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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든 파티 (3) (13/238)


(13) 가든 파티 (3)
2023.03.15.


레이첼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빅토리아는 숨을 멈췄다.

아리아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같은 행동을 또 한 번 반복했다.

헬레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무슨 차를 그렇게 마시니?”

빅토리아는 헬레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저 멍청한 언니는 눈치라는 게 없는 걸까?

빅토리아는 아리아나가 평소처럼 얼굴을 붉히고 허둥거리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지금까지 아리아나가 보인 행동은 요행이었을 뿐, 이제부터는 평소처럼 행동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아리아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빅토리아 아가씨께서 이렇게 마시라고 알려주셨는걸요.”

“내가 언제!”

결국 빅토리아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아리아나는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입까지 다물지는 않았다.

“어제 직접 방으로 불러서 알려주셨잖아요. 이렇게 마시지 않으면 창피를 당할 거라면서…… 제가 또 실수를 한 건가요? 용서해주세요, 아가씨.”

“언니, 정말 왜 그래? 왜 갑자기 나한테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야? 일부러 이러는 거야?”

“죄송해요, 아가씨. 죄송해요.”

아리아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몸을 한껏 움츠리고 용서만 구하는 둘째 공녀의 가련한 모습에, 다들 동정심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리아나의 몸에 멍만 없었더라도 그녀를 믿는 쪽과 믿지 않는 쪽, 두 부류로 나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이틀 굶은 게 아닌 듯 마른 육체에 새겨진 오래된 멍과 생긴 지 얼마 안 된 멍들이 이 상황의 가해자를 명백하게 만들었다.

마음 약한 귀부인들은 눈시울까지 붉혔다.

미간을 좁히고 있던 줄리아나 로벤타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브론테 공작부인이 둘째 공녀를 참으로 아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소중히 여기는 것 같군요.”

뼈가 있는 말에 레이첼의 얼굴이 벌게졌다.

“오해예요, 로벤타 공작부인. 저 애가 원래 장난이 많아서…….”

“장난으로 제 몸에 멍을 낸다고요? 도저히 자기 손으로 때릴 수 없는 곳에도 멍이 생겼는데요. 동제후 전하께서도 둘째 공녀가 저리 굶주리며 지낸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동제후의 이름이 나오자 레이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이첼은 치마를 꽉 움켜쥐고 말했다.

“아이의 예의는 내가 알아서 교육할 문제입니다, 로벤타 공작부인. 너무 선을 넘는 것 같네요. 수도의 귀족들은 원래 이렇게 남의 집안일에 관심을 보이나요?”

레이첼은 줄리아나의 마음을 잡는 걸 포기했다.

수도 사교계가 줄리아나의 손아귀에서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아깝기는 해도 비굴하게 행동할 마음은 없었다.

줄리아나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제 집안일을 이렇게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답니다.”

레이첼은 할 말이 없었다.

줄리아나의 앞에서 비굴해지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성질을 드러내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당황하는 걸 처음 본 헬레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로벤타 공작부인, 노여움을 거두세요. 제가 언니로서 아리아나를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에요. 어머니께는 죄가 없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둘째 공녀의 몸에 생긴 멍은 공작부인이 아니라 헬레나 양이 만든 건가요?”

“예? 아, 아니요. 저는 아리아나를 때리지 않아요.”

“그렇다면 누가 둘째 공녀를 저렇게 때린 건가요?”

“그게…….”

헬레나가 눈을 꿈뻑거리며 빅토리아를 돌아봤다.

헬레나 딴에는 도움을 청하는 시선이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빅토리아가 때렸다는 듯이 보였다.

빅토리아는 헬레나의 뺨을 때리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어머니 말씀대로 아리아나 언니가 조심성이 없어서 계단을 구른 거예요.”

“맞아요. 아리아나가 좀 그런 면이 있어요.”

헬레나가 얼른 빅토리아의 말을 거들었지만, 귀부인들의 냉랭한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레이첼과 빅토리아는 이 상황에서 그 어떤 변명을 해도 분위기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설령 아리아나가 ‘절 괴롭힌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해도, 귀부인들의 눈에는 불쌍한 아리아나가 자기 가족을 지키려는 것으로만 보일 터였다.

싸늘하게 세 모녀를 응시하던 줄리아나가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면 둘째 공녀의 몸에 또 멍이 늘겠군요.”

레이첼이 차갑게 말했다.

“말이 심하군요, 로벤타 공작부인.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리아나를 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둘째 공녀도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군요.”

줄리아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레이첼이 인상을 찌푸렸다. 줄리아나는 레이첼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리아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올해 사교 시즌 때 수도에서 기다릴게요, 아리아나 양. 수도에 오는 대로 로벤타 저택에 들르도록 해요.”

+++

파티는 처참한 분위기로 끝났다.

귀족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가자마자 레이첼은 아리아나에게 패악질을 부렸다. 때리고 걷어차고 꼬집고 욕한 뒤에, 살아서 나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동탑 지하에 가뒀다.

아리아나는 자신이 지하 감옥에서 죽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줄리아나 로벤타 공작부인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호의적이었다.

