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그렇다고 제가 용서했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눈이시거든요?”
아스는 드물게 변명 같은 말을 장황히 늘어놓았다.
“그래도 제 친부모님을 찾아 줬잖아요. 저는 둘째치고, 그간 마음고생 심하셨을 두 사람에겐 엄청 다행인 일이고….”
“…….”
“그런 걸 생각하면 마냥 또 미워하기도 그래요. 사람이 예의라는 게 있지, 여태 했던 난리들이 다 제 친부모님 찾으려고 했던 거라는데 사람이 또 양심이 있으면….”
“너 설마 그걸 진짜 믿는 거야?”
피는 안 통해도, 노아는 제 오빠가 어떤 놈인지 잘 알았다. 삐딱선 한번 잘못 탔다면 디모네 닉스와 같은 길을 걸었을지 모르는 광기 어린 놈이다.
상식과 규칙을 따른다는 차이점만 빼면, 아티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뭐, 음.”
아스도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애꿎은 입맛만 다셨다.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장을 보러 갔던 레토가 돌아왔다. 아스는 이때다, 싶어서 후다닥 자리에서 도망쳤다.
“허…!”
조금 전 대화로 아스와 아티의 상황을 대충 감지해 낸 노아는 맥 빠진 헛웃음만 내뱉었다.
“어라, 처형? 설마 저 보러 나온 겁니까?”
“하나뿐인 매부가 무거운 장거리를 들고 왔는데, 당연히 나와야지요.”
“…제가 혹시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이제 보니 우리 매부도 아주 훌륭한 남편감이에요.”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죄송합니다….”
노아는 밖에서 들리는 저 웃기지도 않는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여튼 진짜….’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밖으로 나온 노아는 우선 겁에 질린 레토부터 구출해 냈다.
“나 뭐 잘못했어? 오늘 침구 빨래는 우리가 했잖아.”
“기분이 좋아서 저러는 거야….”
일단 겁먹은 레토를 달래준 뒤, 여전히 자기 손을 쪽쪽 빨고 있는 클라레를 강제로 화장실에 데려가 손을 깨끗하게 씻겼다.
“힝….”
간식거리를 빼앗긴 클라레는 이제 레몬청을 노렸다.
“…클라레 벨로.”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부엌으로 숨어들려던 클라레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노아가 엄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진지한 목소리에 클라레가 냅다 차렷 자세를 했다. 익히 아는 분위기였다. 언니가 저런 표정과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면, 무척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오늘 밤에 아드벨로 영지로 간다.”
“밤에? 밤에 놀러 가?”
눈을 동그랗게 뜬 클라레가 이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야, 야반도주?”
우리 뭐 빚진 거야?
“지금 당장 짐 싸서 도망쳐야 하는 거야? 누가 보증을 쓴 거야? 설마 형부가 쓴 거야?”
“…그런 거 아냐.”
진정하라며 클라레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건드린 노아가 이어 말했다.
“내일 장례식이 있을 거야.”
“응?”
“친부모님의 장례식에 가는 거야.”
“…….”
말없이 파란 눈동자를 깜박거리던 클라레가 노아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대로 품에 안긴 아이는 레토를 한 번, 그다음엔 아스를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그래서 오늘 일하러 안 간 거야?”
“응.”
내일 있을 장례식을 위해, 특함 대원들은 하루 휴가를 받았다.
“으음….”
클라레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장례식은 무서운 거야?”
“무섭지는 않아. 근데 조금 힘들고 슬플 수 있어.”
“슬픈 건 싫은데!”
그래도 한번 참아 보겠다면서, 클라레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노아는 그거면 되었다며 클라레의 이마에 입술을 쪽 맞췄다. 레토와 아스도 대견하단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근데 진짜 야반도주 아니지?”
하나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클라레의 미심쩍은 시선에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
아드벨로 영지는 정말 오랜만에 도시 밖 성문 출입에 제한을 뒀다.
7년 전 아들라보르 역공전 이후로 처음 내려진 제한령이었다.
그러나 이미 성벽 밖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드벨로의 엄격한 통제에 헛물만 켜는 중이었다.
“이야….”
“어마어마하네.”
그 광경을 남 일처럼 구경하던 아미와 셀린이 한마디씩 했다.
두 사람을 비롯한 특함 대원 11명은 해군본부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아드벨로 영지에 진입했다.
“소문이 벌써 퍼진 모양입니다.”
창밖을 힐끔거린 아미레 네고 중사는 긴장으로 굳은 목덜미를 슬그머니 만졌다.
옆에 앉은 로간 미타스 상사가 괜찮다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드벨로 영지에서 저렇게 통제하니까, 장례식은 노출 없이 진행될 거야.”
“국왕 전하도 참석하신다는데, 정말입니까?”
메델라 사나 하사가 셀린에게 물었다.
“왕후 전하와 왕자 저하도 내려온다고는 하더라. 아무래도 귀한 손님들을 배웅하는 일이니까.”
“와, 총출동이네.”
“근데 넌 그거 뭐냐?”
셀린은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아미의 옆에 있는 커다란 짐가방을 가리켰다.
출발할 때부터 비싼 보물 상자처럼 두 팔로 꼭 안고 있더니, 차에 올라타서도 제 옆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꼴이 퍽 이상했다.
“좋은 거야, 좋은 거.”
