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는 사랑받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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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는 사랑받지 않겠다.
2023.03.03.
아리아나는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어디서 실수한 걸까?
많은 것을 원치 않았다. 과한 것을 바란 적도 없었다.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 자매들. 남편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헤럴드 블렌윗.
깊은 사랑을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약간의 애정과 인정, 딱 그 정도면 되었다. 내가 잘해냈을 때의 미소, 내가 아플 때의 걱정, 딱 그 정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는, 고작 그 정도를 원했을 뿐이다.
그게 내게는 너무도 큰 욕심이었던 걸까?
나 따위는 그런 것을 바라면 안 되었던 걸까?
카메리아 제국 황궁의 로젠성 지하 감옥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갇힌 지 1년. 아리아나가 믿고 사랑했던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일은, 내일은, 내일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기대도 헛되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하루걸러 한 번씩 들어오는 형편없는 식사도, 어느 순간부터는 며칠에 한 번씩 들어오게 되었다.
지독한 허기와 갈증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고독이었다.
대제국 카메리아를 중심에 두고 둘러싸듯 존재하는 네 개의 신하국 동령, 서령, 남령, 북령.
아리아나는 그중에서도 동령의 지배자인 동제후 러셀과 서령 서제후의 딸 레이첼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이첼은 동제후와의 사이에서 아리아나를 낳자마자 이혼을 하고 도망치듯 서령으로 돌아와, 제이콥 브론테 공작과 재혼했다.
아리아나는 서령 브론테 공작 저택에서의 나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늘 즐거워 보이는 어머니 레이첼과 고지식하지만 다정한 양부 제이콥, 철없지만 잘 웃는 언니 헬레나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고상한 여동생 빅토리아, 그리고 막냇동생 조이슨.
브론테 저택은 따뜻하고 평화로웠지만, 그곳에 아리아나의 자리는 없었다.
아리아나는 알프레히 백작 저택에서의 나날 또한 기억했다.
남편 잉고우 알프레히와 시어머니 라오네, 그리고 동갑내기 시누이였던 엘리제.
그들은 사이가 좋았으나 그곳 또한 아리아나의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3황자이자 이제 황제가 된 헤럴드 블렌윗은 아리아나에게 유일한 온기였다. 가족조차 주지 않은 애정과 신뢰를, 헤럴드에게서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대처럼 영리한 여자를 좋아하지.”
-“생글생글 웃음을 팔면서 사내에게 기대려는 여자보다는 그대처럼 쓸모 있는 여인이 좋아.”
-“내가 황위에 오른다면 그대를 귀히 쓰겠어. 내 황실은 그대의 온실이 되어줄 거야.”
그 말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가 황제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의 은밀한 칼이 되어 움직였다.
신하국 중에서도 부강한 편인 동령을 치는 데에 일조하고, 은둔하는 남제후를 수면으로 끌어내 그 목을 벨 수 있게 도왔다.
동령을 치는 것을 도울 때 망설임은 없었다.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부친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어 주는 다정함이 더 소중했으니까.
황제와 황태자의 신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북제후를 견제할 수 있도록 정보를 가져오기도 하고, 그러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도 했다.
밀정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 고문조차 달게 받았다.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아리아나에게 모진 고문조차 달콤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3황자 헤럴드는 수많은 황자 중 가장 영리했지만, 황태자가 황제를 사랑과 신뢰를 받는 한 황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헤럴드를 위해 오물 밭을 걸어가며 그 가능성을 만들어냈고, 헤럴드는 황태자와 황제를 죽인 후 황좌에 앉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황실은 헤럴드의 것이 되었으나, 아리아나에게는 황궁의 좁은 귀퉁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리아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이다. 그저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은 내게 이리도 가혹한 걸까?
“내가 뭘 어쨌다고…….”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했던 거야?”
아리아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바싹 마른 손가락에 상하고 갈라진 피부가 느껴졌다. 제대로 먹지 못해 살짝만 건드려도 머리카락이 우수수 뽑혀 나갔다.
오랫동안 이어진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끼이익-
지하 감옥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박사박-
가벼운 발소리는 그동안 식사를 가져오던 감옥지기의 것과는 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이 싹 터 올랐다.
드디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된 것인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자, 철창 밖에 등잔불을 들고 서 있는 귀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지만, 행복에 겨운 미소가 그녀를 빛나 보이게 만들었다.
“언니…….”
“언니가 아니지. 데칸 공작부인이라고 부르렴.”
헬레나가 노래하듯 말하며 생긋 웃었다.
“그런데 너,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렇게 자랑하던 머리카락도 다 빠지고. 사람들이 널 보면 괴물인 줄 알 거야.”
제 동생의 가련한 몰골을 앞에 두고도 헬레나는 즐거워 보였다.
