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너도 느껴봐, 절망. (1) (22/238)


(22) 너도 느껴봐, 절망. (1)
2023.03.24.


빅토리아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귀부인이 말했다.

“막내 공녀가 함께 산책을 해도 괜찮을 텐데요.”

레이첼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우리 부인들끼리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 어린 것이 끼면 방해만 될 뿐이지요.”

“하지만 이 댁 막내 공녀님은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럽지 않나요? 막내 공녀님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답니다.”

레이첼의 귀에는 귀부인의 칭찬이 들어오지 않았다.

‘빅토리아가 왜 여기에 있던 거지?’

오늘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헬레나라면 모를까, 빅토리아는 영리한 아이니 레이첼의 명을 어길 리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레이첼은 멀어지는 빅토리아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고개를 돌려서 넌지시 눈짓이라도 할 텐데, 그냥 돌아가는 걸 보니 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아직 애는 애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했던 거겠지.’

중요한 일을 앞둔 마당에 빅토리아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번 티파티에 초대한 귀부인은 10명으로, 그중에는 제국의 케티레언 백작 부인도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참에, 오늘의 사건을 목격하고 제국 귀부인들에게 소문이라도 흘리게 할 겸 초대한 것이다.

케티레언 백작 부인은 가든파티 때의 사건 때문에 레이첼에게 좋은 마음이 없었으나, 대놓고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아서 레이첼의 초대에 응했다.

레이첼은 케티레언 백작부인이 브론테 저택을 방문한 내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기분도 이제 달라질 거야.’

하얀 천을 드리운 파고라가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복잡미묘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로 아리아나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

서령 여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탕아인 라운더. 그와 은밀히 만나 미약을 마시고 뒹구는 아리아나.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이 외간 남자와 단둘이 있는 장면을 들켜도 혼삿길을 막히는 판에, 저택 숲으로 사내를 끌어들여 뒹군 아리아나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가든파티 때 벌어진 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것이고, 파고라 안에서 벌어진 일의 목격담만이 남게 되리라.

동제후의 딸이라는 출신을 내세워서 제멋대로 구는 아리아나. 어머니인 레이첼의 말도 무시하던 아리아나. 자매들에게 멋대로 구는 아리아나. 가족들을 난처하기 위해 가든파티에서 학대당한 척한 아리아나. 사내에 미쳐 저택까지 거리의 탕아를 끌어들인 아리아나.

무슨 수를 써도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아리아나에게 새겨지리라.

파고라가 가까워지자 레이첼이 말했다.

“잠시 쉬었다가 갈까요? 쌀쌀하기는 해도 저기에서 보는 겨울 연못이 일품이랍니다.”

파고라 안쪽은 조용했다. 얇고 하얀 천에 비치는 그림자도 없었지만, 레이첼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행위가 끝난 후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레이첼은 남몰래 심호흡을 한 뒤에 천을 걷어냈다.

“어머, 이게……!”

안의 상황을 확인하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려던 레이첼은, 소파에 아무도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옆에 서 있던 귀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조용한 겨울 숲이 들썩거릴 정도로 커다란 비명.

귀부인의 어깨너머로 파고라 안쪽을 확인한 다른 귀부인들도 비명을 질러댔고, 두 명은 새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다가 기절했다.

그제야 레이첼도 ‘그것’을 발견했다.

기이한 형태로 목이 꺾여 쓰러져 있는 남자.

레이첼은 멍하게 그것을 응시했다.

‘이게 뭐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하는 바람에 머릿속이 멍했다.

‘이게 뭐야? 왜…… 왜 이 남자가 이러고 있지? 왜 저렇게 흉물스럽게…… 저러고 누워 있는 거지?’

시체라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자신이 불러들인 사내가 시체가 되어 발견될 이유는 없으니까.

두 눈을 꿈뻑거리던 레이첼의 귀에 케티레언 백작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불쌍하기도 해라.”

레이첼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실패했다.

라운더가 저렇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첼이 의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계가 삼엄한 브론테 공작저택의 숲에서 한 남자가 죽었고, 그것을 귀부인들이 목격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용해야만 한다.

레이첼은 큰 충격을 받은 듯이 중얼거렸다.

“아, 아리아나가……. 어째서…… 왜……?”

그러다가 말실수를 했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옆에 있던 케티레언 백작부인이 그 말을 들었다.

“아리아나라면…… 둘째 공녀님 말인가요? 둘째 공녀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죠? 저 사내와 둘째 공녀님 사이에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지요, 백작부인.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분명 공작부인께서 둘째 공녀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잘못 들은 거예요.”

레이첼은 제 딸을 감싸려는 어머니를 충실하게 연기했다.

케티레언 백작부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의심 가득한 눈으로 레이첼의 얼굴을 살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의심은 싹텄어. 말 많은 부인들이니 이제부터 알아서 추측하고 소문을 퍼뜨리겠지. 저 남자가 왜 죽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어.’

이제 귀부인들을 돌려보낼 차례다. 더 오래 두었다가는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오늘 갑자기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해서 미안해요. 수사청에 사람도 보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오늘 자리는 여기서 마무리해야겠어요.”

