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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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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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4)
2023.03.11.
“북제후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실까? 가든 파티에 맞춰서 도착하시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날은 수도의 귀족들도 오기로 했으니까 그쯤에 맞춰서 도착하시지 않을까?”
“엄마가 북제후께도 초대장을 보냈을까?”
“보내셨겠지. 언니가 그렇게 졸랐는데. 그나저나 아리아나가 좀 불쌍하네.”
빅토리아의 말에 헬레나가 인상을 구겼다.
“걔가 뭐가 불쌍해?”
“그렇잖아. 파티 매너도 하나도 모르고……. 그 애도 북제후 전하께서 참석하는 파티에 오고 싶을 텐데, 데려와줄 사람도 없고. 하긴, 온다고 해도 창피만 당하겠네.”
아리아나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헬레나가 잠시 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생긋 웃었다.
“아리아나도 파티에 참석하게 시킬까? 북제후 전하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하는 거지.”
“언니, 어머니는 아리아나를 다른 귀족들에게 보이는 걸 싫어하셔.”
“하지만 걔가 바보처럼 굴어서 창피를 당하면 좋아하실걸? 어머니가 저번에 이모한테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걔가 멍청하게 굴어서 조롱당할 때마다 동제후가 조롱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하셨어.”
“아무리 그래도…….”
“됐으니까 넌 빠져. 내가 알아서 할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헬레나를 보며 빅토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레이첼이 아리아나가 조롱당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집안사람들 앞에서만이다.
다른 귀족들에게까지 아리아나의 멍청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리아나는 레이첼의 친딸이고, 브론테 가문의 공녀이기는 하니까.
하지만 그 사실까지 헬레나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헬레나가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할수록, 헬레나를 향한 레이첼의 관심과 애정도 돌아설 테니.
+++
북제후와 마주친 이후 며칠간, 아리아나는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북제후의 등장으로 무겁던 마음도 이제는 차분해졌다.
요 며칠 북제후가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끝내고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나는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쾌청한 하늘이 펼쳐졌다.
배탈 사건 때, 노부인은 레이첼에게 아리아나의 옷을 갈아입히라고 명령했지만, 레이첼은 그러지 않았다. 노부인 또한 그 명령을 내렸던 걸 잊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잊었겠지.’
노부인은 눈앞에 있기에 관심을 주었을 뿐, 돌아서는 순간 가문의 애물단지 따위는 머리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어차피 지속적인 관심은 기대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얇고 해진 옷 사이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왔지만, 아리아나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드디어 내일인가?’
내일은 브론테 공작저에서 가든 파티가 열린다.
말이 가든 파티지, 날씨가 추워 정원의 커다란 온실 안에서 이국의 꽃과 나무를 구경하며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게 전부다.
이런 날씨에 무리해서 가든 파티를 여는 이유는 몇 달 후의 사교 시즌 때 헬레나가 데뷔탕트를 치르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데뷔탕트 전에 헬레나에게 수도의 좋은 가문들과 인맥을 맺어주고 싶어 했다.
수도의 귀족들과 연을 맺어둔다면, 데뷔탕트를 치르는 파티에서 그들이 헬레나의 뒤를 보아줄 터였다.
레이첼은 철없는 헬레나가 파티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녀를 감싸주는 사람이 많다면 오히려 헬레나의 평판이 올라갈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랬었다.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한 헬레나가 혹시 북제후가 왔을지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남자와 부딪쳐서 들고 있던 잔을 쏟았던 일이 있었다.
그때 수도의 귀부인이 웃으며, “어머나, 귀엽기도 해라. 공녀님이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라고 말해준 덕에, 다들 헬레나의 실수를 귀엽게 여겨주었다.
-“내가 그때 귀엽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알아?”
파티에서 돌아온 헬레나는 아리아나를 찾아와서 그 일을 자랑하듯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때는 그게 참 부러웠었지. 귀엽다는 말로 조롱하는 건 줄도 모르고.’
아리아나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지난 삶의 오늘, 아리아나는 골방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오랜만의 자유에 들떠서 정원에 나갔다가 레이첼을 마주쳤고, 함부로 돌아다닌다며 뺨을 맞았던 일이 있었다.
아리아나는 이번에도 레이첼에게 맞아줄 생각이었다. 전보다 더 가혹하게. 이 몸에 학대의 증거를 똑똑히 남길 예정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아리아나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은 아리아나를 보고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레이첼을 만나면 아리아나가 몰래 밖으로 나갔다고 일러바칠 것이다.
아리아나는 보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천천히 걸어서 후원으로 향했다.
저택 뒤에 펼쳐진 정원은 아직 추워서 황량했지만,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화사하게 자태를 뽐내게 될 터였다.
자갈길을 밟고 걸어가던 아리아나는 작은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나무 아래의 작은 연못은 꽁꽁 얼어 있었다.
‘내 마음 같구나.’
아리아나의 심장 역시 차게 얼어 있었다.
