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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레이첼의 계략 (6) (20/238)


(20) 레이첼의 계략 (6)
2023.03.22.


티파티에 초대받은 귀부인들이 도착하기 전, 레이첼은 하녀를 시켜서 아리아나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오늘 벌어질 일은 헬레나와 빅토리아 같은 어린 영애들이 봐서 좋을 게 없기에, 귀부인들만 초대했다. 말 많고 발 넓은 귀부인들도 몇 명 초대했으니, 아주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브론테 가문에도 약간의 타격이 있긴 하겠지만, 아리아나를 학대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리아나가 수도에 가서 무슨 짓을 할지도 알 수 없고.’

레이첼은 더 이상 아리아나를 순진하고 멍청한 아이로 생각할 수 없었다.

가든파티 때의 일은 우연히 그리된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나는 하나하나 생각하고 주도해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끌어갔다.

동제후와 똑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던 아리아나를 떠올리면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적어도 결혼 가능한 나이가 될 때까지는 데리고 있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아리아나가 속에 칼을 품었다면, 헬레나와 빅토리아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그 날개를 꺾어, 이 저택에서 치워버려야만 한다.

돈을 받고 사내를 상대하는 여자들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같은 일을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오늘 오후 연못 옆에 있는 파고라에 있을 남자는 바로 그러한 사내였다.

레이첼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출중한 외모 덕에 귀부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레이첼이 귀부인들과 티타임을 즐기다가 잠시 산책을 하려고 파고라에 향할 때, 그 사내와 아리아나는 파고라 안에서 향락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귀부인들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리아나가 사내와 뒹구는 장면을 목격할 것이고, 또 어떤 귀부인은 자신의 애인과 함께 있는 아리아나의 모습에 경악할 것이다.

‘나는 기절하는 게 좋겠지.’

귀부인들에게 입단속을 시키는 시늉을 하지 않으려면, 일단은 기절하는 척하는 게 좋았다.

그러면 귀부인들은 브론테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이 사실을 여기저기에 떠들고 다니기 시작하리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브론테 공작부인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리아나의 일은 못 본 걸로 해달라고 부탁해도, 이미 소문이 나버린 후니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사내를 저택 안까지 들여서 즐기는 방탕한 둘째 공녀. 그런 공녀를 감싸주기 위해 몸소 돌아다니며 애원하는 불쌍한 공작부인.

‘아리아나, 네가 아무리 속에 독을 품었다 해도 아직은 어려.’

오늘 일로 가든파티에서의 일은 잊히고, 아리아나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때문에 브론테 가문의 이름이 조금은 흔들릴지도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아리아나는 동제후인 러셀 화이트의 딸이기도 했다.

부모의 학대보다는 여성의 몸가짐이 더 문제가 되는 세상이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란 헬레나와 빅토리아와 달리, 아리아나는 배우려 들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가든파티에서도 그런 거짓말로 가족들을 난처하게 만든다고 눈물을 좀 흘린다면.

‘비난의 화살은 화이트의 혈통을 향하게 될 거야.’

+++

레이첼의 하녀가 아리아나를 부르러 왔다.

“채비하고 나갈 테니 복도에서 기다리렴.”

아리아나는 하녀를 내보내고 나서 침대 아래에 감춰둔 단도를 꺼냈다. 화려한 검집을 벗겨내자 날카로운 날붙이가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검지로 검날을 살짝 스치자마자 얕은 상처가 생겨서 피가 맺혔다.

손가락 끝에 맺힌 핏방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쓸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아리아나는 단도를 원피스 안에 잘 감추고 방을 나섰다.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들어가자 몸소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녀는 아리아나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그리 입으니 예쁘구나.”

“어머니께서 살펴주신 덕분이에요.”

“어제 시내에 나갔다가 좋은 분을 사 왔단다. 화장을 좀 해보지 않을래?”

“저는 화장을 할 줄 몰라서요.”

“내가 해주마. 이리 앉으렴.”

레이첼은 아리아나를 화장대 앞에 앉히고 직접 화장품을 가져다가 화장을 해주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아리아나의 볼과 눈가에, 레이첼의 따뜻한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생의 아리아나가, 그 애처로운 아리아나가 몹시도 원했던 일. 그걸 이번 생에 이루게 되었으나, 레이첼의 손길에 진심이 없다는 걸 알기에 가슴이 아렸다.

어머니가 나이가 찬 딸에게 첫 화장을 해주는 건, 평민 출신의 여인들도 누리는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아리아나에게는 이 순간이 조금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닿는 손길마다 차갑고 예리한 칼날을 품은 것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북제후의 차가운 체온이 더 따뜻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리아나는 살며시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마치 돈으로 사고파는 여인처럼 천박하게 변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쁘구나. 그렇지?”

“네, 어머니. 정말 예뻐요.”

“네게 잘 어울릴 줄 알았단다. 나중에 하녀를 시켜서 이 화장품을 보내놓으마.”

“감사해요, 어머니. 이리 귀한 걸 주시다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레이첼이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레이첼은 뜸을 들였다.

“어제 나가서 네게 어울릴 만한 목걸이와 팔찌를 사 왔는데, 마음에 드는지 살펴보렴.”

레이첼은 서랍에서 비단으로 씌운 상자를 꺼냈다.

자줏빛 상자 안에는 눈부시게 화려한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네 눈동자 색과 같은 사파이어로 했어. 마음에 드니?”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제 딸을 몹시도 아끼는 어머니의 말투였다.

