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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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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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3)
2023.03.10.
아리아나는 방에 돌아온 후에야 음식을 하나도 챙겨오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챙겨오려고 했던 음식들은 진열대 아래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사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속이 답답해졌다.
‘이렇게 빨리 북제후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전과 다르게 살다 보면 언젠가 북제후나 남제후를 만날 일도 생길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브론테 공작저택에 몰래 들어온 북제후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북제후가 이 저택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북제후와 브론테 공작 사이에는 친분이 전혀 없었다.
지난 날을 떠올려 봐도 브론테 공작이나 레이첼이 북제후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은 없다.
‘아, 헬레나…….’
이 시기쯤에 헬레나가 북제후와 결혼하고 싶다고 떠들어댔던 일이 떠올랐다.
헬레나는 어느 상단이 서령에 머무는 동안 팔던 북제후의 초상화를 보고 나서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북제후에게 청혼서라도 보내달라고 졸라서 레이첼과 브론테 공작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북제후라면 신분도 걸맞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남자잖아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시기쯤 복도 청소를 하다가 헬레나가 칭얼거리던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백작 이상 가문의 영애가 상대에게 먼저 혼담을 넣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알려지면 웃음거리만 되는 일인데도 헬레나는 그렇게 철부지처럼 굴었다.
‘설마 헬레나가 졸라서 북제후에게 청혼서를 보냈나? 그래서 북제후가 헬레나에 대해 알아보다가 헬레나 탄생의 진실까지 알아내고 더 자세한 사정을 알기 위해 숨어들어온 건가?’
가능성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까 마주친 사이러스의 눈빛을 떠올리면 그런 이유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감추려 했겠지만, 아리아나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증오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진열대 사이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있을 때에도 아리아나를 향한 눈동자에는 싸늘한 혐오뿐이었다.
그런 사내가 단지 혼담이 들어온 상대를 알아내기 위해 브론테 공작저택에 숨어드는 짓을 할 리는 없다.
아리아나가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곤란해.’
북제후는 어려운 상대였다.
아직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제후와 척을 지게 되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지장이 생긴다.
북제후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와 엮이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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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는 서령 출신답게 약간 색이 짙은 피부에 쌍꺼풀이 진한 눈, 검은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를 가졌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동제후를 닮은 아리아나나 레이첼을 닮은 빅토리아에 비하면 아버지인 제이콥을 많이 닮아서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녀는 산뜻한 분위기의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복도에 서서 아리아나가 머무는 방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헬레나를 본 고용인들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아리아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아리아나.’
어제 처음으로 아리아나 때문에 어머니 레이첼에게 혼났다.
레이첼이 헬레나 앞에서 굳은 표정을 지은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아리아나, 아리아나.’
아리아나를 향한 헬레나의 마음은 미묘했다.
헬레나가 출생의 비밀을 알기 전에는 아리아나보다 빅토리아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남작 영애 출신의 어머니를 가진 헬레나.
동제후의 딸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따라와서 아버지가 다른 아리아나.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가정을 갖게 된 빅토리아. 심지어 빅토리아는 레이첼을 많이 닮아서 예쁘기까지 했다.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이 아리아나를 차별한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더 싫은 쪽은 빅토리아였다.
오히려 아리아나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래서 빅토리아가 가진 걸 뺏고 부모님의 눈을 피해서 괴롭혔는데, 그 사실을 눈치챈 레이첼은 혼내기는커녕 헬레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빅토리아는 네 하나뿐인 동생이야, 헬레나.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야지. 속상한 일이 있다면 차라리 아리아나에게 풀렴. 아리아나는 네가 화내도 다 받아줄 거야.”
당시에 헬레나는 레이첼이 친딸들보다 자신에게 더 잘해주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레이첼이 아리아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눈치챘다.
똑같은 실수를 해도 아리아나는 몇 배나 더 혼났고, 때때로 방에 갇혀 이틀에 한 번씩만 들어오는 식사를 하며 내내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리아나가 불쌍했지만, 부모님의 냉랭한 태도는 자식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그렇게 아리아나는 헬레나에게 있어서, 기분 안 좋을 때는 화풀이를 해도 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리아나가 안쓰럽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기분이 내킬 때는 아리아나를 몰래 챙겨주기도 했다.
레이첼이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딸을 낳자마자 어쩔 수 없이 동제후와 결혼하기 위해 서령을 떠나야만 했던 어머니. 이름 없는 남작의 영애 출신에게서 태어난 척 키워져야만 했던 헬레나.
-“불쌍한 것.”
비밀을 이야기해주며, 레이첼은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헬레나는 자기 자신이 정말로 너무도 불쌍했고, 그 모든 원망이 아리아나에게로 향했다.
따지고 보면 아리아나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헬레나는 어릴 때부터 세뇌당하듯 ‘아리아나에게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네 동생은 빅토리아뿐이야.’라는 말을 듣고 살아왔다.
