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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든 파티 (1) (11/238)


(11) 가든 파티 (1)
2023.03.13.


옛날에는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서 식혀 먹기도 했었다지만, 그런 관습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제는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서 먹으면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이 시점까지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배울 기회도 없었던 아리아나는 빅토리아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처음으로 참석한 가든 파티에서 잔뜩 긴장한 아리아나는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서 큰 소리를 내며 마시는 추태를 부렸고,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귀부인과 영애들은 둘째 공녀인 아리아나가 예의도 모르는 걸 두고 매섭게 비난했고, 레이첼은 당혹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저 애가 자기는 동제후의 핏줄이라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면이 좀 있답니다. 아무리 가정교사를 붙여줘도 배우려고 하지 않네요.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그 옆에 있던 빅토리아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리아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언니,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좀 참아주지. 평소라면 내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는데. 응?”

아리아나는 순식간에 동제후 혈통이라는 걸 내세워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동생을 막 대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게 아니라고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냉랭한 비난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서 얼굴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16살이 되었는데도 저렇게 울면서 떼를 쓴답니다. 정말 어찌 가르쳐야 할지…….”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아리아나가 자기는 동령 공주라면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거잖아요. 아리아나가 어머니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 어머니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헬레나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 모녀는 순식간에 아리아나를 브론테 공작가의 폭군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는 그 자리에서 아리아나는 우는 걸 빼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멍청했지. 내 편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빅토리아에게 뜨거운 차를 마시는 매너를 배우고 방을 나선 아리아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리아나는 복도를 걷다가 창문 밖으로 멀리 보이는 커다란 온실을 응시했다.

고용인들은 내일 파티가 열릴 온실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헬레나와 빅토리아는 내일의 파티를 무척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아리아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도 기대되네. 내일 파티.’

+++

라탄 210년 2월의 유독 추운 날 오후.

귀족을 태운 마차들이 서령 웨스튼 시의 브론테 공작저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유독 화려한 마차도 몇 대 있었는데, 전부 카메리아 제국 수도 귀족들의 마차였다.

저택 정문 근처의 나무 위에서 마차들이 들어오는 걸 지켜보던 아이작이 말했다.

“레이첼이 제 딸들에게 좋은 인맥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돈이 심심치 않게 들었겠어.”

사이러스는 마차에서 내리는 인물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저 중 몇몇은 서제후와 연이 깊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그 사건에 손을 보태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장난기 담긴 눈으로 사이러스를 돌아봤다.

“자네가 저 파티에 등장한다면 다들 표정이 볼만할 텐데. 어때? 참가할 생각 없어?”

“네 즐거움을 위해 그 귀찮은 짓을 하라고?”

“좋잖아. 친구를 위해 한 몸 바치는 거. 자네를 보면 여인들이 뒤로 넘어갈 텐데. 브론테의 첫째 공녀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몰라.”

아이작은 헬레나가 그녀의 방에 사이러스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로 사이러스를 흠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이러스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정말 보고 싶지 않군.”

“그나저나 그 첫째 공녀의 지시를 받은 하녀들이 뭘 잔뜩 들고 둘째 공녀의 방으로 향하던데. 안 가볼 거야?”

사이러스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거길 왜 가야 하지?”

“그 애를 돕고 싶어 하잖아.”

“내가?”

사이러스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자네가.”

“언젠가 이용할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보모 노릇을 할 생각은 없어.”

“아하.”

아이작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사이러스는 무시했다.

두 남자가 귀족들의 얼굴을 눈에 담는 동안에, 아리아나는 하녀들에게 꾸밈을 당하고 있었다.

“헬레나 아가씨께서 선물로 주라고 하셨어……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말투로 퉁명스럽게 말한 하녀들은 잔뜩 가져온 드레스와 장신구가 들어 있는 상자를 좁은 방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그들은 아리아나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움직였다.

가져온 빗으로 거칠게 아리아나의 머리를 빗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을 해주었다.

아리아나는 거울 앞에 가만히 서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아리아나는 즐겁게 지켜봤다.

풍성한 하늘색 머리카락을 어린애처럼 양갈래로 땋았고, 원래의 하얀 피부색보다 어두운 톤의 분을 발라서 낯빛이 까매졌다. 눈썹은 너무 짙게 그리고 눈가를 붉게 칠한 데다가 볼에도 분홍색 분을 진하게 발랐다.

화장이 끝나고 나니 나이답지 않게 진한 화장을 한, 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드레스는 어린애도 안 입을 것 같은 노란색의 화려한 드레스로, 목과 팔을 완전히 가린 데다가 안에 입은 패티코트가 너무 넓게 퍼져서 어린아이가 멋을 부리려고 애쓴 것처럼 보였다.

‘헬레나의 하녀들이지만, 시킨 건 빅토리아겠지.’

빅토리아는 항상 그랬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자신은 늘 한 발 물러서서 다른 사람을 이용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주변 사람을 이용하고 휘두를 줄 알았다.

이번에도 아리아나의 차림새가 문제가 되면 ‘헬레나의 하녀들이 한 짓이다.’라며 뒤로 빠질 속셈일 것이다. 물론 아리아나에게 하는 짓들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지만.

