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든 파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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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든 파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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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든 파티 (2)
2023.03.14.
넓은 온실에 긴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파티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고급스러운 정찬을 즐겼다.
서령에서 나오는 진귀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들은 그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고,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은 아름다웠다.
브론테 공작 내외가 앉은 테이블에는 수도의 고위 귀족들이 함께했다.
그중에는 줄리아나 로벤타 공작부인도 있었는데, 레이첼은 줄리아나를 가장 신경 쓰고 있었다. 줄리아나는 황제의 사촌 여동생일 뿐 아니라, 수도의 사교계에서 가장 힘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정찬이 끝나고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모여서 티타임을 가질 때, 줄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 댁의 둘째 영애가 보이질 않는군요.”
“아, 그 아이는 아파서…….”
“곧 올 거예요, 공작부인.”
헬레나가 레이첼의 말을 끊었다.
레이첼은 깜짝 놀라서 헬레나를 돌아봤지만, 헬레나는 레이첼의 시선을 무시했다.
“헬레나, 그게 무슨 말이니? 아리아나는 오늘 몸이 안 좋아서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제가요?”
그때, 온실 문 쪽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찰랑거리는 연한 하늘색 머리칼, 진주처럼 희고 고운 피부와 자그마한 얼굴, 신이 직접 빚은 듯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꼿꼿하고 정중하며 우아한 자태를 가진 소녀.
눈을 떼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녀는 귀족 가의 하녀도 입지 않을 낡고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품이 남달라서 마치 황실 사람들이 입는 드레스를 입은 듯 화려하게 느껴졌다.
“아리…… 아리아나.”
레이첼이 빽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죽였다.
아리아나가 레이첼을 향해 봄바람처럼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어머니. 아무도 제게 파티 시간을 알려주지 않아서요.”
레이첼이 눈을 부라렸지만, 아리아나는 고개를 숙이지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당혹스럽기는 빅토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하녀들에게 시켜서 드레스와 장신구를 보내놨는데, 왜 저런 몰골로 나타난 걸까?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과 비교하면 처참할 정도의 차림새를 했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는 아리아나의 모습에, 빅토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안 돼.’
뭔가 잘못됐다.
‘돌려보내야 해.’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어린애 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아리아나를 기대했다.
귀부인과 영애들이 머리를 양갈래로 촘촘히 땋은 아리아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장면을 예상했다.
그러면 아리아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빅토리아에게 매달리고 곁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일 거고, 그녀와 비교해 빅토리아가 얼마나 어른스럽고 우아한지 보여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리아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허둥거리지 않을 뿐 아니라,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까지 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턱을 살짝 올린 자세는 당당하고 품격이 넘쳤다.
그때, 헬레나가 눈치 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리아나를 향해 다가갔다.
“아리아나, 이제 왔어?”
“헬레나 아가씨.”
아리아나가 마치 하녀처럼 존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언니를 부르는 모습에 모두가 경악해서 숨을 멈췄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불려오던 헬레나는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아리아나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었다.
“이리로 와. 마침 딱 차를 마시고 있었어.”
레이첼이 헬레나와 아리아나를 향해 두 눈을 부라렸지만, 헬레나는 보지 못했고 아리아나는 못 본 척했다.
헬레나가 제 자리 옆에 아리아나를 앉히고 귀부인들을 향해 말했다.
“제 동생인 아리아나예요. 예쁘죠?”
헬레나 딴에는 조롱이 섞인 질문이었다. 그래 봐야 하녀 꼴을 한 아리아나에게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은 아리아나가 그런 꼴을 했음에도 헬레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레이첼이 분노를 억누르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리아나, 오늘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니? 그래서 치장하려고 보내준 하녀들도 다 물렸으면서, 왜 굳이 그런 옷을 입고 온 거니? 그 옷은 어디서 난 거고?”
레이첼이 아는 아리아나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허둥거려야만 했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려야만 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레이첼의 기대를 벗어났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프기는 해도 아프지는 않아요, 어머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이 옷 딱 한 벌뿐이라서요. 격식에 맞지 않는 옷이라 망설여졌지만, 헬레나 아가씨의 하녀들이 반드시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고 나무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아리아나는 손을 살며시 들어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아리아나가 팔을 들어 올리자 안 그래도 짧은 옷소매가 위로 올라가며 팔뚝이 드러났다.
잘 먹지 못해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가늘고, 매번 꼬집히거나 맞아서 여기저기 멍이 든 팔뚝.
하필이면 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수도에서 날고 기는 귀부인들이다. 그들은 아리아나의 대답과 옷소매에 감춰져 있던 팔뚝만으로도 아리아나가 이 저택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첼은 아리아나의 말 몇 마디로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아리아나를 내보내야겠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리아나가 전부 이런 식으로 받아친다면, 나중에 귀부인들에게 아무리 아니라고 해명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언니, 왜 또 그런 식으로 말해? 그런 거짓말로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드는 게 재미있어?”
