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여운 영애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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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4.
라탄 210년 2월.
서령 귀족들, 특히 여인들은 북령의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가 조만간 서령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들썩거리고 있었다.
역대 제후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제후 자리에 앉은 사이러스에게는 많은 소문이 따라다녔다.
그중 여인들을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그가 마치 밤하늘에 고고하게 떠 있는 달처럼 아름답다는 소문이었다.
사이러스의 방문 사실이 알려진 후, 서령 여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에 관해서 떠들어댔다.
“얼굴이 마치 진주처럼 곱대요.”
“제국 수도의 샤를로트 황녀도 북제후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준다고 하더라고요.”
“어두운 곳에서도 그 은빛 머리카락이 달처럼 반짝인대요.”
“눈동자는 또 어떻고요. 루비 같다더라고요. 시중에 몰래 떠도는 초상화도 북제후의 미모를 전부 담지는 못한다던데요.”
“저는 북제후가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고 싶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멋진 얼음 조각을 만들어낸다는 게 사실일까요?”
“마법이라니…… 북제후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얼음꽃을 만들어준다면 여한이 없을 거예요.”
그런 말을 떠들어대는 여인들도 기대하는 일이 벌어질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북제후 사이러스는 그 외모는 천상에서 내려온 듯 아름다우나 그 안에 든 것은 마치 지옥의 지배자처럼 잔혹하고 서늘하기로 유명했다.
“밤에 허락도 없이 정원으로 숨어든 무희를 그 자리에서 죽였대요.”
“샤를로트 황녀가 인사를 건네도 무시하기 일쑤라던데요.”
“사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는 거 아세요? 늘 아이작이라는 연금술사를 데리고 다니잖아요.”
“황제 폐하께서도 북제후 전하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실 정도인데, 우리 같은 사람은 가망이 없겠죠.”
서령 사교계를 들썩거리게 만든 사이러스는 이미 서령 귀족인 브론테 공작 저택에 숨어 들어와 있었다.
사이러스는 공작 저택 부지 안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소문의 주인공인 아이작도 함께 있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서 나뭇가지는 이파리 없이 앙상했지만, 공작 저택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누구도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이러스는 굵은 나뭇가지에 편하게 앉아서 어느 창문 안쪽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방 안에 있는 인물을 보는 눈동자는 더없이 냉랭하고 날카로워서,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베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이러스와는 달리 흥미진진한 눈빛이던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저 애가 동제후와 레이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가? 몰골은 엉망이지만 예쁘게 생겼네. 가만 보면 동제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
“그나저나 저 애도 참 가여워. 동령에 남아 있었다면 공주였을 텐데, 서령에 와서 저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니…… 브론테 공작부인은 참 가혹하기도 하지. 저게 자기 친딸에게 할 짓이야?”
아이작의 말대로 창문 너머의 어린 소녀는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서 헝클어진 머리, 굶주려서 마른 몸. 그나마 입은 하녀 옷은 너무 작아서 팔과 다리가 껑충하게 드러났다.
침대도 없이 책상 하나만 있는 방이 그녀의 방으로, 그녀는 며칠째 저 방에 갇혀 밖에 나오지도 못했다.
잠긴 창문으로 잠시 밖을 내다보거나 하루 걸러서 한 번씩 들어오는 식사를 하는 게 그녀의 하루 일과였다.
사람이라면 응당 동정심을 품을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녀를 지켜보는 사이러스의 눈동자에는 냉기만 감돌았다.
아이작은 자신의 주군이자 오랜 친구인 사이러스를 돌아봤다.
“저 애가 자네 부모님의 원수와 원수일지도 모르는 사내의 딸이라고는 해도, 저 애한테는 죄가 없어. 쟤가 뭘 알겠어?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는 것 같은데.”
“글쎄.”
처음으로 사이러스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붉은 입술이 서늘한 곡선을 그려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이러스가 그녀를 보면서 느낀 감상은 아이작과 달랐다.
겉만 보기에는 동정을 받아 마땅한 처지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았다.
16살의 소녀답지 않은 무심한 눈빛, 식사를 가져오는 하녀의 무례한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 때때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에게서는 알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동제후와 레이첼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싫은데, 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자태는 사이러스의 기분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 안에, 사이러스가 짐작도 하지 못할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저런…….”
그때, 아이작이 한탄했다.
“저 시녀가 또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아리아나의 방으로 향하고 있어.”
+++
책상 하나를 제외하면 침대조차 없는 방.
아리아나는 낡은 모포를 두르고 식탁 의자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연한 하늘색 머리칼과 희고 작은 얼굴,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커다란 눈, 마치 호수처럼 깊은 눈동자와 작고 오뚝한 코, 동그스름하고 붉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16살 소녀답게 앳된 얼굴이었으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도저히 16살의 귀족 영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증오와 고통이 그 눈동자에 새겨져 있었다.
아리아나는 서늘한 눈으로 제 앞에 놓인 책상을 노려봤지만, 그 눈동자에 비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사랑받고 싶어서 발버둥 치다가 이용만 당하던 고통스러운 나날, 그리고 죽음.
‘이제 4일이 지났나?’
아리아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목을 조여오던 밧줄의 거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째서인지 눈을 뜨니 12년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12년 전, 어머니 레이첼의 목걸이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방에 갇혀 있을 때로.