화장까지 끝낸 하녀들이 장신구를 집어 들었다.

“내가 할게.”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아리아나가 입을 열자, 하녀들이 움찔했다.

아리아나는 하녀들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할 테니 나가 있으렴.”

하녀들은 당황했다. 아리아나가 둘째 공녀이기는 해도 지금껏 고용인들에게 이런 말투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용인들에게조차 눈치를 보며 존댓말을 써오던 아리아나의 돌변한 태도에 하녀들은 기분이 상했다.

“빅토리아 아가씨께서 저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너희는 헬레나 언니의 하녀들인 걸로 아는데.”

아리아나의 지적에 하녀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헬레나 아가씨와 빅토리아 아가씨께서 함께 지시하셨어요. 시간이 없으니 얼른 이 목걸이를…….”

“버릇이 없구나. 내가 하겠다고 말했을 텐데, 벌써 몇 번이나 주인의 말을 흘려듣는 거지?”

아리아나의 차분한 음성이 공기를 얼렸다.

그제야 하녀들은 아리아나 역시 브론테 가문의 공녀라는 걸 떠올렸다.

브론테 가문 모두가 아리아나를 학대하고 아리아나 또한 그런 취급을 받아도 화를 내지 않으니, 고용인들은 자연스럽게 아리아나를 무시해왔다. 아리아나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 하녀들의 눈앞에 있는 아리아나는 달랐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에 어린애 같은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아리아나에게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풍겨 나왔다.

헬레나나 빅토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서제후의 딸이자 공작부인인 레이첼조차 갖지 못한 위엄.

지난 삶, 아리아나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익힌 품위.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러드는 기세에 하녀들은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아리아나는 싸늘하게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사람을 불러 매를 때려야 내 말을 들을까?”

“아, 아닙니다. 하지만 아가씨, 빅토리아 아가씨께서 곧바로 데려오라 하셨는데…….”

하녀의 태도가 바뀌었지만 아리아나의 표정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내가 정원으로 가는 길도 모를까 봐 그러니?”

“그게 아니라…….”

“알아서 갈 테니 너희는 그만 가보렴.”

하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아리아나의 방에서 나갔다.

아리아나는 그들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 알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아리아나는 피식 웃고는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었다. 촌스럽기는 해도 좋은 천으로 만든 드레스로 얼굴을 문질러 화장을 닦아냈다.

원래 입고 있던 허름한 하녀복으로 갈아입은 후, 장신구 상자를 확인했다.

유행이 지나기는 했어도 값비싼 장신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헬레나와 빅토리아는 이 상자 안에 어떤 장신구를 넣어두었는지 기억도 못 할 것이다.

아리아나는 그중에서도 비싸 보이는 장신구 몇 개를 챙겨서 책상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두었다.

방에서 나가기 전, 아리아나는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점검했다.

‘잘해내야 해. 그 사람에게 내 현재 상태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야만 해. 이 저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마지막이야.’

아리아나는 오늘 파티에 참석할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귀족인 줄리아나 로벤타 공작부인.

로벤타 가문은 동제후와 친밀한 관계이고, 제국에서 꽤나 힘이 있어서 레이첼도 로벤타 공작부인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아리아나의 처지를 알게 된다고 해서 동제후 쪽에 사실을 알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설령 알린다고 해도 동제후가 아리아나를 구원해줄 리도 없다.

다만 동령과 아리아나를 연결해줄 아주 작은 끈은 되어줄지도 모른다. 적어도 동제후 앞에 섰을 때, 아리아나가 서령 측의 지시를 받아서 찾아온 거라는 의심은 품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건 곁가지일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오늘은 내가 저택을 벗어날 발판을 마련할 거야.’

레이첼이 더는 아리아나를 저택에 숨겨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

‘예전처럼 저택에 갇혀만 있다가 그 끔찍한 인간이랑 결혼하는 일은 없어야 해.’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오늘의 행동으로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아리아나가 미래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끝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반드시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예상대로 하녀들은 복도에서 아리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공들여서 꾸며준 보람도 없이 원래의 모습으로 나온 아리아나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가씨…… 왜 그렇게……?”

아리아나는 하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하녀들이 황급히 아리아나의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 이런 모습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나는 늘 이런 모습이었는데 뭐가 문제지?”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귀한 분들이 많이 오신 자리라서요. 이렇게 나가시면 큰일 나요.”

아리아나는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하녀 한 명이 아리아나의 팔뚝을 잡았다.

“아가씨!”

아리아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녀를 돌아봤다. 냉기 서린 푸른 눈동자가 하녀의 얼굴에서 붙잡힌 팔로 이동했다.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

서늘한 음성이 내리꽂혔다.

그 음성에 담긴 묵직한 위엄에, 하녀가 깜짝 놀라서 손을 떼었다.

아리아나는 하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너희는 주인 대하는 법을 다시 익히는 게 좋겠구나.”

하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인 앞에서 표정을 갈무리하는 법도 좀 배우도록 하고.”

하녀들은 다시 걷기 시작한 아리아나를 더는 붙잡지 않았다. 평소에 비굴하게 굴던 아리아나의 당찬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짜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고고하게 걸어가는 아리아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흥, 저런 꼴로 가서 창피나 실컷 당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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