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레이첼의 계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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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레이첼의 계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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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레이첼의 계략 (4)
2023.03.20.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방을 청소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구석에는 가든파티 때 하녀들이 가져온 장신구 상자도, 서랍 속에 넣어둔 장신구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역시 헬레나와 빅토리아는 자기들이 갖고 있는 장신구에는 관심도 없었다. 특히 유행이 지난 장신구들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다.
장신구 확인을 끝낼 무렵, 하녀가 음식을 가져왔다.
하녀는 커다란 쟁반을 살짝 내려놓고 나가려 했다.
“얘.”
아리아나의 부름에 하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하녀는 붉은 단발머리에 눈꼬리가 내려간, 순진한 외모였는데, 이번에 감옥에 갇힌 하녀들 대신 브론테 가문에서 일을 하게 된 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뭐니?”
“로잘린입니다, 아가씨.”
하녀의 고분고분한 태도로 보아, 아리아나의 처지를 잘 모르는 듯했다. 마침 이런 하녀가 필요하던 참이다.
“내가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레이첼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써는 하녀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저택 밖에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세요, 아가씨.”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저택을 나가서 행상인을 불러와 줄 수 있겠니?”
아리아나는 상자에 있던 머리핀 하나를 꺼냈다. 금으로 만들고 작은 사파이어 두 개를 박아넣은 머리핀은 하녀의 급여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내 심부름을 해준다면 먼저 이걸 하나 주고, 행상인을 만난 후에 비슷한 장신구로 두 개를 더 줄게.”
로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리아나가 내민 머리핀을 받아들었다.
“행상인을 어디로 데려오면 될까요?”
“저택 후문의 숲으로 데려와줘.”
“그럼 2시간 후에 저택 후문의 숲에서 뵐게요.”
로잘린이 나간 후, 아리아나는 로잘린이 가져온 물을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물은 눈물이 나도록 시원하고 달았다. 아리아나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반 이상 마신 후에야 음식을 먹었다.
갓 구운 듯 좋은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빵과 버섯을 넣어 진하게 끓인 수프, 옥수수와 콩, 잘게 썬 양파를 상큼한 소스로 버무린 샐러드와 얇게 저민 햄.
굶주린 위장이 다치지 않도록 오랫동안 씹어 삼켰다.
헬레나라면 “이딴 걸 누가 먹어?”라며 치워버렸을 음식을, 아리아나는 꼭꼭 씹어서 남김없이 먹었다.
그 후에 장신구 상자에서 값이 나갈 것 같은 장신구들을 골라냈다. 장신구를 담을 가방이 없어서 베개 커버를 벗겨내 그 안에 담았다.
‘이거라면 동령에 갈 비용으로 충분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장신구를 싹 팔아버리고 싶지만, 만약을 대비해야만 했다. 어쩌면 헬레나나 빅토리아가 장신구의 존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리아나는 베개 커버를 원피스 치마 안쪽에 잘 넣어 감춘 후에 방에서 나왔다. 로잘린이 레이첼의 안배가 아니라면 지금쯤 행상인과 함께 브론테 저택 숲에 접어들고 있을 터였다.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갈무리하고 복도를 총총 걷고 있을 때였다.
“아리아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리아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레이첼이 헬레나와 함께 복도에 서 있었다.
외출이라도 하려는지, 레이첼과 헬레나는 도톰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헬레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흰여우 목도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머니, 아가씨.”
아리아나는 두 사람을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레이첼이 미간을 좁혔다.
“너, 언제까지 네 언니를 아가씨라고 부를래? 거리 두지 말고 언니라고 부르며 사이좋게 좀 지내거라.”
헬레나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지만, 평소처럼 칭얼거리지는 않았다.
“네,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이니?”
“그냥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요. 안 된다면 다시 방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아니다. 갇혀 있었으니 답답하겠지. 반성은 좀 했니?”
“네, 어머니.”
“그래, 수도에 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으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렴. 알겠니?”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눈물이 나게 기뻤을 것이다. 드디어 어머니가 날 걱정해준다는 생각에 설레서 잠도 못 자고 뒤척였겠지.
하지만 지금 아리아나의 귀에는 레이첼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을 품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리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어머니. 주의할게요.”
아리아나는 그들이 먼저 나갈 수 있게 복도 한쪽으로 비켜섰다. 레이첼과 헬레나가 아리아나의 앞을 지나갔다. 헬레나가 휙 고개를 돌려 아리아나를 째려보더니, “흥!” 하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리아나는 그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걸음을 서둘렀다.
+++
숲에 들어서자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게 팔뚝을 스쳤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데도 아리아나는 허리를 펴고 천천히 걸었다.
나무 뒤에 있던 로잘린과 행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이 먼저 아리아나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웨스튼 시를 떠나려던 행상인을 불러왔어요. 아가씨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웨스튼 시를 떠날 테니,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거예요.”
로잘린의 영리함에 조금 놀랐다. 아리아나의 시선을 받은 로잘린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아리아나와 행상인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
‘영특하구나.’
아리아나는 로잘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행상인에게 다가갔다.