혼란스럽고 당황했으나 그 감정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고민하는 시간도 짧게 끝났다.
원인이 무엇이든 12년 전으로 돌아왔고, 아리아나에게는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다.
-“넌 그냥 태어난 게 잘못이야, 아리아나.”
그들은 아리아나의 존재를 부정했으나, 누군가는 아리아나가 한 번 더 살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살아가주지.’
아리아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당신들이 날 낳은 걸, 내 존재가 지금껏 살아오게 만든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아리아나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녀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나는 바로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
.
지난 삶.
아리아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 게 서러워서, 어머니를 실망시켰다는 게 겁나서, 늦은 밤 등잔불조차 없는 어둠이 무서워서.
그러다가 헬레나의 시녀 루이지가 상한 음식을 가지고 오면 먹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얻어맞았다.
지난 삶의 오늘도 그랬다.
루이지는 주방에서 버린 음식물을 접시에 담아서 왔고, 아리아나는 거기서 나는 썩은 냄새가 역겨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버텼다.
루이지는 자꾸 그걸 먹이려 했고, 반항하는 아리아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었다.
그때, 복도를 지나가던 브론테 노부인이 그 광경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브론테 노부인과 함께 있던 레이첼은 노부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고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저 애가 제 목걸이를 훔쳐서 잠시 방에 머물게 한 참이에요, 어머니. 반성하는 동안에는 하녀들과 같은 식사를 하며 지내라고 했는데, 아직도 저렇게 반성 없이 고집만 부리네요.”
레이첼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과하지 않은 처사였다.
도둑질처럼 나쁜 짓을 했을 때, 자신의 방에 갇혀서 평소보다 못한 식사를 하며 반성문을 쓰는 건 어느 집안에서나 하는 교육 중 하나였으니까.
브론테 노부인은 레이첼의 말을 믿었지만, 아리아나는 반발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목걸이를 훔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그게 사달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아마도 루이지였으리라.) 아리아나의 하나밖에 없는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레이첼의 목걸이가 발견된 것이다.
남의 시선과 평판, 그리고 귀족으로서의 예의와 행동거지 따위에 신경 쓰는 브론테 노부인은 크게 분노했고, 루이지를 시켜 아리아나에게 매를 때리게 했다.
아리아나는 시녀에게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훔치지 않았다고 울었고, 반성 없는 아리아나의 태도에 노한 브론테 노부인은 앞으로 일주일을 더 감금해두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아리아나가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레이첼이 찾아왔다.
레이첼은 아리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리아나, 이 엄마는 오늘 네 모습을 보면서 정말 실망했단다. 설령 네가 훔친 게 아니더라도, 자매간에 서로의 잘못을 덮어줄 줄도 알아야지. 엄마는 네가 네 언니를 아끼기를 바랐는데…….”
아리아나가 레이첼의 목걸이를 훔쳤다고 말한 사람은 헬레나였다. 레이첼은 헬레나가 거짓을 고했어도 아리아나가 그것을 덮어주기를 바랐다.
아리아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제게 실망하지 말아주세요.”
.
.
그날을 떠올리던 아리아나의 푸른 눈에 냉기가 서렸다.
‘참으로 멍청했지. 그런 여자의 실망 따위, 아무려면 어떻다고.’
카메리아 제국 건국 때 큰 공을 세운 동령은 동서남북의 신하국 중에서 황제에게 가장 신뢰를 받았다.
특히 현 황제는 현 동제후를 무척 신뢰하고 아꼈기에, 서제후는 동제후와 황제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수를 썼다. 자신의 딸인 레이첼을 동제후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레이첼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서령의 공주로서 서령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날 낳은 거겠지.’
동제후는 서령과의 화친을 위해 레이첼과 결혼하긴 했지만,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이첼은 임신을 함으로써 동제후의 신뢰를 얻었고, 동령의 정보를 서제후에게 넘겼다.
쓸 만한 정보를 넘기자마자 동제후와 이혼한 레이첼은 서령으로 돌아왔고, 서제후는 그 정보를 훌륭하게 사용해 황제와 동제후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널 낳고 싶은 적 없었어.”
-“뱃속에 있을 때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을 세뇌당하듯 들으면서도 아리아나는 언젠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해줄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내가 잘하면, 열심히 살면, 쓸모가 있으면, 그러면 날 사랑해주시겠지.
바보 같은 믿음이었다.
레이첼은 동제후를 닮은 아리아나를 괴롭히며 희열을 느꼈다.
어머니라고 불러온 그 여자는 자신을 딸로 여긴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 사실을 죽게 되어서야 받아들이다니.’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죽어 마땅한 어리석음이었다.
절컥- 절컥-
방문 밖의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나는 사무치는 원망으로 타오르던 눈빛을 지우고 평온하게 방문을 응시했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쟁반을 든 루이지가 들어왔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썩은 음식물 냄새가 풍겨왔다.
지난 삶, 브론테 노부인은 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썩은 냄새를 맡지 못했을까?
‘노부인도 알았겠지. 모르는 척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아리아나는 루이지가 제 앞으로 가져오는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를 차분한 눈으로 주시했다.
‘이번에도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