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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레이첼의 계략 (5) (19/238)


(19) 레이첼의 계략 (5)
2023.03.21.


레이첼의 하녀들이 아리아나의 방으로 옷을 가져왔다. 헬레나가 입다가 작아져서 창고에 넣어두었던 옷들이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원피스를 갈아입은 후, 레이첼이 시키는 대로 응접실로 향했다.

브론테 공작 저택의 응접실에 청소가 아닌 다른 이유로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빅토리아가 아리아나를 보자,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니, 이리로 와.”

헬레나는 빅토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비쭉거렸지만, 대놓고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헬레나가 한사코 제 성질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그녀의 입까지 다물게 할 만한 속셈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리아나는 편안한 표정으로 소파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헬레나는 아리아나가 빅토리아 옆에 앉아도 못마땅하게 노려봤을 뿐, 금방 빅토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도로 떠나기 전에 북제후 전하께서 서령에 도착하면 좋겠어. 그럼 함께 수도로 향할 수도 있을 텐데.”

빅토리아가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헬레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무슨 일로 서령에 오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시는 거겠지? 그럼 당연히 우리 브론테 저택에도 들를 거고. 다른 가문 여자애들이 정말 부러워할 거야. 북제후 전하가 아무 가문에나 찾아가진 않을 테니까.”

헬레나는 소문의 북제후가 서령에 찾아오면, 당연히 브론테 공작의 딸들을 만나러 올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리아나가 북제후와의 자리에 초대받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헬레나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아는 아리아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북제후가 이미 이 저택에 들어와 있고, 나랑 몇 번이나 마주쳤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리아나는 과하게 아름다운 사이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그스름한 눈가와 새빨간 눈동자는 위험스러운 퇴폐미가 흘렀고,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은 색기가 묻어나왔다.

달빛처럼 싸늘한 은발 아래의 얼굴은 숨이 막히게 근사했지만, 눈 안에 담긴 냉혹함은 소름이 돋을 만큼 날카로웠다.

헬레나가 사이러스 앞에 서면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들 있었구나.”

레이첼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응접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그녀는 아리아나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아나,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보기 좋네. 앞으로도 제대로 복장을 갖추도록 해. 알겠니?”

마치 지금까지 아리아나가 원해서 하녀복을 입고 돌아다녔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리아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어머니.”

“곧 재단사가 올 거야. 아리아나, 너는 올해 사교 시즌을 위해서 준비할 것이 많겠어. 3월 중순이 지나면 수도로 출발할 테니, 그때까지 네 언니에게 귀족 영애로서의 교양을 배우도록 하렴. 알겠니?”

“네, 어머니.”

고분고분한 아리아나를 보며 레이첼은 흡족한 듯 웃었다. 아리아나는 제 어머니의 미소가 뱀처럼 축축하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옛날의 나라면 저 여자의 상냥함이 기뻐서 바보처럼 웃었겠지.’

제 어머니가 친절할수록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씁쓸했다. 아리아나는 가슴에 이는 메마른 바람을 옅은 미소로 지워냈다.

“황후 폐하께서 언니를 마음에 들어하실 거야. 언니는 정말 예쁘잖아.”

빅토리아가 아리아나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놓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헬레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을, 아리아나는 똑똑히 보았다.

“응, 고마워. 하지만 나보다는 헬레나 아가씨께서 훨씬 눈에 띄시겠지.”

아리아나의 말에 헬레나가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첼은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헬레나를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곧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리아나, 헬레나 아가씨라니. 네 언니잖니. 어디 가서 또 아가씨 타령하지 말고 언니라고 다정하게 부르렴.”

“네, 어머니.”

“헬레나, 너도 네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알겠어요.”

이윽고 재단사가 조수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서령에서 가장 유명한 재단사였다.

조수들이 딸들의 치수를 재는 동안, 레이첼은 재단사가 샘플로 가져온 옷감들과 카탈로그를 확인했다.

“큰 애 것은 이거랑 이거로 하고, 둘째 애 것은 이거, 이거, 셋째 것은 이거랑 이거로 해주게.”

레이첼이 옷감과 디자인을 고르자 재단사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말했다.

“첫째와 막내 공녀님 것은 두 분 공녀님께 잘 어울리겠으나, 둘째 공녀님 것은 나이에 비해 너무 노숙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 둘째는 어른스러운 면이 있으니 이 색이 잘 받을 거네. 자네보다 어미인 내가 잘 알지 않겠나.”

“물론 그렇지요.”

재단사는 레이첼의 비위를 맞추듯 대답하며, 치수를 재는 세 명의 공녀를 돌아봤다.

갈색 머리칼의 헬레나와 하늘색 머리의 아리아나, 그리고 어두운 금발의 빅토리아. 브론테의 세 공녀는 미모가 출중했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건 아리아나였다.

유행과 소문에 민감한 재단사는 브론테 공작 가문의 둘째 공녀에 관한 소문도 들었다. 얼마 전 찾아온 귀부인과 영애들이 브론테 공작가 가든파티에서 벌어진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었다.

-“어찌나 안쓰럽던지…….”

-“공작부인 뒤에 서제후 전하만 없었더라도 그 일을 관청에 고발했을 거예요.”

-“둘째 공녀는 예의범절도 하나도 배우지 못해서 짐승 같더라고요. 전부 그런 부모를 둔 탓이겠죠.”

재단사는 둘째 공녀가 정말 짐승 같은 소녀일 줄 알았다.

