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든 파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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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든 파티 (4)
2023.03.16.
‘북제후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고 미래가 너무 많이 바뀌면 곤란해.’
아리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일순 경계심이 떠오르는 것을, 사이러스는 흥미롭게 지켜봤다.
지금껏 사이러스를 마주한 여인들이 보이는 눈빛은 둘 중 하나였다. 선망, 아니면 두려움.
하지만 아리아나의 새파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달랐다.
경계, 그리고 약간의 성가심.
사이러스는 그 누구에게도 성가신 존재로 여겨진 적이 없었기에, 아리아나를 상대하는 게 조금은 즐거웠다. 그녀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어떤 말로 받아칠지 기대되기도 했다.
“동제후는 그대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걸 알고 있나?”
작고 어여쁜 얼굴에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한 채로 담담히 말했다.
“모를 리 없겠지만, 모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파티에서의 일이 귀족들 사이에 퍼질 테니, 언젠가 제가 의탁하려 한다면 모르는 척할 수는 없을 테지요. 아무리 동제후라도 학대받는 가련한 딸을 내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아리아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동제후’라고 불렀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서는 그리움이나 애정 같은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대는 작은 머리로 많은 생각을 하는군.”
허공을 응시하던 푸른 눈동자가 사이러스의 얼굴이 고정되었다.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전하의 머리도 그리 커보이지는 않습니다.”
“너 같은 놈도 하는 생각을 나라고 왜 못 하겠느냐는 뜻인가?”
순간 아리아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며칠간 아리아나를 지켜보는 동안, 처음으로 보이는 진짜 미소.
북령의 그라텐 산봉우리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겨울꽃처럼 맑고, 어두운 늪지대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가지런한 눈썹이 부드럽게 펴지고 고양이 같은 눈이 가늘어지는 광경을, 사이러스는 멍하게 지켜보았다.
꿈결처럼 시작된 미소는 백일몽처럼 사라졌다.
“전하께서는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십니다.”
“그대도 웃을 줄 아는군.”
“필요하다면 웃지요. 웃을 만해도 웃고요.”
사이러스는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턱을 살며시 쥐고 들어 올렸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도 아리아나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내 말이 재미있다고 웃는 건 그대가 처음이야.”
“그럴 리가요. 웃으라 명령하시면 모두가 웃지 않겠습니까.”
도톰한 입술 사이로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대답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울기도 하나?”
그녀가 우는 얼굴은 어떠할지.
“필요하다면 웁니다.”
“그대가 우는 걸 보고 싶군.”
“명령하신다면 울지요.”
사이러스는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었다.
아리아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리 봐도 집 안에 갇혀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영애의 자태는 아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살짝 치켜든 아리아나는 황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여인처럼 위엄이 있었다.
사이러스는 동제후와 서제후 사이의 연결 고리인 아리아나가 그들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지, 그들이 아리아나를 어떤 패로 사용하려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껏 지켜본 결과, 서제후는 아리아나에게 관심이 없고 레이첼 또한 아리아나를 진짜로 싫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혼할 때 굳이 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제 딸이 이런 꼴을 당하는 데도 동제후가 모르는 척하는 데도 이유가 있을 거고.’
어쩌면 아리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처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은 아리아나의 행동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기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드물게도 아리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브론테 저택에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군.”
“제게는 수도 없이 질문을 하시면서 질문에 답하시는 건 박하시군요.”
“그대와 내 처지를 비교하면 알 텐데. 누가 봐도 그대는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지.”
“제가 전하의 검을 두려워하는 걸로 보이십니까?”
그리 보이지 않았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가 공포에 질리는 순간이 있기는 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일부러 겁을 줘서 그 사실을 알아보고 싶진 않았다.
“어둠도, 부모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이니 내 검 또한 두려워하지 않겠지. 하지만 굶주림은 어떨까? 전에 보았을 때를 떠올리면 잘 먹는 편인 것 같은데.”
아리아나는 식료품 저장고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주위가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굶는 것은 익숙합니다. 고통스럽지만 무서울 건 없어요.”
“레이첼 브론테가 무척 화났던데 이곳에 며칠을 갇혀 있어도 그 생각이 변치 않을까?”
“제가 며칠이나 갇혀 있어 보았는지 아신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날 깜짝 놀라게 할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기대되는군.”
사이러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사라졌다. 어느새 등잔불도 꺼진 후였다.
아리아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어둠을 응시했다.
식료품 저장고에서 하녀들은 그와 그녀가 눈앞에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도 같은 상황인 건 아닐까?
사이러스가 어둠 속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성가셔.’
앞으로 고민해야 할 것도, 계획해야 할 것도 많은 상황에서 사이러스의 존재는 거슬리기만 했다.
‘북제후가 레이첼에 관해 말하는 걸 들어보면 좋은 감정은 없는 것 같았어. 어쩌면 내 편이 되어줄지도…… 아니, 아니야. 북제후와 얽혀서 좋을 건 없어.’
