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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레이첼의 계략 (7) (21/238)


(21) 레이첼의 계략 (7)
2023.03.23.


“거기 멈춰.”

아리아나의 차가운 명령에, 막 들어오던 남자가 우뚝 멈췄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반반한 얼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아리아나는 속으로 냉소를 머금었다.

아리아나는 저 사내를 알고 있다.

어느 백작가의 순진한 영애를 임신시켜 결혼에 성공한 질 나쁜 사내 라운더. 신분 상승을 했어도 그의 기질은 변하지 않아서, 많은 귀부인을 희롱하고 다녔다.

아리아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작은 파티에서 마주칠 때마다 아리아나에게 접근했고, 그걸 본 남편 잉고우 알프레히 자작은 아리아나가 바람을 피운다고 오해해서 저택에 돌아오면 폭행을 하곤 했다.

남편에게 맞을 때마다 아리아나는 라운더를 원망했다.

왜 내게 말을 걸어서. 왜 내게 웃어줘서. 왜 내게 친절을 베풀어서.

그 사내를 이런 시기에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 삶에서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라운더가 아리아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호감을 느낄 만한 미소였다.

“둘째 공녀님.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 걸음 다가오는 라운더.

“멈추라고 했어.”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요.”

또 한 걸음 다가오는 라운더.

“아무래도 받은 게 있어서.”

아리아나가 단도를 꺼내는 것과 라운더가 아리아나의 팔을 잡아서 끌어당기는 건 거의 동시였다.

라운더는 능숙하게 아리아나를 뒤로 돌려 허리를 끌어안았고, 아리아나는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을 단도로 찔렀다.

“윽!”

하지만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라운더는 신음만 흘렸을 뿐, 아리아나를 놔주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감은 왼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아리아나는 단도를 뽑아서 한 번 더 내리찍으려 했지만.

“이런…… 무서운 걸 갖고 다니시네.”

라운더가 오른손으로 아리아나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아리아나는 단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줬다.

“힘 빼지 말고 그냥 놔요. 둘째 공녀님이 절 이길 일은 없으니까. 제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본 줄 알아요?”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나도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야.’

아리아나는 발을 들어 라운더의 발등을 세게 밟았다.

“윽!”

라운더가 신음만 흘릴 뿐, 타격을 크게 입은 것 같지 않기에 콱, 콱, 연달아 밟았다. 한 곳에 집요하게 쏟아지는 공격을 견디기 힘든지, 라운더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 순간, 아리아나는 도망치는 대신 몸을 휙 돌렸다.

도망치면 라운더가 다시 팔에 힘을 줘서 아리아나의 허리를 고정시켰겠지만, 아예 라운더를 향해 돌아서는 건 그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된 아리아나는 거침없이 무릎을 들어 올렸다.

아리아나의 무릎이 그의 급소를 가격했다.

“어헉!”

이번 공격은 닳고 닳은 라운더도 버티지 못했다.

라운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아리아나를 집어던지듯 놔주고 허리를 굽혔다.

아리아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단도를 두 손으로 꽉 쥔 채 라운더를 노려봤다. 라운더는 상체를 굽힌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네게 얼마를 약속했지?”

이런 상황에서 차분한 목소리에, 라운더가 고개만 들어서 아리아나를 쳐다봤다.

아리아나는 사내에게 거친 짓을 당한 여인답지 않게 흐트러짐 하나 없이 라운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6골드.”

라운더의 대답에 아리아나는 기가 막혔다.

고작 6골드라니. 나에 대한 대가가 고작 6골드에 거래되다니.

‘정말 불쌍하구나, 아리아나.’

심장이 서늘하게 식었다.

고작 6골드에 제 딸을 팔아넘기는 레이첼에게, 이제 모래알 같은 기대도 남지 않았다.

“여기서 조용히 사라진다면 그 두 배를 주지.”

이제 통증이 가신 듯, 라운더가 허리를 폈다. 라운더는 거래를 제안하는 아리아나가 재미있다는 듯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둘째 공녀님한테 그럴 돈이 있어요?”

“있어. 충분히.”

“하, 두 배면 12골드인데…….”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여기서 내게 몹쓸 짓을 한다면, 너는 무사히 돌아갈 수 없을걸.”

“글쎄요. 여차하면 둘째 공녀님의 남편이 될 수도 있겠죠. 하자 있는 둘째 공녀님을 받아줄 귀족은 없을 테니까요.”

“꿈이 크구나. 네가 브론테 공작가의 둘째 공녀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니?”

“모를 일이죠. 가능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라운더가 다시 아리아나를 덮쳐왔다. 아리아나는 단도를 휘둘렀지만, 라운더는 가볍게 피하고 손날로 아리아나의 손목을 후려쳤다.

챙그랑-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라운더는 아리아나를 그대로 밀어붙여, 파고라 안에 있는 소파에 눕혔다. 아리아나의 위에 올라탄 라운더가 그녀의 목을 살며시 움켜쥐고 속삭였다.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고 하면 결혼시켜야지, 별수 있겠어요?”

“너는 죽을 거야.”

“아니요. 난 안 죽어요. 지금껏 살아 있는 걸 보면 모르겠어요?”

“아니, 넌 죽을 거야. 나는 여느 귀부인과도 영애들과도 다르니까.”

“같아요.”

라운더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축축한 숨결이 아리아나의 코끝을 스쳤다.

“아니, 좀 더 못한가?”

“…….”

“우리 같은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보다 소문에 빠르거든요.”

라운더의 손이 아리아나의 목을 다정하게 문질렀다.