몇몇 귀부인은 남아서 이게 무슨 일인지 계속 지켜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주인이 축객령을 내리는데 버틸 수는 없었다.

귀부인들이 느릿느릿하게 그곳을 벗어날 준비를 하는데,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숲길로 말을 탄 세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수사관 제복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은 레이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수사관들이 여기엔 왜 온 거지?’

부른 적도 없는 수사관들이, 마치 이곳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졌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찾아왔다는 점이 이상했다.

레이첼은 당혹감을 감추고 옅은 미소를 띠며 수사관들에게 다가갔다.

수사관들이 말에서 내려 레이첼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레이첼이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브론테 공작저택으로 수상한 남자가 침입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여, 여기요! 여기 시체가 있어요!”

레이첼은 다음 수를 생각할 때까지 시간을 벌 생각이었는데, 귀부인 한 명이 비명처럼 외쳤다. ‘시체’라는 말에 수사관들이 표정을 바꾸고 파고라를 향해 달려갔다.

레이첼은 주먹을 꽉 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레이첼이 계획한 일인데, 그녀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레이첼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돌아섰다.

수사관들은 신속하게 파고라 내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수사관의 등장으로 멈춘 귀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사관이 조사하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여러분은 돌아가시는 게…….”

“안 됩니다, 공작부인.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수사가 끝날 때까지 다들 이곳에 남아 주십시오.”

레이첼의 목소리를 들은 수사관이 외쳤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 때문에 레이첼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라운더가 죽은 채로 발견된 이유라도 알면 이 답답함도 조금은 가실 텐데.

‘아리아나가 죽였나?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아리아나가 어떻게 저렇게 목을 꺾어서 죽여? 아니지, 몸싸움을 하다가 잘못 넘어져서 저렇게 죽은 걸지도…….’

아리아나의 힘으로 건장한 사내를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을지 의문스럽긴 했지만, 그녀가 아니면 라운더를 저리 만들 사람이 없었다.

문제는 수사관들이 이 파고라에 아리아나가 왔다가 갔다는 걸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떻게든 은근하게 아리아나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고자질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아리아나를 감싸주듯이 알릴 만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때, 시신을 확인하던 수사관이 말했다.

“청장님, 이거 단도로 가슴을 찔려서 죽은 것 같네요. 넘어지다가 목이 꺾인 것처럼 보이고.”

‘청장님’이라는 단어에 레이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사관청의 청장은 제국 소속으로 서제후의 입김에서 벗어난 자였다. 브론테 공작가문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서 조용히 넘어갈 리 없다는 의미였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이야. 아리아나의 짓이라는 것만 알게 되면, 내가 아무리 말리고 부탁해도 법대로 처리하겠지. 그럼 하녀를 불러서 아리아나의 이름을 언급하게 하면…….’

레이첼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청장님! 여기 여성용 손수건이 떨어져 있습니다!”

수사관이 외쳤다.

지켜보던 귀부인들이 숨을 들이마셨고, 레이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누구 손수건이지? 아리아나는 손수건이 없는데…….’

수사청장이 손수건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레이첼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빛나는 걸 보며, 레이첼은 숨을 삼켰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간신히 미소짓고 있는 입꼬리가 경직되어 바르르 떨렸다.

귀부인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 수사청장과 레이첼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윽고 수사청장이 말했다.

“이 손수건에 빅토리아 브론테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댁의 막내 공녀님 성함이죠?”

레이첼의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

아리아나는 본채로 돌아가던 길에 피 묻은 단도의 손잡이를 닦아낸 후 수풀 사이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화장을 지운 후, 원래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는 아리아나의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서렸다.

‘시신을 발견했으니 한동안 소동이 일어나겠지. 함께 간 귀부인들에게 이런저런 연기를 펼치고 돌려보내야 할 테니 적어도 30분은 시간이 있어.’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수사관을 불러들였다는 걸 모르기에, 30분 정도의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오늘 반드시 그걸 손에 넣어야 해.’

레이첼과 서제후의 약점이면서, 동제후에게 몸을 의탁할 무기가 될 증거물.

레이첼은 동제후와 결혼해서 동령에 있을 때, 아버지인 서제후와 은밀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제후는 서신을 읽자마자 태우라고 했지만, 레이첼은 언젠가 필요한 순간을 위해 몇 장을 남겨두었다.

아리아나가 20살 때쯤, 또 서제후에게 이용당할 위기에 처한 레이첼은 그 편지를 이용해서 서제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편지 한 장을 내 손에 들려서 서제후에게 보냈지. 서제후의 분노가 내게 쏟아지도록.’

레이첼은 아리아나의 앞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 편지를 들고 서제후를 찾아가서 레이첼의 말을 전한 아리아나는, 서제후에게 매를 맞고 한동안 로젠성에 갇혀 있었다.

서제후는 손이 닿지 않는 제 딸을 향한 분노를 오롯이 아리아나에게 풀었다.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방에 불러들여 치장해줬을 때부터, 아리아나는 그녀가 무엇을 꾸몄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잘 모면한다면, 반드시 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서둘러야 한다. 반드시 그 편지들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이제 그 편지들은 내 거야.’

레이첼의 방문을 여는 아리아나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이제 그 편지들은 당신이 아닌, 내 자유를 위해 쓰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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