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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너도 느껴봐, 절망. (2) (23/238)


(23) 너도 느껴봐, 절망. (2)
2023.03.25.


호화로운 방에 들어선 아리아나는 거침없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아리아나가 사용하는 방보다 훨씬 넓은 드레스룸 안에는 옷장과 진열장이 여러 개 있었다.

진열장에는 평범한 사람이 꿈도 못 꿀 값비싼 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아리아나는 거기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리아나의 시선은 제일 구석에 있는 옷장으로 향해 있었다. 유행이 지나서 입지 않는 옷을 걸어둔 옷장.

아리아나는 옷장 문을 열고 갈색 여우털로 만든 코트를 꺼냈다.

부드럽고 풍성한 털코트의 안감을 두드려본 아리아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아리아나가 코트의 안감을 뜯어내려고 할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옷을 훔치러 들어오다니, 역시 그대는 담이 크군.”

뒤에서 나른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심장이 조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언제 레이첼이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이러스까지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언제나 레이첼의 방 근처를 오가며 지키는 전속 시녀와 하녀들이 귀부인들의 티파티 시중을 들기 위해 자리를 비운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사이러스가 위기에서 도와준 것만은 사실이었기에, 일순간 차오른 짜증을 억눌렀다. 아리아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코트를 도로 옷장 안에 걸어두고 사이러스를 향해 돌아섰다.

“전하.”

“도망칠 자금이라도 마련하려는 건가?”

“제가 어찌 어머니의 물건으로 도피 자금을 마련하겠습니까? 그저 언제나 만져보고 싶었던 털코트를 한번 만져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필이면 사람이 죽었을 때?”

“이럴 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요.”

사이러스는 가만히 아리아나의 표정을 살피다가 싱긋 웃었다.

“그대는 내 앞에서도 감히 거짓말을 참 잘해.”

“제가 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 이제 도망칠 건가?”

“아니요. 제가 도망칠 이유가 없지요.”

“그대가 지금 도망친다면 도와줄 수 있는데.”

“지금 제가 사라진다면 공작부인은 무슨 수를 써서든 제게 죄를 덮어씌우겠지요.”

“그대는 그곳에 막내 공녀의 손수건을 남겼지.”

“설령 그 사내를 죽인 이가 진짜 빅토리아라고 한들, 빅토리아가 제대로 처벌을 받기나 할까요? 손수건은 제게 쏟아질 의심을 잠시 거두게 해줄 뿐, 서제후와 브론테 공작의 가호가 있는 한 빅토리아는 안전할 거예요.”

“세상에는 처벌보다 무서운 게 있지. 그대는 그 수까지 생각해둔 것 아닌가?”

아리아나는 한숨을 삼켰다.

사이러스는 영리해도 너무 영리했다.

레이첼이 정적을 제거할 때, 아리아나는 늘 그녀를 뒤에서 도왔다. 아리아나는 레이첼이 어떤 방식으로 눈엣가시인 존재를 허물어뜨리는지 충분히 봐왔기에, 이번에도 자신에게 비슷한 수를 쓸 거라고 예상했다.

만약 예상한 일이 벌어졌을 때, 아리아나는 이번 사건을 조용히 무마할 수 없도록 로잘린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려두었다.

첫 번째는 레이첼의 이름으로 빅토리아를 파고라 근처에 불러내는 편지를 보낼 것. 편지는 아리아나가 써두었다. 예전에 레이첼의 일을 돕느라 그녀의 글씨체를 따라 했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두 번째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질 경우, 상황을 보아 은밀히 저택을 빠져나가 사람들에게 사건의 범인이 빅토리아라는 소문을 낼 것.

레이첼은 귀부인들을 돌려보낸 후, 손수건을 감추고 상황을 수습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보는 눈이 있어서 수사관을 불러온다고 해도 서제후의 입김 아래에 있는 수사관을 불러올 것이다.

