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너도 느껴봐, 절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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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너도 느껴봐, 절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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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너도 느껴봐, 절망. (5)
2023.03.28.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
헬레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자신의 방 응접실에 앉아서 자수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이 술렁거려 자수를 놓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수틀을 집어던지고 밖에 나가려 했지만, 방문을 지키던 기사가 헬레나를 막았다.
“공작부인께서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헬레나는 평소처럼 악다구니를 쓸 힘도 없어서 도로 방 안에 들어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리아나가 죽기라도 했나? 하지만 걔가 죽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야단일 일이야?’
어제 레이첼이 방 안에서 나오지 말라 해서 방 안에만 있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 못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내보냈던 시녀 루이지가 차와 쿠키가 놓인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헬레나는 황급히 다가가 루이지의 팔을 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래?”
“사람이 죽었대요, 아가씨. 파고라에서 어떤 남자가 죽었는데…….”
“뭐야? 아리아나가 죽은 게 아니었어?”
“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남자를 죽인 범인이 빅토리아 아가씨래요.”
“뭐?”
예상치 못한 말에 헬레나가 비틀거리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두 눈을 꿈뻑거리는 헬레나에게 루이지가 작게 속삭였다.
“그 남자 시체 옆에 빅토리아 아가씨의 물건이 떨어져 있었나 봐요. 수사관들이 와서 빅토리아 아가씨를 잡아갔대요.”
“자, 잡아갔다고? 빅토리아를?”
“네, 아가씨. 어쩜 좋아요.”
헬레나는 평소 빅토리아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가 같은 동생이 잡혀갔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선득했다.
“수사관들이…… 수사관들이 감히 어떻게 빅토리아를 잡아가? 걔는 우리 브론테 가문의 막내딸이라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수사청장이 직접 왔나 봐요. 공작님께서 말리려고 했는데, 공작님께 큰소리를 쳤대요. 황제 폐하를 언급하면서…….”
헬레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브론테 가문은 평화로웠다.
모두가 브론테 공작가문을 우러러봤고, 공작의 두 딸은 사랑을 받았으며, 크고 작은 파티가 열릴 때마다 두 공녀에게는 아낌없는 칭찬이 쏟아졌다.
그런데 가든 파티 때부터 뭔가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브론테 공작가의 막내 공녀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수사청에 잡혀가다니.
‘왜지?’
헬레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
빅토리아는 며칠째 귀족용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귀족용 감옥은 독방으로 침대와 의자, 탁자 등 필요한 것이 갖춰져 있었지만, 평생 공작저택에서 살아온 빅토리아에게는 화장실보다 못하게 느껴졌다.
딱딱한 침구와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군내,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창문과 거무죽죽한 바닥, 지저분한 천장.
빅토리아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
성숙하네, 어른스럽네, 칭찬을 받아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브론테 공작가 안에서만이었다. 든든한 부모와 가문이 뒤를 받쳐주는 동안에는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셋째 공녀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작저택을 나오는 순간, 빅토리아는 평범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신문을 하는 수사관들은 빅토리아를 정중하게 대해주었지만, 빅토리아는 무섭기만 했다. 대답 한번 잘못했다가는 평생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훌쩍거리며 울기만 했다.
“브론테 공작저의 셋째 공녀가 어른스럽고 영리하다더니…… 그저 소문일 뿐이었나 봐.”
“그러게 말이야. 저렇게 울기만 해서야…….”
수사관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와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작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일 뿐. 브론테의 영특한 셋째 공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젯밤에 갑자기 그 손수건을 아리아나에게 건네줬을 때가 떠올라서 수사청장에게 말했지만,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을 조사하고 돌아온 수사청장의 표정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귀족들이 하나같이, “그 댁 둘째 공녀가 너무 안쓰러워서…….”, “팔뚝과 목에 멍이 들었더라고요. 보셨어요?”, “둘째 공녀님 보느라 다른 건 제대로 못 봤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인데 옷 한 벌 제대로 입히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요?” 같은 이야기만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빅토리아는 계속해서 그 손수건을 파티 때 아리아나에게 건넸다고 주장했지만, 속사정을 듣고 온 수사청장의 귀에는 불쌍한 둘째 공녀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으로만 들렸다.
“그자는 라운더라고 하는 남자인데, 심장을 단도로 찔린 후에 쓰러지다가 목이 꺾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라운더의 가슴을 찌른 단도를 숲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단도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수사청장이 하얀 천에 감싸여 있던 단도를 꺼냈다. 단도의 날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은 자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빅토리아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저, 저는 본 적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아리아나라면…….”
콰앙-!
수사청장이 분노해서 두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또! 또! 또 아리아나!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둘째 공녀님은 그날 오전부터 내내 하녀와 함께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시겠어요?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게 그렇게 말만 늘어놔서 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빅토리아는 브론테 가문의 셋째 딸로 태어나,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도 빅토리아에게 윽박지를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수사청장 따위가 감히 내게 언성을 높이다니.
