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레이첼의 계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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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레이첼의 계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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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레이첼의 계략 (2)
2023.03.18.
툭 떨어진 검고 작은 것이 지하 감옥에 상주하는 생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쥐라기에는 조금 크고 움직임이 없었다.
발 옆에 떨어진 검은 덩어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물통이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지 꽤나 묵직했다.
“굶주림은 견뎌도 갈증은 견디기 쉽지 않지.”
철창 밖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아리아나는 허리를 세웠다. 철창 밖에 크고 검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브론테 저에서의 일이 도통 끝나질 않나 봅니다.”
“할 일 끝내고 꺼졌을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남아 있느냐는 의민가?”
아리아나는 대답하는 대신 가죽 물통을 내려다봤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등잔불이 켜지고, 어제와 같은 차림의 사이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네 번째 만남이건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게 진짜로 인간의 얼굴일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이러스의 친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기에는 갈증이 너무 심했다.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물병을 내려다보는데, 사이러스가 말했다.
“물 몇 모금으로 은혜를 베풀었다고 여기는 옹졸한 놈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제게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시는지요.”
“고작 물 몇 모금으로 친절을 논하다니, 그대의 삶도 참으로 가혹하군.”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이 아리아나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의 냉정한 눈빛이나 차가운 체온과 달리, 몇 마디의 말은 따뜻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이 가혹한 삶을, 고작 물 몇 모금을 과한 친절로 받아들이는 이 생애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그 순간, 3황자 헤럴드 블렌윗이 떠올랐다.
아리아나를 향한 다정한 눈빛과 상냥한 미소, 아리아나의 볼을 어루만지던 따뜻한 손길.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감미롭고 달콤한 말들.
-“참으로 힘들었겠구나, 아리아나. 이리도 영리하고 아름다운 그대를 왜 다들 몰라줄까?”
-“아리아나, 나는 그대가 필요해. 그대만이 나를 도울 수 있어.”
-“그대가 없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말로는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고 감정조차 꾸며낼 수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던 아리아나는 의심 없이 3황자의 다정한 말을 믿었기에, 죽었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3황자는 다정한 말을 늘어놓을 뿐, 정작 아리아나를 위해 해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달콤한 말로 아리아나를 사지에 몰아넣었다.
물러질 뻔한 심장이 도로 차게 굳었다.
아리아나는 물병을 철창 쪽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친절은 원하는 여인에게 베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저택에도 전하의 친절을 원하는 여인이 있을 텐데요.”
“아, 내 초상화를 걸어둔 여인을 말하는 건가?”
“이미 아시니 친절을 베푸실 일만 남았네요. 브론테 공작가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공녀랍니다. 그녀라면 이 서령에서 가지 못할 곳도, 말하지 못할 것도 없으니 북제후께 큰 도움이 되겠지요.”
“글쎄. 내 초상화를 어디서 구했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겠군.”
“그러한 것을 알아서 무엇에 쓰시려고요?”
“그린 놈도 죽이고, 판 놈도 죽이고, 산 놈도 죽이고, 감상한 놈도 죽이려고.”
농담처럼 흘러나온 말이지만,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등골이 오싹했다.
그동안 사이러스가 평범한 사내처럼 말을 걸어와서, 그를 둘러싼 소문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동쪽 거리에 북부에서 행상인이 들어왔다더라. 그 행상인이 몰래 북제후의 초상화를 팔고 있대. 가서 가장 크고 가장 잘 그려진 걸로 사 와. 얼마나 잘생겼는지 한번 봐야겠어.”
한 달 전, 잔뜩 들뜬 헬레나가 아리아나를 불러서 명령했다.
동쪽 거리는 하층민 중에서도 빈민들이 사는 곳으로, 도둑이나 유괴범들이 돌아다녀서 위험한 곳이었다.
헬레나는 평범한 귀족 영애라면 지나가지도 않을 장소에 자신의 시녀나 하녀를 보낼 수가 없어서 아리아나를 보냈다.
아리아나는 낡은 모포를 두건 삼아서 두르고 동쪽 거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무섭지만 헬레나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매질을 당하고 갇히는 게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기 하나 없는 소녀에게는 위험한 그 거리를, 아리아나는 덜덜 떨면서 걸어가 행상인을 찾아냈고 무사히 북제후의 초상화를 살 수 있었다.
겁도 없이 혼자서 거리를 걷는 아리아나를 향한 빈민들의 눈빛보다, 초상화를 산 놈도 죽이겠다고 말하는 사이러스의 눈빛이 더 무서웠다.
‘설마 내가 샀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아리아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갑자기 말이 없군.”
들려오는 그의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리아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원래 과묵한 편이라서요. 북제후 전하도 과묵하시다 들었습니다.”
“닥치고 꺼지란 뜻인가?”
“영특한 북제후께서 자꾸 제 말뜻을 곡해해 되물으시니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곡해가 아니라면 지금껏 그대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나?”
“물론입니다, 전하.”
“날 보는 여인들의 심장이 하염없이 뛴다는 말도?”
“그럼요.”
“그대의 심장도 그리 뛰나?”
