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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3) (7/238)


(7)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 (3)
2023.03.09.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리아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등에 닿아 있는 사이러스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아까 아리아나의 입을 막았던 손처럼 아리아나의 등을 누르고 있는 손도 차가웠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원피스 안으로 냉기가 파고들어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슬그머니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는데, 그의 붉은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었군. 그대는 이제 내게 빚이 생겼어.”

생각지 못한 말에 아리아나는 기가 막혔다.

그가 야밤에 저장고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무슨 망발이람.

하지만 아리아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대꾸했다.

“북제후 전하께서 바란 적 없는 은혜로 빚을 지우는 분인 줄은 몰랐네요.”

“알 리가 없지.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으니. 이제부터 알아두는 게 좋겠어.”

“앞으로 만날 일 없으니 이 이상 알아둘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글쎄. 미래가 어찌 될지는 그대도, 나도 모르지 않나?”

아리아나는 고개를 바짝 들고 그를 노려봤다.

사이러스는 여인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냉기가 감도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과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가 그 눈에 또아리를 튼 냉혹함을 감춰주었다.

만약 아리아나가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의 말에 설렜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고 죽임까지 당했던 아리아나의 심장은 달의 신처럼 아름다운 사이러스의 친절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북제후께서 제게 원하시는 게 있는지요.”

“공녀 취급도 받지 못하는 그대가 내게 줄 것이 있나?”

“오늘 처음 만났는데 전하께서는 저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모르는 게 없지.”

“부럽네요. 저는 모르는 것들뿐인데.”

“그렇다면 또 한 번 은혜를 베풀어줄까?”

“전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원하는 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 그들에게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모친이 어찌하여 친딸인 그대보다 첫째 공녀를 더 아끼는지 궁금하지 않나?”

아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레이첼이 헬레나에게 유독 약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다.

그 비밀을 얼마나 꽁꽁 감추고 있었는지, 3황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런 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아는 거지?’

아리아나는 사이러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이 저택에 숨어들어온 속셈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와 엮이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의도는 알아둬야 앞으로 대처하기 쉬울 테니까.

그래서 순순히 대답했다.

“부디 귀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귀한 가르침의 대가로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거지?”

“공작가에 갇혀서 하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사이러스가 검지로 아리아나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아리아나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대는 그대가 처한 상황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군.”

“부끄러워할 쪽은 제가 아니니까요.”

사이러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과하게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제야 아리아나는 아직도 그와 저장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데, 아리아나의 귓가에 가까워진 그의 입술 사이로 낮고 은밀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헬레나는 전공작부인의 소생이 아니지.”

아리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은 레이첼 브론테의 친딸이야.”

사이러스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서제후와 레이첼, 제이콥, 그리고 노공작부인과 헬레나가 철저하게 감춘 진실.

“놀랍나?”

“놀랍네요.”

“별로 놀라워하는 것 같지 않는데.”

“너무 가까이 계셔서 제 얼굴을 보지 못하시니, 제 놀라움도 간파하지 못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깊이 묻지 않는군. 이미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요. 그저 너무 놀라서 제때 표현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헬레나의 출생의 비밀까지 아는 사이러스가 아리아나의 처지를 모를 리 없었다.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아리아나가 그들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수상쩍은 일일 테니, 아리아나는 조금 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기로 했다.

“어떻게 헬레나가 제 모친의 친딸일 수 있지요?”

“딱히 궁금해하는 것 같진 않지만 답해주지. 레이첼은 동제후와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에 이미 제이콥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어.”

레이첼을 동제후와 결혼시킬 예정이었던 서제후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크게 분노했다. 당장 의사를 불러서 아이를 떼게 하려 했지만, 레이첼과 제이콥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레이첼은 아이를 죽이면 자기도 죽겠다며 서제후를 협박했지. 어떻게든 레이첼을 동제후에게 보내야만 했던 서제후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서령 시골에서 남작 작위만 갖고 있는 이름 없는 귀족의 딸을 찾아내 데려오지.”

우드 남작가의 마리안느.

브론테 공작의 첫 번째 부인.

힘없는 가문의 마리안느는 서제후의 명을 받들어 제이콥과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임신한 척했고, 레이첼이 낳은 헬레나를 자신이 낳은 딸로 키웠다.

레이첼은 아이를 낳자마자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동령으로 시집을 갔고, 마리안느는 감시 속에서 공작부인의 역할을 해냈다.

레이첼이 다시 서령으로 돌아올 때까지.

“레이첼이 돌아올 무렵, 제이콥은 마리안느와 이혼했지. 제이콥은 마리안느가 부정을 저질러 이혼하고 시골로 돌려보냈다고 했지만, 마리안느는 우드 남작 저택에 도착하지 못했어.”

힘없는 우드 남작은 감히 브론테 공작에게 제 딸의 행방을 묻지 못했다. 아마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은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죽음뿐이니 침묵하고 있을 뿐.

아리아나를 낳고 돌아오자마자 제이콥과 재혼한 레이첼은 금슬이 얼마나 좋은지 곧바로 임신하여 빅토리아를 낳았다.

