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5) (10/238)


(10)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5)
2023.03.12.


“날씨를 조종하시나요?”

아리아나의 질문에 사이러스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 방금 떨어진 우박과 같은 크기의 얼음 조각들이 여러 개 생겼다가 사라졌다.

“간단한 마법이지.”

“신기하네요.”

“신기해하는 표정이 아니군. 그리고 나는 또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었지.”

“레이첼…… 어머니를 쫓아내주신 건가요?”

사이러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리아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그대는 왜 그 여자의 화를 돋운 거지?”

“그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여쭸을 뿐, 일부러 화를 돋운 게 아닙니다.”

“아하.”

그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북제후 전하께서 아직도 이곳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언질하신다면 마땅한 대접을 해드릴 텐데요.”

“대접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하지만 추운 날씨에 나무 위에서 주무시다가 입이라도 돌아가면, 전하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슬퍼할 겁니다.”

“그대는 슬프지 않고?”

“저도 매일 밤 울다가 잠들겠지요.”

“글쎄. 고소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예리하기도 해라.

아리아나는 속내를 감추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바쁘신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멈춰라, 무어라고도 부를 수 없고, 부를 일도 없는 자여.”

저건 또 무슨 소리람?

황당해하며 걸음을 멈춘 아리아나는 저장고에서 나올 때 사이러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엇으로도 부를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아직도 속에 담고 있을 줄이야.

아리아나가 당혹감을 감추고 침착하게 응시하자, 사이러스가 말했다.

“무어라고도 부를 수 없고, 부를 일도 없는 자여. 조언을 하나 해주고 싶군.”

“사양하겠습니다.”

“이건 빚으로 치지 않도록 하지.”

“그래도 사양하겠습니다, 전하.”

“무어라고도 부를 수…….”

“전하. 그냥 아리아나라고 불러주세요.”

아리아나가 한숨을 삼키며 말하자, 사이러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나. 그대는 눈빛을 갈무리할 필요가 있다.”

“네?”

사이러스가 가까이 다가와 아리아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손가락이 아리아나의 눈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도 연약한 몸으로 살기를 드러내봐야 죽음만 재촉할 뿐이지.”

“그러는 전하의 눈에도 살기가 가득하십니다.”

“나는 그래도 돼. 강하니까.”

“부럽네요. 저도 전하처럼 강하다면 제 심정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을 텐데요.”

“그대의 심정이 어떻기에?”

아리아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마치 해 뜰 녘 어둠을 밀어내는 햇살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공사가 다망한 전하께서 제 심정까지 알아둘 겨를이 있겠습니까? 부디 계획하신 일을 빠른 시일 안에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대의 일에 신경 끄고 서둘러 할 일을 끝낸 후 얼른 꺼지란 말인가?”

“그럴 리가요.”

아리아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하고 휙 돌아섰다.

사이러스는 우두커니 서서 아리아나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본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아리아나는 귀부인도 쉬이 갖기 힘든 우아한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치맛자락, 흔들림 없이 꼿꼿한 발걸음.

나무 위에 있다가 사이러스의 옆으로 뛰어내린 아이작이 말했다.

“저런 옷을 입고도 저렇게 우아할 수가 있다니. 어린애 같지가 않아. 말투도 영 어린애 같지가 않고.”

“16살이면 다 컸지.”

“16살 중에 저렇게 기품 있는 애를 본 적 있어? 아, 황녀는 그렇지. 자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하지만 둘째 공녀는 그렇지가 않잖아. 레이첼 브론테가 황실 사람이나 익힐 예법을 가르쳤을 것 같지도 않고.”

“…….”

“그나저나 사이러스, 또 저 애를 도와줬네.”

“말했다시피 은혜를 베푸는 거다. 그래야 나중에 이용하기 쉬울 테니.”

+++

아리아나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반짝거리는 창문에 비친 얼굴은 작고 연약하고 무심했으나 푸른 눈동자만은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자 눈동자에 피어오르던 증오와 살기가 사라졌다.

‘내가 이런 눈빛을 하고 돌아다녔구나.’

이 저택에서 아리아나의 기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으니, 눈빛에 증오가 담기든, 애정이 담기든 알아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이런 눈빛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아리아나의 속내를 눈치채는 순간이 올지도 몰랐다.

사이러스의 조언은 적절했다.

‘앞으로 좀 더 주의해야겠어.’

사이러스에게 이 눈빛을 들킨 게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약점이 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그는 북제후인데 브론테 가문 천덕꾸러기의 약점을 잡아서 어디에 쓰겠어?’

다만 그가 아직도 브론테 저택을 살피고 있다는 점이 거슬렸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했다. 미래를 안다고 해도 아리아나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뀔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

시간을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예상을 벗어난 인물을, 그것도 북제후를 상대하는 일이 생기는 게 걱정스러웠다.

‘언제 이 저택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만 며칠째야. 지난 삶에서는 이곳에 온다는 소문만 흘리고 아예 나타나지 않았지. 서령에 방문한다는 소문을 흘린 건, 몰래 활동하다가 남의 눈에 띄게 되었을 때 변명거리를 만들려고 한 거였나?’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브론테 저택을 염탐만 하다가 북령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좋은 의도로 브론테 저택을 관찰하는 건 아니겠지.’

사이러스와 브론테 가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아나는 거기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의 눈빛을 지적할 정도로 그녀에게 신경 쓰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불안했다.

‘이 시점에 북제후가 내 계획에 방해가 되면 힘들어질 텐데…….’