아리아나는 무릎으로 기어가 철창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연한 하늘색 머리칼이 거칠어진 뺨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언니, 전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죠?”
헬레나가 살짝 미간을 좁히더니 아리아나를 발로 걷어찼다.
“언니가 아니라 공작부인이랬지?”
굶주려서 힘없는 육체는 귀부인의 발길질에도 쉽게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뒹구는 아리아나를 내려다보며 헬레나가 차갑게 웃었다.
“아무튼 이제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아리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떠오른 희망의 빛은 이어지는 말에 처참히 부서졌다.
“죽어서 나가는 것도 나가는 거라면.”
“주…… 죽는다니요?”
“뭐, 그렇잖니. 너 때문에 선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으니까. 선황태자 전하도 그렇게 되셨고.”
아리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리아나가 애정을 갈구해서 그들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선황제 폐하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이 있군요. 절 희생양으로 삼을 거고요.”
“희생양이라니. 전부 네가 한 짓인데. 네가 선황태자님의 침실에 숨어들어 심장을 찔렀고, 네가 선황제 폐하의 약에 독을 탔잖니?”
그럴 기회와 정보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아나가 직접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에, 아리아나는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를 쥐었다.
“헤럴드……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신가요?”
아리아나의 간절한 눈빛에 헬레나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헬레나는 이 순간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폐하께서는 빅토리아와…… 아, 이제 빅토리아가 아니라 황후 폐하지. 하여간 황후 폐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바쁘셔. 너 따위를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으실걸.”
“거짓말…… 폐하께서도 제가 이렇게 갇혀 있다는 걸 아시나요?”
“그럼 당연하지. 널 이곳에 가둬두라고 명령하신 분이 폐하인걸.”
쿠웅-!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천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아리아나 또한 그 소리가 자신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아리아나의 하늘.
아리아나가 절망으로 무너질수록 헬레나의 미소는 점점 더 환해졌다.
“대체 왜…… 왜 제게 이렇게 모진 거죠? 제가 뭘 어찌했다고.”
“뭘 어찌했느냐고?”
헬레나가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허리를 굽혀 아리아나와 시선을 맞췄다. 헬레나의 새까만 눈동자 안에서 등잔불이 일렁거렸다.
“넌 그냥 태어난 게 잘못이야, 아리아나.”
“…….”
“엄마는 널 볼 때마다 동제후가 떠올라서 토할 것 같대. 나도 그래. 널 볼 때마다 엄마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욕지기가 나. 엄마는 원치도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원치도 않는 임신을 해야만 했잖아. 그 끔찍한 동제후랑.”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아리아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아리아나. 하지만 태어났으니 쓸모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헬레나가 손짓하자,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시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아나는 헬레나가 그들을 데려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헬레나가 아리아나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리아나. 네 죽음을 끔찍하게 만들지는 않을게. 너는 선황태자 전하와 선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그 죄를 뉘우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물론 조금 욕을 먹긴 하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훌륭한 정치를 선보이시면 널 향한 비난도 조금은 줄어들겠지.”
철창문이 열리고 시위들이 들어오는 것을 아리아나는 멍하게 지켜봤다.
그들이 손에 든 밧줄을 목에 걸 때도 아리아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다.
사랑을 바란 것이 잘못이었다.
애정을 원한 것이 실수였다.
신뢰한 것이 죄였다.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임에도 살아가기를 원했기에, 그에 더해 사랑까지 바랐기에 이러한 벌을 받는 것이다.
거친 밧줄이 목을 조였지만, 아리아나는 발버둥 치지 않았다.
그저 결심했다.
만약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다고. 그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지 않겠다고. 그냥 그렇게 태어난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겠노라고.
‘그런 기회는 오지 않겠지만.’
죽음의 순간, 아리아나는 자신의 허황된 소망에 실소했다.
피부가 갈라지고 머리카락이 다 빠졌는데도 어여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헬레나는 섬뜩해졌지만, 그것도 금방 끝이었다.
아리아나의 자그마한 육체는 움직임을 멈췄고, 고통에 찬 헐떡임과 신음도 사라졌다.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아리아나의 생일인 라탄 222년 4월 20일.
서령 귀족 알프레히 백작의 부인이었던 아리아나는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선황태자와 선황제 시해의 죄를 반성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탄 222년 9월.
북제후 사이러스 카르하는 북령의 독립을 선언하고 칭제하여 아르카나 제국의 시작을 알리며, 동시에 카메리아 제국을 향해 군사를 일으켰다.
라탄 224년 4월 20일.
동령을 시작으로 서령까지 무너진 카메리아 제국은 함락당하고 카메리아 황궁의 성벽에 황제 헤럴드와 황후 빅토리아의 목이 걸렸다.
죄명은 선황제와 선황태자 시해로, 아리아나가 죽은 후 정확히 2년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