행상인과 흥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장사꾼인 잉고우 알프레히와 결혼해서 그 일을 도와야 할 때가 많았고 3황자의 일을 도울 때도 흥정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리아나는 좋은 가격으로 장신구들을 팔고, 날이 날카로운 단도 하나를 저렴한 가격으로 사들였다. 언젠가 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행상인을 떠나보낸 후, 방에 돌아오자마자 돈 자루 안을 확인했다.
22골드.
아리아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많은 돈을 가져보는 게 처음이었다.
22골드나 되는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는 힘들었다.
‘이걸 갖고 다니면 누군가에게 들킬 수도 있어. 믿을 만한 은행에 맡겨야 할 텐데…….’
은행에 가려면 저택을 나가야 한다. 로잘린에게 행상인을 불러오는 것까지는 시킬 수 있었지만, 이렇게 큰돈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은행원을 불러들이는 것도 위험했다. 은행원인 척하며 가짜 계좌를 만들어주고 돈을 훔치는 사기꾼들이 있었다.
‘수도에 갈 때까지 눈에 띄는 짓은 최대한 하지 말아야 해. 일단 이건 나무 아래에라도 묻어둘까?’
어느 나무 아래에 묻어야 저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지 고민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아리아나는 황급히 돈 자루를 속치마 주머니에 숨긴 후,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들어와.”
찾아온 사람은 로잘린이었다.
“무슨 일이니?”
“제게 또 시키실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해? 혹시 어머니께서 네게 은밀하게 지시하신 일이 있니?”
“공작부인께서는 배포가 작으시죠.”
당황하게 하려고 일부러 단도직입적으로 찔러봤는데, 로잘린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아가씨의 행동을 일러봐야 제게 돌아오는 것은 없고, 혹여 기분이 좋아서 보상을 해주신다 해도 동전 몇 개를 던져주실 뿐일 거예요.”
로잘린의 말이 사실이었다.
레이첼은 고용인들에게는 씀씀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제게 행상인을 불러오는 거로만 장신구를 한 개, 불러오고 나면 장신구를 두 개 약속하셨죠. 이리 귀한 것을 잔뜩 챙겨주시는데, 제가 굳이 아가씨께 밉보여서 좋을 것이 무어 있을까요?”
로잘린은 순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약삭빨랐고, 그 점이 아리아나의 마음에 들었다.
단지 저택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몸을 사리고 시키는 일을 다 하는 하녀들보다, 영리하게 득이 될 것을 따지는 하녀가 쓸모 있었다.
아리아나가 로잘린에게 줄 것이 있는 한, 로잘린이 레이첼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아리아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용할 만한 사람은 이용해야 해.’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는 없다. 특히 지금처럼 브론테 공작가에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이용할 가치가 있는 데도 배신이 두려워서 눈 돌리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지.’
아리아나는 마음을 굳히고 돈 자루를 꺼냈다.
“이 돈을 은행에 맡겨야 해.”
“브래든 은행을 추천드릴게요. 생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믿을 만하고 지점이 큰 도시마다 있어서 이용하기도 편리하다고 들었어요.”
아리아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브래든 은행은 이 시점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몇 년 후에는 가장 신뢰할 만한 은행이 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일개 하녀인 로잘린이 안다는 게 신기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평민 출신은 아닌 듯했다.
의문스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이용하기로 결심한 이상 깊이 파헤치지는 않기로 했다. 로잘린의 출신을 파헤치기에는 아직 저력이 부족했다.
아리아나는 어쩌면 로잘린이 금화를 챙겨나가 그대로 도망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두 시간 후에 로잘린은 브래든 은행의 계좌를 만들어서 돌아왔다.
“계좌 증표예요. 비밀번호는 제가 마음대로 정했는데…….”
로잘린은 아리아나에게 계좌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계좌 증표는 손가락 두 개 크기의 메달로 계좌 번호가 쓰여 있고, 뒤에는 브래든 은행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리아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처음 가져본 제 소유의 계좌 증표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아리아나에게는 충분한 도주 자금이 생겼다.
+++
늦은 밤.
레이첼의 방에서 나온 하녀가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저택을 나섰다. 하녀는 저택 밖에서 기다리는 허름한 마차에 올라서 어딘가로 향했다.
마차가 멈춘 곳은 빈민가에서도 깊숙한 곳에 있는 위험 지역으로,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담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하녀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느 술집 안으로 들어가서, 술집 주인에게 은화 한 개를 건네며 뭐라고 속삭였다. 험상궂은 인상의 술집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하녀가 안쪽 방에서 잠시 기다리자,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멀끔한 인상의 젊은 청년이었다.
하녀는 그에게 1골드를 건네며 말했다.
“모레 오후 3시. 브론테 숲 중앙 연못 옆의 파고라.”
청년이 재미있다는 듯 금화를 위로 던졌다가 받으며 물었다.
“상대는?”
“하늘색 머리카락에 피부가 흰 여자.”
“하늘색 머리카락에 피부가 흰 여자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 브론테의 둘째 공녀인가?”
하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곧 안색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조심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주인님의 눈이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이 웨스튼 시에서 감히 브론테 가문을 거역할 사람이 있나?”
“제대로 해내면 지금 받은 것의 다섯 배를 더 받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