이번 사교 시즌에 방문하도록 직접 초대했으니, 레이첼이 아무리 싫어도 아리아나를 제국 수도에 데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아픈 척해서 이번 사교 시즌은 건너뛸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오늘 일로 숙덕거리는 사람이 더 많아질 테니 불참하지는 못하겠지.’

아까 줄리아나가 동제후의 이름을 거론한 것으로 봐선, 오늘의 일이 동제후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도 높았다.

‘동제후는 어떻게 나오려나? 나라는 존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할까?’

레이첼과 이혼한 후 동제후는 재혼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딸인 아리아나를 찾지도 않았다.

-“네 아버지는 얼음 같은 사람이야. 동령의 안위만 생각할 뿐, 아내나 딸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레이첼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동제후의 냉정함에 대해서 말했다.

실제로도 동제후는 아리아나에게 부친으로서의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애정은 바라지도 않아. 관심조차 없었지.’

잉고우 알프레히 자작과 결혼한 후에 처음으로 간 황실 파티에서 동제후를 보았다. 그때 동제후가 지은 표정을 똑똑히 기억했다.

냉랭한 눈동자, 불쾌한 듯 좁아진 미간.

레이첼이 동제후와 닮았다는 이유로 아리아나를 증오하듯, 동제후 또한 레이첼에게서 태어난 아리아나를 증오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가 학대받는다는 사실이 동제후 귀에 들어가고, 동령에 필요한 것을 가져가면 동제후도 날 내치지는 못할 거야. 내가 가진 걸 한 번에 넘기지 않고 조금씩 내놓는다면, 적어도 날 지금보다는 낫게 대우해주겠지.’

아리아나는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어둠을 노려봤다.

예전에는 이 어둠이 두려울 때도 있었다. 어둠 속에 끔찍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가 덮쳐올 것만 같아서 이렇게 갇힐 때마다 무릎을 끌어안고 흐느끼곤 했다.

차가운 벽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보이지 않는 괴물의 입김인 것만 같아서, 영원히 갇혀 있다가 죽게 될 것만 같아서 무섭고 불안하고 슬펐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둠이 두렵지 않다. 도리어 어둠 속에 있어야만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 조각의 애정도 주지 않는 가족에 비하면 어둠은 위로였다.

아리아나는 파티에서 레이첼과 빅토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던 걸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무너질 평판이었는데…….’

그때는 뭐가 그리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했던 걸까?

‘그래, 무서웠지. 어머니가 날 미워할까 봐, 언니와 동생이 날 싫어할까 봐, 무서웠지.’

그들의 미움조차 오롯이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무서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날 싫어하는 사람의 애정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없었다.

어차피 타인의 애정은 먼지처럼 덧없는 것.

날 사랑하는 건 나 자신 하나면 족하다.

“둘째 공녀는 어둠 속에서도 울지 않는데, 첫째 공녀는 제 어미에게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울다가 까무러치더군.”

어둠 속에서 낮고 느른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북제후 전하께서는 못 들어가는 곳이 없으신가 봅니다.”

“누가 감히 내 앞을 가로막겠나.”

달칵, 소리와 함께 등잔불이 켜졌다.

사이러스가 손에 들고 있던 등잔불을 철창에 걸었다. 오렌지빛이 일렁거리며 그의 얼굴이 깊은 굴곡을 만들어냈다.

그는 철창 밖에서 아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브론테 공작과 공작부인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데, 무섭지도 않은가?”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죽음도 두렵지 않다?”

“죽음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물러나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북제후 전하는 무척 바쁘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바쁜 분이 왜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그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냐고 묻는 건가?”

“전하께서는 제대로 알아들으시고도 되묻는 습관이 있으시군요.”

사이러스가 가만히 아리아나를 노려봤다.

그의 핏빛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아리아나의 목을 움켜쥐는 듯했지만, 아리아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를 탐색하듯 지그시 마주 본 채, 사이러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레이첼 브론테의 친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헬레나의 출생에 관한 비밀도 아시면서 겸손이 과하십니다.”

“한데 레이첼은 왜 그리도 그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가족이 있지요. 저와 어머니도 수많은 모녀 관계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대 모친의 애정이 다른 자매들에게만 향하는 게 서운하지는 않나?”

“태어날 때부터 제 것이 아니었는데 인제 와서 서운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이러스가 허리를 굽혀 아리아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있기는 해도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숨이 막혔다. 그는 과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군.”

“제가 전하께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사이러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에, 아리아나도, 사이러스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대는 본인이 무척 흥미로운 여인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나?”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전하께 약간의 흥미나마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신경 끄라?”

“또 되물으시네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무서웠다.

조금만 말을 잘못해도 그의 손이 가차 없이 목을 부러뜨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잔혹한 냉기가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고작 세 번째의 짧은 만남으로 그를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소문처럼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는 남자는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짙은 회색 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듣던 것만큼 잔혹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했다.

아리아나에게는 그녀만의 계획이 있었기에, 북제후라는 거대 세력이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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