테 가문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건방진 어린 제후를 상대할 시간 따위는 없는데, 그렇다고 사이러스가 찾아온 이유도 모르는 채 그를 놔두고 성을 비울 수는 없었다.

사이러스가 5살 때, 그의 부모인 선대 북제후와 북제후비는 전쟁에서 죽은 후 여러 죄를 뒤집어썼다.

카르하라는 성을 가진 사람 대부분이 그 일로 죽었지만, 사이러스는 무사히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작 14살의 나이에 흑기사단을 이끌고 북령에 돌아와 혼란에 빠진 북령을 평정하고 북제후의 지위를 되찾았다.

로디안이 사이러스를 만난 건 아직 그의 부모가 살아 있을 때로, 10년이 넘게 만나지 못한 사이러스가 그 속에 어떤 독을 품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로디안은 뱀 같은 눈으로 사이러스를 살펴봤다.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고……. 설마 제 부모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사이러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로디안은 사이러스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줬고,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브론테 공작가의 추문이 도시 밖까지 퍼져나가기 전에 뭐든 해야 하는데, 사이러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사이러스가 선대 북제후와 관련된 비밀을 알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로디안의 약점을 잡기 위해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상황. 권력을 앞세워 제 가족을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면, 나중에 사이러스가 그걸 이용해서 로디안을 곤경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로디안이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러갔다.

+++

아이작은 성문 밖에 마련한 임시 거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령에서만 나오는 새로운 술을 마시는 것도 이제는 질려서, 술을 마시며 연신 하품을 하는 중이었다.

“몰래 온 거라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니 즐길 거리도 없고…… 심심해죽겠네.”

물리도록 먹은 육포를 뜯고 있는데, 사이러스가 시킨 대로 소문을 내러 나갔던 노아가 돌아왔다.

아이작이 환하게 웃자, 노아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아이작 님.”

“왜? 반할 것 같아?”

“아뇨, 술을 권하실 것 같아서요.”

“뭐 어때? 전하도 없고, 할 일이라 봐야 소문을 내는 것뿐인데 술 정도는 마셔도 되잖아.”

“일하는 중에는 안 돼요. 루이한테 들키면 죽어요.”

“루이도 제후비 옆에 딱 붙어 있느라 못 오는데 뭐가 문제야?”

노아가 아이작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거 말인데요. 진짜로 둘째 공녀가 제후비가 될까요?”

“당연하지! 지금 봐봐. 전하가 둘째 공녀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잖아. 말씀은 둘째 공녀 덕에 증거를 얻어서 그 빚을 갚기 위해 도와주는 거라고 하지만, 전하가 어디 그럴 분이야?”

“아니죠. 좋은 호구를 만났다고 실컷 등쳐 드실 분이시죠. 하지만 둘째 공녀는 오랫동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시던데요.”

아이작이 검지를 들어 양쪽으로 살살 움직였다.

“노아, 노아, 노아. 너, 전하 곁에 있은 지 몇 년이나 됐는데도 아직 몰라? 전하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해서 도와주실 분이야?”

“그것도 아니긴 하죠. 이용 가치가 있으면 협박을 해서라도 골수까지 뽑아드실 분이죠.”

“그렇지. 그런 분이 며칠이나 투자해서 서제후를 만나고 있잖아. 그것도 씹어죽이고 싶어 할 만큼 싫어하는 서제후를. 그렇다면 뭐다?”

“둘째 공녀님이 미래의 북제후비다, 그거네요.”

“맞지. 바로 그거지. 전하만 못 깨달았지, 우리는 다 알잖아. 안 그래?”

아이작이 잔에 술을 따른 후 노아의 앞으로 잔을 밀었다.

“그러니까 마셔. 축하할 일이라고.”

노아는 입맛을 다시며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에이, 모르겠다!”라며 잔을 들었다.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털어 넣은 노아가 말했다.

“그런데요. 제후비께서 우리 주군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저번에 뵈었을 때 보니 주군을 앞에 두고도 표정이 영 안 좋으시던데.”

“우리 전하를 마음에 안 들어 할 여인이 어디 있어?”

“그거야 그렇지만…….”

노아는 파고라에서 보았던 아리아나를 떠올렸다.

지금껏 사이러스를 앞에 둔 여인들은 그의 외모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곤 했는데, 아리아나는 달랐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에는 성가시다는 표정만이 가득 했고, 서둘러 사이러스와의 대화를 끝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위급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사이러스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노아의 눈에는 사이러스가 싫다는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는 사내로만 보였지만, 그런 말은 죽어도 꺼낼 수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아이작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제후비를 모셔 가면 헤른 공작님이 정말 좋아하시겠지?”

+++

사교 시즌 때 가져갈 드레스들이 도착했을 때, 레이첼은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레이첼은 상자 안에 담긴 드레스를 한 벌, 한 벌 꺼내서 살펴봤다. 아리아나의 드레스를 집어든 레이첼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이 드레스를 맞출 때만 해도 이런 상황에 처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리아나가 이 드레스를 입을 때는 황실 파티에서가 아닌, 알프레히 자작과의 결혼식에서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리아나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빅토리아가 살인 누명을 뒤집어썼으며 레이첼은 친딸을 학대하는 여인으로 소문이 났다.

어디 그뿐인가?

오롯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남편도, 위기에 처하면 반드시 도와줄 거라고 여겼던 아버지도, 레이첼을 등졌다.

서제후는 편지 한 통 보낸 후 소식이 없고, 제이콥은 저택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들리는 얘기로는 어느 극단의 여자를 애인으로 삼아, 그녀의 집에서 머문다고 했다.

다른 때라면 제이콥의 애인을 가만 놔두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기에 두 눈에서 피가 나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첼은 까드득 이를 갈며 손에 들고 있던 드레스를 팽개쳤다.

그리고 시녀에게 명령했다.

“하녀를 한 명 데려와. 시골에서 살다가 올라온 계집으로. 부모가 전부 살아 있고, 이왕이면 형제가 많고, 가족에게 정이 많은 계집이어야 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