오래전 신문에 산속에서 늑대에게 키워진 아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는데, 그 아이처럼 배운 것 없이 야생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역시 소문은 반쯤 걸러서 들어야 해.’

실제로 본 아리아나에게서는 소문과 같은 면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키가 큰 편인 두 딸과 달리 아리아나의 체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흘러나오는 기세는 그녀를 이 응접실 안에서 가장 커 보이게 했다.

단정한 자세와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흠잡을 만한 곳이 전혀 없었고, 조용하고 나긋한 움직임은 마치 나비 같았다.

서령에서 가장 유명한 재단사로 지내며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을 상대해왔지만, 아리아나처럼 고고한 기품을 머금은 영애는 처음이었다.

유행이 지난 원피스조차도 아리아나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지 못했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하늘색 머리칼은 태양을 머금은 봄날의 하늘처럼 맑았고, 피부는 값진 진주 같았으며 눈동자는 값비싼 사파이어 같았다.

‘인형 같은 분이시네.’

그 얼굴도, 행동거지도 신이 직접 만들어 조종하는 인형처럼 완벽했다. 그래서 도리어 섬뜩함이 느껴졌다.

신분이 높은 귀족의 자제일수록 잘 배워서 또래보다 성숙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리아나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재단사는 많은 사람을 상대해온 만큼 아리아나가 지닌 품격을 더욱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예의범절을 하나도 못 배웠다는 영애가 저런 기품을 가질 수 있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재단사가 감히 짐작조차 못 할 내막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재단사는 영리했기에 그 의문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치수를 잰 후에 돌아갔다.

재단사가 떠난 후, 레이첼은 하녀를 시켜서 티와 쿠키를 가져오게 했다. 아리아나는 어머니, 자매들과 함께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티타임을 즐기는 영광까지 누릴 수 있었다.

“내일은 가까운 곳에 사는 귀부인들을 불러서 티파티를 열 거란다. 부인들끼리 시간을 보낼 거니까 너희는 조용히 지내렴. 알겠지?”

아리아나는 레이첼이 내일의 일정을 알려주는 게 이상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네, 어머니.”

“그리고 잠시 후에 장신구 가게와 신발 가게에 가려고 하는데. 아리아나, 너는 어떻게 할래? 같이 갈래?”

레이첼의 목소리에는 거절하라는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아리아나 또한 그들과 함께 나갈 생각이 없었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제 장신구와 신발은 어머니께서 좋은 걸로 골라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마.”

레이첼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응접실을 나와서 방으로 돌아가며 차게 웃었다.

레이첼이 고른 아리아나의 드레스는 옷감은 고급이지만, 디자인은 입고 다니면 창피할 만큼 노숙한 디자인이었다.

노부인들이나 입을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황실 파티에 나선다면, 비웃음을 살 것이 틀림없었다. 여인들은 아리아나가 데뷔탕트에 입고 온 드레스에 대해 두고두고 떠들어댈 것이다.

‘헬레나 옆에 그런 드레스를 입은 내가 서 있으면 더 촌스러워 보이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황후의 가호를 받을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아리아나가 이번 사교 시즌 때 원하는 건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아니었다.

‘수도로 출발하는 3월 중순까지 2주일이 조금 넘게 남았어. 그전에 그걸 손에 넣어야 해.’

동제후의 앞에 섰을 때, 그와 거래할 아리아나의 무기. 서제후와 레이첼의 비밀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

아리아나가 지하 감옥에서 풀려난 후, 아리아나는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었다. 로잘린은 매끼니마다 양질의 식사를 아리아나의 방으로 가져왔다.

레이첼이 티파티를 여는 날 아침에도 로잘린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아리아나는 언제나처럼 쟁반을 내려놓고 나가려는 로잘린을 불러세웠다.

“로잘린.”

“네, 아가씨.”

“네 담당이 뭐니?”

“주로 설거지나 빨래를 하고 있어요. 손이 부족할 때는 청소도 하고요.”

“그래.”

아리아나는 쟁반에 놓인 음식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갓 구운 빵과 진한 수프, 신선한 샐러드와 부드러운 고기조림, 생선튀김과 푸딩까지.

레이첼은 아리아나에게 너무 큰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사교 시즌을 대비해서 아리아나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함은 아닌 것 같았다.

인제 와서 살이 찐다면 어제 치수를 재서 만들기 시작한 드레스가 작아져서 입을 수 없을 테니, 그런 의도였다면 어제 치수를 잴 때 넉넉한 크기로 만들어달라고 말해뒀어야 한다.

‘둘 중 하나겠네. 앞으로 벌일 짓에 대한 죄책감이나 내가 그 드레스를 입을 일이 없거나.’

레이첼이 아리아나에게 죄책감 같은 걸 가질 리 없으니, 아마도 이유는 후자이리라.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어제 레이첼이 굳이 티파티 일정을 언급했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로잘린,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네, 말씀하세요.”

아리아나는 팔지 않고 남겨뒀던 장신구 하나를 꺼내서 로잘린에게 건넸다.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군가 네게 무엇을 묻든, 종일 나와 함께 있었다고 증언해줄 수 있겠니?”

“무슨 일이라 하심은……?”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다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다 해도 보상할 테니, 그때는 이 대화를 없던 걸로 해줘.”

“네, 아가씨. 명심하겠습니다.”

아리아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만약에 내가 공작부인께 불려간다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봐줘. 그리고.”

아리아나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로잘린은 두 손을 모아쥐고 서서 아리아나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아리아나가 로잘린에게 바짝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한 지시였지만, 로잘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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