이게 진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리아나는 아직도 제 안에 부질없는 기대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어머니의 이 다정함이, 이 마음씀씀이가 전부 진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칼날을 의심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평범한 모녀처럼 고마운 일에 고맙다 말하고, 좋은 일에 좋다 말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모래처럼 흩날리는 소망을 흩어버리고, 아리아나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작고 어여쁜 얼굴에 감정 없는 미소가 그림처럼 새겨졌다.

“정말 아름다워요, 어머니. 제가 이런 귀한 걸 가져도 될까요?”

“그럼. 우리 아리아나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온 건데. 이리 오렴, 내가 해줄 테니.”

레이첼이 직접 장신구를 꺼내서 아리아나에게 채워주는 동안, 잠시 흩날렸던 서글픈 소망이 깨끗이 사라졌다.

레이첼은 아리아나를 거울 앞에 세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한, 졸부의 딸 같은 모양새의 여자가 거울 안에 있었다.

화장은 너무 짙었고, 그에 비해 원피스는 유행이 지나서 촌스러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거리에서 사내를 유혹하는 천박한 여인 같았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밝게 웃었다.

“제가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예뻐요, 어머니.”

“그래, 네게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네가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쁘구나.”

“이렇게 하고 파티에 가면 황후 폐하께서도 어여삐 보아주시겠죠?”

“물론이지. 드레스까지 갖춰 입는다면 모든 사내가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할 거야.”

“얼른 수도에 가고 싶어요. 황실 파티가 정말 기대돼요.”

“그래, 나도 정말 기대되는구나.”

웃으며 다정하게 대화하는 두 모녀의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첼이 아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

“네, 어머니.”

“숲 중앙 연못 옆에 파고라가 하나 있는 거 알지?”

“네, 알아요.”

“내가 어제 거기에 들렀다가 목걸이를 놓고 왔지, 뭐니. 하녀들에게 가져오라고 시킬까 했는데, 요새 손버릇이 나쁜 애들이 있어서……. 네가 좀 가져다줄래?”

“네, 어머니. 그럴게요.”

“값비싼 물건이니 꼭 네가 가져와야 한다. 알겠지?”

“네.”

레이첼의 당부를 받으며 방에서 나온 아리아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리아나는 차디찬 눈으로 앞을 보며 걸었다.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위해 안배해둔 지옥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었다.

+++

레이첼은 복도에 멈춰서 창밖을 내다봤다.

의심 없이 숲을 향해 걸어가는 아리아나를 보자 아주 잠깐 죄책감이 들었다.

저 애도 그저 태어났을 뿐, 죄가 없거늘.

하지만 동제후와 닮은 아리아나의 눈동자를 떠올리자, 한 조각 떠올랐던 죄책감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고독과 설움으로 점철된 동령에서의 나날이 여전히 생생했다.

아버지 서제후의 지시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갓 낳은 딸을 두고 향한 동령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레이첼에게는 피가 얼 정도로 춥게만 느껴졌다.

서제후의 딸이라는 이유로 의심에 찬 시선을 보내는 동제후와 그의 가족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동령의 분위기.

레이첼이 임신했을 때조차 동제후는 다정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동제후의 반응은 냉담한 감탄사가 전부였다.

-“오.”

하늘을 닮은 그의 푸른 눈동자는 임신 사실조차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하는 듯 예리하게 빛났다.

그 당시 레이첼은 마음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동제후나 그의 가족들이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지금과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다 지난 일이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않는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확신한 이후, 레이첼은 제 몸 안에 들어있는 아이가 기생충처럼 느껴졌다.

단 한순간도 아리아나를 제 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태어난 아이가 자신이 아닌 동제후를 닮았다는 걸 알게 된 다음에는 더 그랬다.

내 딸이 아닌 동제후의 딸. 그 냉혹하고 무심한 사내의 딸.

레이첼은 숲으로 접어드는 아리아나에게서 눈을 돌렸다.

저 아이의 죄라면 동제후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 배 속에 있을 때 그토록 죽이려 했건만, 결국은 살아남아 세상의 빛을 보았다는 것.

‘아무도 널 환영하지 않았어, 아리아나. 그러니 딴생각은 품지 말았어야지. 지금까지처럼 순종적으로 지냈다면, 때가 되었을 때 알아서 좋은 가문에 시집을 보내줬을 텐데.’

+++

아리아나는 숲길을 걸었다.

예전에 아리아나는 이 숲을 좋아했다.

흙냄새, 나무 냄새, 땅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 흙을 밟을 때마다 자박자박 울리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소리와 작은 들짐승이 돌아다니는 소리. 풀이 스치는 소리.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 브론테 가문에, 아니, 이 서령에 있는 그 무엇도 좋지 않다.

아리아나는 똑바로 앞만 보면서 걸었다. 작은 주먹을 꽉 쥐고 무표정하게 그저 걸었다.

대여섯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파고라에는 하얀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리아나는 하얀 천을 걷어냈다.

파고라 안의 테이블 위에는 찻주전자 하나와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찻잔에서는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이 안에서 함께 차를 마신 것처럼.

그리고 파고라 안을 채운 은은한 미약의 향기. 뒤에서 다가오는 작은 발걸음 소리. 파고라의 천을 걷어내는 소리.

아리아나는 품에 넣어뒀던 단도를 움켜쥐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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