사건이 조용히 묻힌다면, 아리아나는 로잘린을 내보내서 이 사건의 진실을 퍼뜨릴 계획이었다.

파고라 근처에서 빅토리아를 목격한 귀부인들이 있으니, 레이첼이 원하는 대로 빅토리아에게 흠집 하나 없이 사건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수법을 봐왔으니, 다음 수를 생각할 수 있지. 지난 기억들이 언제까지 내 무기가 되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아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이러스가 말했다.

“수사관이 왔더군.”

“……벌써요?”

“그래. 놀랍게도 수사청장이 몸소 등장했지.”

“어떻게……?”

사이러스의 얼굴에 언뜻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전하께서 불러주신 건가요?”

사이러스가 검지로 아리아나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제야 좀 그대의 나이로 보이는군.”

생각지 못한 그의 행동에 아리아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살며시 뒷걸음질을 쳐서 그의 손을 벗어났다.

아리아나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돌아가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쥐고 물었다.

“제게 이리 은혜를 베푸시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전하께 어떤 쓸모가 있을까요?”

“재미있군. 다만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너무 후해. 그대가 내게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지금 당장은 아닐지도 모르나,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라 여기시는 것 아닌가요?”

그의 얼굴에 그림처럼 우아하고 완벽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심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목적을 지닌 미소.

다른 여인이라면 그 미소에 홀렸을 테지만, 아리아나의 심장은 도리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미소가 3황자 헤럴드의 것과 몹시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유는 딱 하나,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아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전에는 그걸 몰랐기에 이용당하다가 처참하게 죽었다.

“전하께서 절 도와주셨으니, 원하시는 게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절 이용하시려 한다면 그 마음은 거둬주세요. 전하께 홀려 원하시는 대로 휘둘릴 생각은 없으니.”

“오.”

사이러스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아리아나에게 바짝 다가섰다.

“방금 내게 홀릴 것 같았나?”

“전하께서 그리 여기신다면 그런 거겠지요.”

“나랑 대화하는 게 귀찮은 모양이군.”

“모든 여인이 전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데,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그대는 대답을 피하는 기술이 아주 훌륭해.”

“과찬이십니다, 전하. 전하만 하려고요.”

물 흐르듯 부드럽게 대꾸하는 아리아나를, 사이러스는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제 슬슬 북령으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왜인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가 어디까지, 어떻게 하려는지 궁금해서 제 목적을 잊고 그녀를 지켜보게 되었다.

파고라에서의 일이 벌어졌을 땐 아찔하기까지 했다. 만약 예정대로 북령에 돌아갔다면, 아리아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평소처럼 사이러스가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먼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수사관이 왔으니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예상한 시간보다 더 오래 붙들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를 상황에서 계속 레이첼의 드레스룸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리아나는 과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는 묵묵히 아리아나를 지켜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아리아나가 물었다.

“바쁘지 않으신가요?”

“아직 여유가 좀 있지.”

“그렇다면 여기보다 좋은 곳에서 여유를 즐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기도 좋은데. 아름다운 장신구를 보는 즐거움이 있군.”

아무래도 사이러스가 먼저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이 방을 나가야만 한다.

아리아나는 사이러스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레이첼의 방을 나서며 아리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사이러스가 싫었다.

사이러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그가 버거웠다. 지금은 레이첼을 상대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쓰기에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아리아나의 계획에 방해만 되고 있었다.

저택을 떠나기 전에 편지를 손에 넣어야만 하는데, 이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리아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방으로 돌아갔다.

+++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방을 나선 후에도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예민한 청각은 복도를 걸어가는 아리아나의 발소리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하나하나 힘이 실린 걸음걸이.

평소에는 나비처럼 소리 없이 걸어 다니던 아리아나가 저토록 발소리를 크게 내는 걸 보니, 화가 잔뜩 난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이곳에 아리아나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거겠군.’