하지만 레이첼에게 아픈 손가락은 헬레나였다.

“마음이 쓰이겠지. 헬레나는 서제후 쪽의 혈통인데도 고작해야 시골 남작 영애의 태생인 걸로 되어 있으니.”

“그래서 셋째인 빅토리아보다도 헬레나에게 더욱 약한가 봅니다.”

레이첼은 헬레나가 비밀을 지킬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진실을 알려주었다.

사실을 알게 된 헬레나는 레이첼과 제이콥을 원망하기보다는 아리아나를 미워하는 쪽을 택했다.

아리아나 때문에 자신이 서제후의 혈통이라는 것도 밝히지 못하고, 마리안느의 딸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리아나 또한 그리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도.

“제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대가 앞으로 하려는 일에 관심이 있어서.”

“저는 그 무엇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네, 전하. 저는 고작해야 공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여인일 뿐인걸요.”

아리아나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등을 고정하고 있던 그의 손바닥이 쉽게 떨어졌다.

아리아나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후 단정한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북제후 전하를 뵙게 되어 일생에 한 번뿐인 영광을 누렸습니다.”

“일생에 한 번뿐이라.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알아들으셨으면 모르는 척 넘어가는 매너도 보일 줄 아셔야지요, 전하.”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내게 매너 따위는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텐데.”

“소문은 소문일 뿐,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직접 보고 들은 나는 어떻지?”

아무래도 사이러스는 이대로 아리아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리아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를 평가하겠습니까? 다만, 무한한 영광은 제게 한 번으로도 과해서 몹시 피로하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또 붙잡기 전에 자리를 뜨려고 얼른 발을 떼려 했다.

“브론테 둘째 공녀.”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처음으로 들어보는 호칭에 아리아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노려봤다.

내내 고요하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화염이 깃든 듯 타오르는 것을, 사이러스는 조용히 지켜봤다.

“저는 브론테도, 공녀도 아닙니다.”

“그럼 그대를 뭐라 불러야 하지?”

“무엇으로도.”

아리아나의 입가에 찬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부를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

사이러스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리아나가 주방을 나가서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저장고를 빠져나왔다.

저장고 바깥에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있던 아이작은 못 볼 걸 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이러스……. 대체 뭘 한 거야?”

아이작은 제 눈으로 본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사이러스는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데도 저장고에 들어가더니,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는 데도 아리아나와 수다를 떨었고, 굳이 몸을 밀착시킬 필요가 없는데도 아리아나를 바짝 끌어당겨 은신 마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아리아나가 싫은 티를 팍팍 내는 데도 저잣거리의 바람둥이처럼 계속해서 수작을 거는 데다가, 어렵게 알아낸 브론테 가문의 비밀까지 다 털어놓았다.

사이러스를 앞에 두고도 냉랭한 아리아나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러스의 태도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떨어져서 저 멀리 굴러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리아나를 대하는 사이러스의 태도는 이례적이었다.

아이작이 경악에 찬 것과 달리 사이러스는 차분했다.

“저 여자는 이용 가치가 있어.”

그 대답조차 아이작에게는 답이 되지 않았다.

단지 이용 가치가 있어서 수작을 걸고, 비밀을 나불거린다고? 천하의 사이러스 카르하가?

사이러스가 어떤 인물인가?

이용 가치가 있다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고문을 해서라도 이용할 만한 것을 뽑아내는 성격이다.

필요하다면 황제에게도 검을 들이댈 수 있는 사이러스가 브론테 가문에서 하녀 취급을 받는 여인에게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하며 노닥거리다가 나와놓고 이용 가치를 운운하다니.

‘어디 아픈가? 서령 물이 안 맞나?’

사이러스의 건강이 걱정될 만큼, 아이작은 당혹스러웠다.

아이작의 시선을 느낀 사이러스가 물었다.

“왜?”

“혹시 어디가 좀 안 좋은 거 아냐? 머리가 좀…… 아프다거나?”

“제정신이다.”

사이러스는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변명하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사이러스도 아리아나의 목을 움켜쥐고 아는 것을 토해내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게 자신이 가진 패를 내어놓을 것 같지 않았다.

고작 16살의 소녀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아리아나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이러스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 잠깐 눈동자가 흔들렸던 걸 제외하면, 아리아나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사람도 ‘소문의 북제후’를 앞에 두고 그토록 냉정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북제후 전하께서 이런 시간에 브론테 공작저를 방문하실 줄은 몰랐네요. 미리 알았다면 모두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당혹감을 감추자마자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아리아나에게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떠보기 위해 알아내기는 어려웠지만 큰 쓸모는 없는 헬레나 탄생의 비밀을 언급했는데, 아리아나는 이미 그 진실을 아는 것 같았다.

저택에 갇혀서 학대를 당하는 소녀가 서제후와 레이첼, 제이콥이 철저하게 감춰온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 쉽게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아리아나가 숨기고 있는 것을 손에 넣는다면, 앞으로 서제후와 동제후를 상대하는 일이 더 쉬워질 것이다.

‘쓸모가 없다면 그때 가서 버리면 될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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