“브론테 가문의 둘째 공녀님이 하녀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알 만한 놈들은 다 알죠.”

“그래서 나 같은 것과 결혼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라운더가 미소 지었다.

“네, 그것도 그런데……. 저는 둘째 공녀님이 마음에 드네요. 들은 것보다 훨씬 예쁘고 어른스럽고 훨씬 당차요. 이런 상황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는 공녀님이 처음이에요. 어이쿠. 하지 마요.”

기회를 보던 아리아나가 무릎을 들어서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라운더가 제 허벅지로 아리아나의 다리를 찍어눌렀다.

“두 번은 안 당해요, 공녀님.”

여인의 몸으로 사내를 이기기는 힘들다는 걸, 아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기를 갖고 있는데도 이기기 힘들구나.’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바싹 마른 소녀의 몸으로 사내를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아리아나 역시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다만 라운더가 생각보다 멍청한 게 문제였다.

라운더는 아리아나와 결혼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자마자 입막음을 위해 죽임당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저택 안에서는 딸 취급을 못 받는다고 해도, 어찌 되었든 서제후의 핏줄이었다. 서제후가 제 손녀를 더럽힌 사내를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설득은 꿈에 부푼 이 사내에게 통하지 않으리라.

아리아나는 다음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무리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사내라도 혀를 잘린 적은 없겠지.

아리아나가 눈을 감고 반항을 멈추자, 라운더는 그녀가 제 처지를 받아들였다고 여긴 듯 경계심 없이 그녀의 얼굴로 몸을 숙였다.

아리아나는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그려보며 라운더의 입술이 닿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몸 위가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으앗! 넌 뭐야?”

소파 옆에서 라운더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리아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화가 난 듯한 사이러스가 라운더의 목덜미를 잡고 서 있었다.

라운더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사이러스는 크게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라운더를 제압하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월등한 힘의 차이가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강했더라면.

“이 사내의 입술이 탐난 건가, 아니면 입술을 내어주고 그다음을 노린 건가?”

“이거 놔!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공작부인의 청을 받고 와 있는 거다! 날 이런 식으로 대하면 무사하지 못할 텐데!”

목이 붙들려서 사이러스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라운더는, 사이러스를 이 저택의 기사 정도로 착각하는 듯했다.

라운더의 목소리가 사이러스의 나직한 음성을 방해하자, 사이러스는 성가신 듯 두 손을 움직였다.

우둑-!

단 한 번이었다.

힘들이지도 않은 그 한 번의 동작으로 라운더는 기이하게 목이 비틀린 채 움직임을 멈췄다.

아리아나는 몹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켰다.

사이러스는 숨이 끊어진 라운더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한 사람을 죽이고서도 사이러스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손을 씻거나 식사를 하는 등의 행위를 끝낸 듯 담담했다.

“죽은 건가요?”

“그래. 무서운가?”

무섭다고 해서 사이러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리아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라운더의 시신을 발로 툭 찼다. 라운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 죽었군요.”

“역시 그대는 날 즐겁게 하는군. 보통의 여인이라면 이런 장면 이후에 까무러치던데.”

“제게 해코지하려던 사내가 죽었는데 까무러칠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이러스는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 손잡이를 아리아나 쪽으로 돌려서 건넸다.

“이런 걸로 건장한 사내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언제나 다음 수에 또 다음 수를 생각해두는 법이지요.”

“그게 그대의 입술을 더럽히는 수라고 해도?”

“타인을 진창에 끌어들이려는 자가, 제 몸에 튈 진창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저 대신 진창에 발을 담가주시어 감사합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이러스는 가만히 아리아나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그만 가봐야지요. 오늘은 제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리아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언젠가 사용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지니고 다니던 손수건이었다.

아리아나는 그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사이러스가 왜 이런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 정말로 ‘돕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 손수건을 치우지 않으리라.

아리아나가 아무 설명도 없이 떠난 후, 사이러스는 그녀가 두고 간 것을 확인했다.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한 사이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아.”

그의 부름에 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빠르게 수사청에 가서 수사관을 이쪽으로 보내도록. 수사관은 제국 출신으로.”

각 령의 관청에는 제국에서 보낸 책임자들이 한두 명씩 있었다.

수사관이 서령 사람이라면 서제후의 입김이 닿아서 이 사건을 조용히 무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국 사람에게는 서제후의 입김도 통하지 않으리라.

노아가 짧게 대답하고 사라지자, 사이러스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라운더의 가슴을 두어 번 찌른 후 모습을 감췄다.

+++

빅토리아는 서둘러 숲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까 방문 아래로 밀어 넣어진 편지 때문이었다.

[빅토리아.

아리아나 건으로 네 도움이 필요하니 숲 중앙 연못의 파고라로 와다오.

편지는 읽는 대로 태워버리고.

-레이첼-]

오늘 나오지 말라고 했던 레이첼이 갑자기 부르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수상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헬레나가 일을 망칠까 봐 방에 있으라고 한 다음에 빅토리아만 은밀하게 불러낸 걸지도 모른다.

파고라를 향해서 걸어가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레이첼과 귀부인들의 목소리.

빅토리아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귀부인들과 함께 파고라를 향하던 레이첼은 갑자기 나타난 빅토리아를 보고 깜짝 놀란 듯했다.

“빅토리아?”

“어머니, 저…….”

“네가 왜 여기 있니? 얼른 방에 들어가 있어.”

레이첼의 태도에 빅토리아는 당황했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온 건데…….’

어쩌면 이게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네, 어머니.”

빅토리아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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