잠을 자면 악몽을 꾸었다.
아니, 꿈이 아니다. 지난 삶에서 아리아나에게 벌어졌던 현실이 잠을 자는 동안 되풀이되었다.
단지 가족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고,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만 했던 불쌍하고 아둔한 여인의 삶.
지독히도 고독하고 아팠던 그 삶을 아리아나는 되살아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꿈에서 지난 삶을 볼 때마다 가장 원망스러운 건, 레이첼도, 헬레나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주어지지 않을 것을 소망하며 낙엽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모두에게 버림받고 죽은 자신이 가장 원망스럽고 한심했다.
“아리아나!”
뾰족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레이첼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리아나를 향한 레이첼의 녹색 눈동자에는 짜증과 분노만 가득했다.
‘짐승도 제 자식은 예뻐하는데…….’
한때는 레이첼이 친모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언젠가 진짜 친어머니가 찾아와서 “널 잃어버리고 매일 밤 널 찾기만을 기도했단다.”라고 말하며 안아주는 꿈을 꿨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숨겨진 친어머니 따위는 없었고, 레이첼 브론테는 아리아나의 친모가 맞았다.
제 배로 품다가 낳은 자식이 그저 싫어하는 사내를 닮았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다는 걸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당신이 날 싫어해? 그렇다면 나도 온 힘을 다해서 당신을 싫어해 주겠어.
“내가 멋대로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지?”
아리아나의 앞에 멈춘 레이첼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리아나는 레이첼을 빤히 올려다봤다.
연한 하늘색 머리칼과 새파란 눈동자, 진주처럼 하얀 피부와 자그마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레이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서령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딸은 젖 한번 물려주지 못한 채 다른 여자의 손에 맡겨놓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가졌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아리아나가 싫었다. 태어난 후 그 작은 육체를 품에 안았을 때는, 두고 온 헬레나가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서령을 위해 이용당한 분노를 아버지인 서제후나 동제후에게 풀 수는 없었지만, 아리아나에게는 가능했다.
서제후를 향한 원망과 동제후를 향한 혐오가 고스란히 아리아나에게로 향했다.
서제후가 ‘나중에 쓸모 있을 테니 아리아나를 데려오라.’는 명령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리아나를 곁에 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 후에야, 레이첼은 자신이 저도 모르게 아리아나의 뺨을 때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미안함은 없었다.
아리아나에게는 이래도 된다. 열 달간 뱃속에 넣고 있다가 낳아줬으니, 이 정도 화풀이는 해도 된다.
“어디서 감히 똑바로 쳐다봐?”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언제나처럼 몸을 움츠리고 용서를 빌기를 기다렸다. 아리아나가 구걸하듯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면, 오만한 동제후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레이첼이 기대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뺨을 맞을 때 돌아간 얼굴을 바로 하고 레이첼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제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데도 허락을 구해야 하나요?”
“뭐……?”
예상치 못한 아리아나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다면 헬레나 언니와 빅토리아와 조이슨도 어머니를 볼 때마다 허락을 구하나요?”
사자가 토끼에게 공격받으면 당황해서 잠시 아무것도 못 하듯, 레이첼도 멍하게 제 딸을 내려다봤다.
이윽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레이첼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아리아나를 발로 걷어찼다.
퍼억-! 퍽-!
정강이를 아프게 걷어차는 발길질에도 아리아나는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조용히 레이첼이 하는 짓을 지켜봤을 뿐이다.
아픈 내색 하나 없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아서, 레이첼의 발길질이 점점 심해졌다.
“너는, 정말이지,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꼬집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지만, 아리아나는 용서를 구하지도, 아프다고 울지도 않았다.
숨이 가빠질 만큼 아리아나를 때린 후에야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너, 오늘…….”
그때 쾌청한 하늘에서 무언가 작고 단단한 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박이었다.
“꺅!”
우박에 맞은 레이첼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레이첼은 그 와중에도 아리아나를 쏘아봤다.
“넌 계속 거기 있어!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거기서 반성해!”
우박이 쏟아지는 데도 레이첼은 제 딸을 놓아두고 혼자서 본채로 돌아가 버렸다.
레이첼은 서두르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수히 떨어지는 우박이 이상하게도 아리아나에게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자신을 피해서 떨어지는 얼음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저기 각이 진 얼음 조각은 단단하고 은근히 무거워서 맞으면 아플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손바닥에 떨어진 얼음 조각 두 개를 꽉 쥐어보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검은 인영이 소리도 없이 뛰어내렸다.
아리아나는 얼음 조각을 손에 쥔 채로 두 눈을 깜빡거리며 상대를 응시했다.
어디에 있어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은빛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넓은 어깨가 눈에 띄는 훤칠한 사내. 앞으로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북제후 사이러스가 아리아나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난번처럼 검은색 슈트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아리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살며시 손을 들어 올리자, 하늘에서 떨어지던 우박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