울컥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빅토리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면서도 수사청장의 눈은 냉혹했다.
“밖에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라운더라는 자가 자기 동료들에게 흘린 얘기가 있더군요. 둘째 공녀님께 몹쓸 짓을 하는 대가로 공작부인에게 6골드를 받기로 했다고.”
“그, 그렇다면 역시 아리아나가 라운더를 죽인 게…….”
“둘째 공녀님은 그 시간에 빨래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숲에 있는 셋째 공녀님을 여러 귀부인들께서 목격하셨죠. 셋째 공녀님은 공작부인이 뭘 꾸미는지 알고 구경하기 위해 파고라로 향했다가, 셋째 공녀님을 둘째 공녀님으로 착각한 라운더에게 습격당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죽였고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파고라에 간 적도 없다고요!”
“셋째 공녀님. 만약 라운더가 공녀님께 해코지를 하려고 한 걸 막다가 그런 거라면 정당방위이니, 큰 벌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솔직하게 말씀하셔야 해요. 오늘 밤에 잘 생각해보십시오.”
수사청장이 나간 후, 빅토리아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빅토리아가 이곳에 갇힌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날 버린 거야? 내가 필요 없어진 거야? 헬레나가 있으니, 나는 없어도 되는 거야? 아니면 아리아나가 나보다 더 영리해서 그 애를 거두기로 한 거야?’
만약 수사청장이 말한 대로 라운더에게 습격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한다면, 큰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사주한 공작부인도, 그걸 구경하러 갔다가 사람을 죽인 빅토리아도, 바닥에 떨어진 평판을 두 번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터였다.
앞을 보고 뒤를 봐도 무사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때에 의논을 할 만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는 생전 처음으로 깊은 절망과 고독에 휩싸였다.
+++
빅토리아가 수사청에 잡혀 간 지 5일째.
서령의 수도 웨스튼 시에는 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브론테 가문의 공작부인이 뒷거리의 무뢰한을 수소문해서 큰돈을 쥐여 주고, 자신의 딸인 아리아나에게 몹쓸 짓을 하도록 시켰다는 소문.
셋째인 빅토리아도 그 사실을 알고 구경하러 갔다가 도리어 몹쓸 짓을 당하는 바람에 상대를 죽여 잡혀갔다는 소문.
동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아나가 끔찍한 학대를 받고 있다는 소문.
아리아나가 입는 옷이 하녀들도 안 입는 낡은 옷이라는 소문.
아리아나가 첫째인 헬레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소문.
사람들은 그 소문 뒤에 붉은 단발의 여자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열심히 흘리고 다니는 이야기는 소문에서 진실이 되어,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웨스튼 시의 온 거리가 브론테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로 시끄러울 때에, 아리아나는 고요하게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3월 초인데 때늦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진 함박눈이 쌓인 정원은 마치 설원의 풍경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세간에 떠도는 더러운 소문들도 흰 눈에 덮여 아름다운 정경을 퇴색시키지 못했다.
아리아나는 검지로 창틀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레이첼은 날 신경 쓸 틈이 없겠지. 어떻게든 빅토리아를 빼내려고 고군분투하는 중일 테니까.’
헬레나는 이제 저택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전처럼 나서서 아리아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무거운 저택 분위기가 헬레나조차도 숨죽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서제후는 왜 움직이질 않는 거지? 진작 서제후 귀에도 이 일이 들어갔을 텐데.’
빅토리아는 아리아나가 예상한 것보다 더 오래 갇혀 있었다.
서제후가 나선다면 아무리 수사청장이라도 빅토리아를 계속 가둬두기는 힘들다. 피 묻은 단도와 시신 근처에 떨어져 있던 손수건, 귀부인들의 목격담만으로 죄를 확정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제후의 핏줄이자 공작의 딸에게 살인죄를 씌우려면, 살인 장면의 목격담 정도는 필요하다.
그래서 2, 3일 만에 풀려날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서제후가 움직이지 않는다.
‘설마 빅토리아를 버리려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서제후는 영리한 빅토리아를 제일 예뻐하니, 이런 일에 휘말렸다고 버릴 리 없어. 분명 다른 이유가 있겠지.’
서제후의 생각을 추측해보려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로잘린이 식사와 음료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깥 분위기는 어떠니?”
“몇몇 중급 계층 사람들이 수사청 앞에 모여서 이 사건을 정의롭게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서제후 전하께서 나선다고 해도 빅토리아 아가씨가 쉽게 풀려나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
“저 말고도 이 일에 관한 소문을 주도적으로 내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네. 제가 낸 소문은 빅토리아 아가씨가 살인으로 잡혀갔다는 소문까지만이거든요. 그 외에는 그자가 낸 거겠죠.”
문득 사이러스가 떠올랐다.
아리아나가 소문을 낼 거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사이러스.
그가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여준 걸까?
아리아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 남자는 내게 얼마나 많은 걸 기대하기에 이런 도움을 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