헬레나도 모르는 새에 아리아나와의 사이에 세워진 벽은 아리아나를 철저한 타인으로 만들었고, 헬레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가족이 아닌 아리아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만 정상적인 부모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빅토리아도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그보다는 아리아나가 더 싫었다.
-“그 애를 낳고 싶지 않았단다. 정말 낳고 싶지 않았어.”
레이첼은 헬레나를 꼭 끌어안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서령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만 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태어난 주제에 브론테 공작가에서 둘째 공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아리아나가 점점 미워졌다.
어제 아리아나가 노공작부인 앞에서 모든 걸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바람에, 루이지는 매를 맞고 골방에 갇혔고 헬레나는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
게다가 아리아나는 아무것도 없던 골방에서 벗어나 침대까지 딸린 좋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네 주제에 그 방이 가당키나 할 것 같아?’
헬레나는 아리아나가 브론테 가문의 것을 하나라도 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방에 들어가서 아리아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어제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노부인이 돌아갈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고 했다.
헬레나가 주먹을 꽉 움켜쥐는데 빅토리아가 다가와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었다.
“언니,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헬레나는 또래에 비해 유독 조숙한 빅토리아를 노려봤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빅토리아는 약간 어두운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져서 사랑스럽고 청초해 보였다.
“너 때문에 엄마한테 혼났잖아.”
빅토리아는 어린애처럼 말하는 헬레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헬레나는 빅토리아보다 3살이나 많으면서도 어린애처럼 굴곤 했다. 레이첼이 헬레나를 제멋대로 굴게 키운 탓이었다.
헬레나의 비밀을 모르는 빅토리아는 레이첼의 태도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친딸인 나와 아리아나보다 전공작부인의 딸인 헬레나를 더 아끼는 걸까?’
그런 의문이 어린 빅토리아를 두렵게 만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 또한 부모님의 눈 밖에 나서 아리아나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어떻게든 헬레나보다 부모님에게 더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초조감.
그런 것들이 빅토리아를 또래보다 조숙하게 만들었다.
항상 부모님의 기분을 살피며 살아온 빅토리아는 눈치가 빠르고 머리 회전이 남달랐다.
“응? 나 때문에? 아, 혹시 어제 루이지의 일을 말하는 거야?”
“그래.”
“언니,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지. 네가 그 애한테 썩은 음식을 먹이는 게 좋겠다고 했잖아. 걔가 그걸 먹고 쓰러지는 바람에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고.”
‘엄청 혼났다’는 말에 빅토리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한테 많이 혼났어? 속상했겠다, 언니. 어떡하면 좋아. 하지만 언니, 나는 그냥 아리아나가 상한 음식이나 먹고 사는 게 어울리는데, 엄마가 여기로 데려온 덕에 호의호식한다고 말했을 뿐이야. 그래도 내 말 때문에 언니가 엄마한테 혼난 것 같으면 내가 너무 미안해.”
빅토리아가 순순히 사과하자, 헬레나는 기분이 좀 풀린 듯 입술을 비쭉거렸다.
빅토리아는 어린애처럼 다루기 쉬운 제 언니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빅토리아가 헬레나의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언니, 진짜 속상하긴 속상하겠다. 이게 전부 아리아나 때문이잖아. 아리아나가 할머니한테 전부 일러바쳐서……. 언니가 그렇게 잘해주는데도 아리아나는 고마움도 모르고, 할머니한테 다 일러바친 거잖아.”
“그러니까!”
“아리아나 때문에 루이지도 골방에 갇혔고, 언니는 시녀가 한 명 사라져서 불편해졌는데 걔는 좋은 방에서 편하게 누워 있겠지?”
“아, 진짜 싫어! 걔는 동령에나 갈 것이지, 왜 여기 남아서 분란을 일으키는 거야?”
빅토리아는 레이첼이 굳이 아리아나를 데리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딸은 좋은 가문과 연을 맺어 가문의 힘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밑거름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필요한 힘은 가졌지만, 평판이 좋지 않아서 소중한 딸을 시집보내기는 아쉬운 집안이 있다.
아리아나는 나중에 그런 집안에 시집가게 될 것이다.
헬레나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응접실 벽에 걸린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은빛 머리칼과 하얀 피부, 매서운 눈매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의 초상화였다.
귀족 영애가 외간 남자의 초상화를 공공연하게 걸어두는 건 창피를 당해 마땅한 일인데도, 헬레나는 민망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헬레나는 빅토리아를 옆에 두고도 황홀한 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고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우시지 않니?”
“응, 그러게. 정말 멋지시네. 하지만 정말 그 초상화처럼 생겼을까? 요새 귀족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실제보다 더 근사하게 그려달라고 한다잖아.”
“북제후는 달라. 초상화보다 훨씬 멋있다고들 하더라.”
“그건 북제후께서 서령에 도착하면 확인할 수 있겠지?”
빅토리아가 은근히 흘린 말에 헬레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