그가 소문처럼 잔인한 남자는 아닌 것 같지만, 아직 사이러스 카르하라는 인물을 확실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너무 큰 변수를 끼워 넣으면 제대로 뭔가 해보기도 전에 모든 걸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이러스는 빅토리아나 헬레나처럼 다루기 쉬운 인물도 아니었다. 사이러스가 아리아나의 뜻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으니, 그를 배제하는 것이 옳았다.
‘내 편 따위는 없어.’
아리아나는 어둠을 노려봤다.
‘누구라도, 언제든 내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어. 나는 혼자 걸어가야만 해.’
+++
사이러스는 동탑 꼭대기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넓은 브론테 저택을 내려다봤다.
여러 채의 화려한 건물과 탑들, 곳곳에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정원들.
그리도 넓고 호화로운 곳에 아리아나가 있을 장소는 없었다.
‘조만간 이곳에서 도망치겠군.’
친부모를 말하는 아리아나의 눈에서는 약간의 온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을 향한 기대 또한 없었다. 동제후와 서제후 측에서 아리아나를 이용할 생각이라고 해도, 그녀가 순순히 이용당해주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다면 아리아나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감출 수 없는 살기와 증오를 품은 눈동자는 어디를 향해 있는 걸까?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와 같은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 거울 속에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여러 세력에게 휘둘리던 사이러스 또한 그녀와 같은 눈빛을 가진 적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 눈빛은 여전히 사이러스의 안에 남아 있다. 다만 잘 갈무리하여 드러내지 않게 되었을 뿐.
‘모두가 내게 칼을 품고 달려들었지. 누가 내 부모님을 죽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모두를 경계해야만 했고.’
그렇다면 아리아나의 증오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부모의 방치와 학대?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아리아나의 눈동자 깊은 곳에 깔린 어둠에는 그보다 더한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에 갇혀서 지내는 16살짜리 소녀가 사이러스와 비슷한 증오를 품을 만한 일을 어디서 겪었겠는가.
바로 그 점이 그녀를 경계하도록 만들었고, 또한 그녀를 흥미롭게도 만들었다.
‘동제후에게 의탁할 계획인 것 같은데…….’
사이러스는 부모님의 죽음에 동제후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이 적의 모략에 휘말려 사망하기 직전, 동제후와 레이첼이 결혼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망 후, 레이첼은 동제후와 이혼하고 서령으로 돌아갔다.
레이첼이 동령에 있는 동안, 서제후가 딸인 레이첼을 통해서 동제후와 은밀한 작전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저 여자가 동제후와 연결되는 게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알 수 없군.’
방해해야 할까?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칼까지 품고 있는 여자라면 이 완고한 저택에 가둬두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앞으로 아리아나라는 여자가 사이러스의 계획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니까.
다른 때라면 사이러스는 가차 없이 아리아나를 방해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아니, 방해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그냥 죽였으리라.
사이러스가 사람을 죽이는 데는 상대가 내게 죄를 범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앞길에 장애물이 될지, 아닌지가 더 중요했다.
상대의 나이가 몇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사이러스의 검은 공평하게 움직였다.
아리아나가 서령을 떠나 동제후에게 의탁할 계획을 품었다는 걸 알아내었을 때, 그녀를 죽였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용 가치가 있어.’
벌써 여러 번 했던 생각을 되풀이했다.
‘언젠가 내게 좋은 패가 되어주겠지.’
사이러스는 어둑한 등잔불 아래서 태양처럼 빛나던 그녀의 미소를 떠올렸다.
‘재미있기도 하고.’
+++
빅토리아는 옆에 있던 물컵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물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빅토리아의 방에 있던 시녀와 하녀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온화하고 예의 바른 빅토리아가 헬레나처럼 성질을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
빅토리아는 아리아나를 데려오라고 시켰던 헬레나의 하녀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창백한 낯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분명 잘 꾸며서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아가씨, 저희는 아가씨의 명령대로 했어요. 드레스를 입히고 화장도 해줬는데 아리아나 아가씨, 아니, 그 여자가 저희를 내쫓더니 옷을 도로 갈아입고 나왔어요.”
“아리아나가 내쫓는다고 그대로 내쫓겨? 그 여자는 혼자고 너희는 네 명인데, 팔다리를 붙잡고서라도 다시 갈아입혔어야지!”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녀이신데 어떻게…….”
“공녀라니! 그딴 여자가 나랑 같은 핏줄이라는 거야?”
빅토리아는 또 집어던질 것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것은 다 집어던져서 깨진 후였다.
파티가 끝난 후 레이첼에게 크게 혼난 헬레나는, 빅토리아를 찾아와서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다가 돌아갔다.
그냥 소리 지르고 욕만 했으면 다행이지만, 빅토리아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네가 걔를 파티에 데려가자고 했잖아!”
-“언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저 걔가 불쌍하다고…….”
-“어쨌든 너만 아니었으면 걔를 파티에 내보일 일도 없었어!”
평소보다 더 크게 혼난 헬레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빅토리아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 둘의 싸움을 전해 듣고 찾아온 레이첼은 못마땅한 듯 빅토리아에게 말했다.
-“네 언니를 너무 자극하지 마라. 네가 동생인데 참아야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언제나 헬레나에게만 너그러웠다.
헬레나도 부모님도 다 싫지만, 가장 싫은 건 아리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