보다 못한 빅토리아가 끼어들었다.
빅토리아의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귀부인들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도 잠시. 아리아나가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 빅토리아 아가씨. 역시 제가 올 곳이 아닌데, 죄송해요.”
“언니!”
이번만큼은 빅토리아도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리아나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화를 푸세요, 아가씨.”
마치 자주 맞아본 사람처럼 머리 위로 두 팔을 올려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는 아리아나는 너무도 연약하고 작아 보였다. 게다가 또다시 드러난 멍투성이의 팔뚝.
가까이에 있던 귀부인들의 눈에는 아리아나의 목덜미에 생긴 멍도 보였다.
“저런…….”
누군가가 혀를 찼다.
헬레나 또래의 영애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했다.
언제나 자기가 의도한 대로 상황을 이끌어오던 빅토리아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헬레나는 아리아나에게 ‘아가씨’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지만, 빅토리아는 그러라고 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걸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어차피 하녀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아리아나에게는 떨어질 평판이 없지만, 레이첼이나 헬레나, 빅토리아는 달랐다.
가진 것이 많기에 잃을 것도 많았다.
“언니, 나는 화 안 내. 그냥…… 얼굴에 뭐가 묻어서…….”
빅토리아는 손수건을 꺼내 아리아나에게 내밀었다.
아리아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감사해요, 아가씨.”
“언니, 자꾸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왜 그래?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네에, 죄송해요.”
아리아나는 마지막까지 존댓말을 사용했다.
빅토리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아래의 작은 손이 치마를 꽉 움켜쥐었다.
‘어떡하지?’
아리아나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아리아나의 몸에는 너무 많은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빅토리아가 눈만 깜빡거리는 동안, 레이첼이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아리아나가 어제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좀 다쳐서…… 그래서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은가 봐요. 원래는 이런 아이가 아닌데, 괜히 또 짓궂은 장난을 치네요.”
귀부인들은 레이첼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른 테이블의 귀족들까지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흘끔거렸고, 몇몇 귀족들은 레이첼이 들으라는 듯 속삭였다.
“브론테 공작의 피를 이은 게 아니라서 대우가 형편없는 모양이야.”
“불쌍하네. 아직 어린애인데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때리다니…….”
“저럴 거면 그냥 동제후에게 주고 오는 게 낫지 않았나?”
브론테 공작은 얼굴이 벌게졌다.
평판을 신경 쓰는 그에게 아내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나가 허름한 하녀복을 입고 멍투성이로 나타난 순간, 그 어떤 말을 해도 변명처럼만 들릴 게 분명했다.
아둔한 헬레나조차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저기…….”
아리아나가 입을 열자 레이첼이 쏘아봤다.
아리아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쿠키를 좀 먹어도 될까요?”
다른 영애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조롱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아리아나를 향한 시선에는 동정심만 가득했다.
지금껏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던 줄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들어요, 둘째 공녀.”
“감사합니다.”
아리아나는 손을 뻗어 쿠키를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실제로도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기에 쿠키가 유독 달게 느껴졌다.
레이첼과 빅토리아가 느낄 난처함은 아주 귀한 향신료였다.
하녀들을 불러서 잘잘못을 이야기해보라 한다면 하녀들은 레이첼을 위해 거짓말을 해주겠지만, 그래서야 귀부인들의 이야깃거리를 하나 더 만들어주게 될 뿐.
귀부인들에게는 이 사태의 진실 여부보다 브론테 가문의 모녀와 자매들 사이의 공공연한 싸움이 더 흥미로울 터였다.
‘내 평판이 떨어지는 건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까. 동제후도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면 없던 정도 떨어지겠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동령의 공주라는 지위뿐이니까. 내가 가진 게 있으면 동제후도 날 내치지 못하겠지.’
가련한 외향과는 달리 아리나아의 속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쿠키를 세 개째 먹는 아리아나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줄리아나가 말했다.
“목이 탈 텐데 음료라도 좀 마시면서 먹어요.”
“네, 감사합니다.”
배운 것을 써먹을 차례였다.
아리아나는 직접 제 잔에 뜨거운 홍차를 따랐고 빅토리아는 뒤늦게 아리아나가 어떤 식으로 차를 마실지 깨달았다.
아리아나가 평소처럼 행동했다면 아리아나만 조롱당하고 끝날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말려야 해!’
하지만 아리아나가 더 빨랐다.
아리아나는 빅토리아가 손을 뻗기 전에 찻잔을 들어 찻잔 받침에 차를 부었다. 그리고 찻잔 받침을 들어서 후후 불어 후루룩 마셨다.
그 행동에 귀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던 남자 귀족들까지도 기함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