지금 당장 아리아나가 원하는 건 이 저택을 떠나서 동제후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

아리아나의 성격이라면 동제후에게 부친으로서의 인정을 호소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동제후가 자신을 받아들일 만한 무기를 들고 가려고 하겠지. 그 무기는 어쩌면 사이러스의 무기가 될지도 몰랐다.

사이러스는 옷장 문을 열고 아까 아리아나가 꺼내 들고 있던 털코트를 꺼냈다. 털코트 여기저기를 만져보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이러스는 코트 안감을 뜯어 그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여러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이러스는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사이러스가 그토록 찾고 있던 ‘그 날 그 일’에 관한 증거가 그곳에 있었다.

사이러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쓸모가 있군, 아리아나.”

+++

레이첼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빅토리아라니. 잘못 본 거 아닌가?”

자신의 목소리가 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낯선 이가 웅얼거리는 듯 비참한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흠흠,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우리 빅토리아 것일 리가 없네.”

“하지만 사용 흔적이 있는 데다가 여기 정확하게 가문의 문장과 빅토리아 브론테라는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제국에서 온 수사청장은 상대가 브론테 공작부인이라고 해서 주눅 들지 않았다. 정중하기는 하지만 단호한 그의 눈빛이 쉽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없으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디 좀 보여주게.”

“증거물이니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수사청장은 적당한 거리에서 손수건을 펼쳐 이름이 쓰여진 곳을 보여주었다.

손수건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부터, 레이첼은 그 손수건이 빅토리아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나 얻기 힘든 고급 천, 가장자리를 수놓은 빅토리아 특유의 자수.

빅토리아가 직접 자수를 놓은, 빅토리아의 손수건이 맞았다.

하지만 왜 빅토리아의 손수건이 이곳에 떨어져 있는 걸까?

일을 진행시키기 전에 혹시나 다른 사람이 얽힐까 봐, 하녀들에게 제대로 청소해두라고 시켰다. 빅토리아의 손수건이 저렇게 잘 보이는 곳에 떨어져 있었다면 하녀들이 발견해서 치웠을 것이다.

“빅토리아 님의 것이 맞습니까?”

여기서 아니라고 해봐야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레이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의 것이 맞네. 하지만 그 손수건이 거기에 떨어져 있었다고 해서 빅토리아가 그 사내를 죽였다는 뜻은 아니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 손수건이 이 사내의 팔뚝 위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이 사내가 죽은 후에 손수건을 떨어뜨렸다는 거죠.”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귀부인들 사이에 작은 탄성이 일어났다.

레이첼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내 딸이 범인이란 뜻은 아니지. 누군가 내 딸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그 손수건을 훔쳐다가 떨어뜨린 걸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게 말하고 나니, 자신의 말이 진실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누가 빅토리아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걸까?

생각나는 이름은 하나였다.

‘아리아나. 아리아나. 아리아나!’

아리아나가 어떻게 저 사내를 죽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빅토리아의 손수건을 손에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어떻게 시기적절하게 수사청장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모든 걸 아리아나가 해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키워서 멍청하게 자란 줄 알았다. 실제로도 아리아나는 바보처럼 레이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며 눈치를 보며 살았다.

아둔한 모습 뒤에 이토록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야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 길들이지 못한 맹수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고작 16살이 아니었다. 16살이나 되었다.

북제후는 14살의 나이에 혼란에 빠져 있던 북령을 평정하고 제 발아래에 두었다.

뜻을 품고 독을 가둔 자는 몇 살이 되었든 제 가슴에 숨긴 칼날을 맹렬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아리아나는 레이첼을 향해, 아니, 브론테 가문을 향해 그 칼날을 겨누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러뜨려야지. 무슨 수를 써서든 깨부숴야지.’

레이첼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레이첼은 서늘한 눈빛을 애써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가문의 흠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아무래도 우리 둘째 딸이 좋지 않은 생각을 한 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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