“물론입니다.”
사이러스가 허리를 굽혀 아리아나와 눈을 맞췄다.
“그대는 거짓말을 참으로 못하는군. 심장이 뛴다는 거짓말을 할 때는 그에 맞는 표정이라도 지어준다면 좋을 텐데.”
“여인답게 자라지 못해 그에 맞는 표정을 짓지 못할 뿐입니다. 심장은 충분히 뛰고 있어요.”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으니까?”
순간, 아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사이러스가 자신이 했던 실없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의 얼굴에 옅게 번지는 미소를 묵묵히 감상했다. 소리 없이 떠오른 미소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사내는 여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검을 들어 제 귀를 자르기도 하지.”
“전하께서도 그러신가요?”
“글쎄.”
사이러스가 허리를 폈다.
반짝이는 은발 아래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오만한 군주처럼 변했다. 짙은 잿빛 눈썹 아래의 붉은 눈동자가 꿰뚫을 듯 아리아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대의 미소가 그대의 무기가 되어주리라는 건 알겠군.”
“제 무기가요?”
“그대가 미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대는 천하를 가질 수도 있을 거야.”
“전하처럼요?”
사이러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달처럼 은은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배움이 빠르군. 하지만 난 아직 천하를 갖지 못했어.”
사이러스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사라졌다.
한숨을 삼키던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서 있던 자리에 꾸러미 하나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철창 밖으로 손을 뻗어 작은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꾸러미 안에는 빵 두 개와 햄, 치즈가 한 덩이씩 들어 있었다.
‘자기가 먹으려고 들고 왔다가 깜빡 잊고 간 건 아니겠지.’
아마 아리아나를 위해 가져온 것이리라.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이곳에 며칠을 갇혀 있든 신경 쓰지 않을 것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식수뿐 아니라 배를 채울 것까지 가져다줄 줄이야.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빵도, 햄과 치즈도 그 맛을 알기에 더 식욕이 돌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 리 없어.’
아리아나에게 호의를 보인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잘해주는 거겠지.’
죽기 전에도 그와 마주친 적은 없지만, 그에 관한 소문은 참 많이도 들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인도, 영리한 여인도, 그에게 이용당했을 뿐. 그의 마음 한 조각 얻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얻을 게 없을 텐데.’
차라리 서령을 떠나 동제후에게 의탁한 다음에 접근해왔다면, 동령 공주 자리에 앉은 아리아나를 이용하기 위해 친절을 베푼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르다.
공작저에 갇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가련한 둘째 공녀. 파티에서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얻어맞고 감옥에 갇힌 천덕꾸러기.
사이러스도 그동안 지켜봤으니 아리아나의 처지를 알 텐데, 무엇을 위해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걸까?
‘설마 내가 동령으로 떠나려 한다는 걸 눈치챘나? 하지만 어떻게? 나도 모르는 새에 티를 냈나?’
아니다. 아리아나는 혼자 있을 때조차 조심했다.
‘친절을 베푸는 의도가 뭐든, 내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
아리아나는 그가 가져온 꾸러미와 물통을 감옥 구석에 밀어놓았다.
음식을 보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고 물을 보자 갈증이 더 심해졌지만, 그가 가져온 것에는 손 하나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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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꾸러미와 물통에 손을 대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고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의 움직임에, 동탑을 지키는 병사들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두운 동탑 안에 하녀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녀들의 반응이 정상이다.
죽어간 이들의 썩은 냄새와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곳. 그런 곳에서 아리아나는 동요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갇히는 데 이골이 났다고 해도, 방에 갇히는 것과 동탑에 갇히는 것은 다르다.
어젯밤부터 물 한 잔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건, 저 안에서 꺼내주지 않고 죽일 수도 있다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브론테 공작가에서 이어진 숲에 접어들었을 때, 나무 그림자 속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 사이러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꼬리가 내려가서 선량한 느낌을 주는 빨간 단발의 여자와 애교가 많게 생긴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검은 머리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주군.”
“확인했나?”
“네, 수도 귀족들은 오늘 오전에 서둘러 떠났고,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시기에 떠났습니다. 몇몇 귀족은 남아 있긴 하지만 따로 서제후와 만나려는 기미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사이러스가 이끄는 흑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으로, 여자가 단장인 루이, 남자가 부단장인 노아였다.
노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서제후 역시 딱히 이번 파티에 주목하지 않은 걸 보니, 정말로 첫째 공녀의 데뷔탕트를 위한 포석을 깔기 위해 마련한 파티인 것 같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아이작 님은 심심하다며 방에 틀어박혀서 술을 마시고 계십니다.”
“그 녀석이 뭘 하는지까지 보고할 건 없고.”
보고가 끝났으면 다시 모습을 감춰야 할 루이와 노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사이러스를 보고 있었다. 사이러스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직 보고할 게 남았나?”
“저희는 언제 북령에 돌아갑니까?”
“아직.”
노아가 루이에게 슬쩍 눈짓했다. 다음 말은 루이가 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굳게 다문 루이의 입술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노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혹시 브론테의 둘째 공녀 때문에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