브론테 가문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북제후를 대응할 만한 힘은 아직 갖지 못했다. 그와 부딪칠 일이 더는 없기를 바라며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빅토리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해사한 금발에 선명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한 소녀였다. 서령 사람답게 피부색이 조금 짙었고, 레이첼을 많이 닮았다.

아리아나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빅토리아를 귀여워하고 믿었었다. 빅토리아가 그 속에 헬레나보다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빅토리아는 아리아나를 돕고 아끼는 척하면서 그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아둔한 헬레나를 조종해 아리아나를 자멸의 길로 몰아넣은 게 빅토리아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언니.”

빅토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아리아나에게 다가왔다.

아리아나는 빅토리아가 선량하고 애교스러운 미소 뒤에 어떤 생각을 감추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리아나의 앞에 선 빅토리아가 눈썹 끝을 늘어뜨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까 어머니한테 혼나는 것 같던데, 괜찮아?”

“응, 괜찮아.”

“……정말?”

“응.”

평소라면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을 아리아나가 미소 띤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하자, 빅토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그런 빅토리아를 보며 아리아나가 덧붙였다.

“나도 너처럼 어른스럽게 행동하면 어머니가 좋아해주실까?”

어리숙한 질문에 빅토리아는 안심하는 한편 당혹스럽기도 했다.

차분하게 행동하는 아리아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우아해 보였다.

낡은 옷과 제대로 빗지 않은 머리칼, 우울한 표정 때문에 가려져 있던 미모가 깊은 골짜기 뒤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서령 여인들이 부러워하는 동령인 특유의 새하얀 피부와 동제후를 반만 닮은 연하늘색 머리카락이 새삼스럽게 눈부셨다.

균형이 완벽한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이목구비와 고양이처럼 매력적인 눈매 안을 채운 푸른 눈동자.

‘얘가 이렇게 예뻤나?’

아리아나가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울상을 하고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닐 때는 그 아름다움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한때는 그 예쁨조차 질투했던 적이 있지만, 단지 외모만이 여자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아리아나를 향한 질투를 거뒀다.

어차피 아리아나가 사교계에 진출할 일도 없기에, 미모를 두고 아리아나와 겨루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겼다.

빅토리아에게 있어서 아리아나는 헬레나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날 따라 하게 놔둘 수는 없어.’

빅토리아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나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다들 언니를 좋아하는걸.”

“하지만 어머니는 나만 혼내시니까…….”

“언니,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매를 들라는 말 몰라? 어머니는 언니한테 기대하는 게 커서 그러시는 거야.”

“정말 그럴까?”

“그럼. 언니, 괜한 생각하지 말고 내 방에 가자. 어제 아버지가 맛있는 쿠키를 사다주셨거든. 언니랑 같이 먹으려고 남겨뒀어.”

“좋겠다. 아버지가 쿠키도 사다주시고…….”

아리아나의 팔짱을 끼고 옆에서 걷던 빅토리아는 아리아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부러움을 표현하는 아리아나의 얼굴에는 한 조각의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아직 미숙하구나, 빅토리아.’

죽을 때까지 빅토리아에게 휘둘린 것 때문에 빅토리아를 거대한 산처럼 느꼈다. 빅토리아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속내를 감추고 뒤에서 사람들을 조정해왔을지 궁금했다.

내일 가든 파티에서 있을 사건은 빅토리아가 주도한 것이 틀림없지만, 허점이 많았다.

지금 아리아나를 대하는 빅토리아의 행동 역시 아직은 여물지 않았다. 아리아나가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것뿐인데도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빅토리아를 보며, 아리아나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빅토리아의 방은 아리아나가 지내는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호화로웠다.

응접실과 욕실, 드레스룸이 딸린 넓은 방.

지난 삶, 아리아나는 빅토리아의 방에 들어올 때마다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곤 했다.

빅토리아가 먼저 티테이블 옆에 있는 하얀 의자에 앉아서, 아리아나에게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아리아나가 그렇게 하자, 빅토리아가 하녀를 불러 차와 쿠키를 내오라고 시켰다. 하녀가 가져온 은쟁반 위에는 평소에 아리아나가 만져볼 수 없었던 귀한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하녀가 쟁반을 내려놓자 빅토리아는 하녀를 내보내고 직접 아리아나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하얀 찻잔에 가득 담긴 홍차는 뽀얀 김이 올라올 정도로 뜨거웠다.

빅토리아가 명령조로 말했다.

“마셔.”

아리아나가 순순히 찻잔을 들고 김이 올라오는 홍차를 식히기 위해 후후 바람을 불자, 빅토리아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니야, 언니. 그렇게 마시면 안 돼. 아무도 언니에게 차를 마시는 매너를 가르쳐주지 않은 거야?”

빅토리아는 안쓰럽다는 듯 아리아나의 무례를 지적했다.

지난 삶과 똑같았다.

그때, 아리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빅토리아는 그런 아리아나를 즐거운 듯 지켜봤었다.

이번에도 아리아나는 조금 허둥거리는 척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너무 뜨거운걸.”

“언니, 이게 왜 있을 것 같아?”

빅토리아가 찻잔 받침을 가리켰다.

아리아나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쳐다보기만 하자, 빅토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빅토리아는 찻잔을 기울여 찻잔 접시에 차를 조금 따랐다.

그리고 홍차가 찰랑거리는 찻잔을 들어서 후루룩 마셨다.

“이렇게 찻잔 받침에 따라서 조금 식힌 후에 큰 소리를 내며 마셔야 해. 소리가 커야 차를 대접해주는 사람에게 이 차가 참으로 맛있다고 알리는 게 되거든.”

아리아나는 재미있는 연극을 보듯 빅토리아를 지켜봤다.

‘날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구나,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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