영지 안으로 들어선 차는 곧 아드벨로 저택에 멈춰 섰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토가 도착한 대원들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옆에는 클라레와 카리나가 레토의 다리를 한쪽씩 잡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차에서 내리는 대원들을 구경했다.
“클라레, 안녕? 나 기억해요?”
메델라가 빵긋 웃으며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누구였더라? 라는 표정으로 눈을 게슴츠레 뜨던 클라레가 곧 누군지 알아챘단 듯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울 언니 따까리!”
“…수영을 가르쳐줬던 군인 언니잖아.”
“그러니까 울 언니 따까리.”
반면 카리나는 낯을 가리느라 레토의 다리 뒤에 몸을 쏙 숨겼다. 특함 대원들은 그런 카리나를 따뜻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 안녕하세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에서 대원들은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연거푸 했다.
마치 아기 고양이가 용기를 내어 얼굴만 빼꼼 내미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어떻게 저 예쁜 아이가 성격 더러운 중장님의 남동생일 수 있지? 다들 이 안타까운 사실을 믿지 못했다.
“어, 코딱지 큰 거 나왔다.”
반면 클라레는 손가락에 묻은 것을 레토에게 보여 주며 이거 줄까요? 라고 물어봤다.
이런 상황이 퍽 익숙한지라 레토는 그렇게 코 후비면 나중에 피 나요, 라며 손수건으로 닦아 줄 뿐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벨라 토르 중사가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생들이 바뀐 거 같지 않습니까?”
대원들은 격하게 동의했다.
***
코 파는 게 취미인 클라레와 수줍음 많은 카리나는 내일 있을 장례식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부모님을 따라온 꼬마 왕자님도 쿨쿨 잠든 야심한 밤.
어른들은 아드벨로 영지에 있는 성당에 모였다.
“오랜만에 입으니 영 어색하네.”
새하얀 성복으로 갈아입은 아미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옷자락을 치맛자락처럼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어우야.”
“아이씨.”
앞에 있던 노아와 셀린이 기겁했다. 옷자락을 드니 아미의 맨다리가 쑥 드러난 탓이었다.
노아의 뒤에 서 있던 레토도 질색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에 속바지 입었어!”
그런 반응이 더 징그럽다며 아미가 투덜거렸다.
새하얀 성복은 아미가 올 때부터 소중히 품에 안았던 가방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성스럽고 고결한 의상과 햇살에 보기 좋게 탄 피부가 의외로 잘 어울렸다.
“그, 저….”
호네스 메라 일병이 슬쩍 다가왔다.
“잘 어울리십니다, 중위님.”
“하하, 그래? 네가 말하니 조금 부끄럽네.”
솔직담백한 칭찬에 아미가 살짝 머쓱하게 웃었다.
무려 7년 만에 입는 성복이고, 덩달아 7년 만에 제대로 본업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아미는 내일 신의 곁으로 떠날 피에타 백작 부부의 유해에 축복을 내리고, 그들의 업적을 읊는 장례 미사를 진행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엔 그들의 영면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만 모였다. 노아와 레토, 아스. 특함 대원들과 아드벨로, 오케아누스. 그리고 국왕 부부까지.
이들 모두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아드벨로가 성녀까지 보호하고 있었다고?”
국왕은 7년 만에 나타난 성녀의 등장에 머리가 아찔했다. 반면 왕후는 호호 웃으며 이 상황을 마냥 즐겁게 여겼다. 여러모로 대인배였다.
“…노아.”
시작하기 전에 앞서.
새하얀 향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금색 향로의 끝에 달린 금줄을 손에 감은 아미가 말했다.
늘 장난기 넘치고 얼핏 가벼워 보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고귀하고 성스러운 신의 사랑을 받는 딸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관 뚜껑을 열 거야.”
“…….”
노아는 제 앞에 놓인 두 짝의 관을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각오를 다지듯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울어도 괜찮으니, 감정을 너무 참지는 마.”
“알았어.”
“그럼….”
관 앞에 놓인 커다란 십자가. 그 아래 선 아미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짧게 읊었다.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어머님의 이름 아래, 고귀한 영혼들이 안식을 얻고자 하오니….”
아미는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는 향로를 들고 관 앞에 섰다.
향로를 든 팔을 들어 올리니, 연기가 관 뚜껑 위로 안개처럼 흘렀다.
“고난과 역경은 영혼을 더욱 눈부시고 아름답게 가꾸어 주심이니, 이는 어머님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음으로써….”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그 속에서 노아만이 홀로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아미와 이따금 눈이 마주쳤지만, 둘 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노아는 그저 지켜만 보았고.
아미는 죽음을 위로했다.
“…부디 그들이 어머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가 끝나자, 관 옆에 서 있던 아티와 락소가 관 뚜껑을 열었다. 두 사람의 눈이 움찔거렸다.
“오늘 본 것은 모두 죽을 때까지 침묵해야 할 것이다.”
국왕의 엄명에 따라, 피에타 백작 부부의 오러에 물든 파란빛 해골은 역사에 결코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
노아는 제 옆에 있는 레토의 손을 꽉 쥐었다. 레토 역시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가득 줬다.
아미는 향로를 들고 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향로 구멍에서 새어 나오던 희뿌연 연기 사이사이로 은빛 성력이 반짝거렸다.
“와….”
누군가가 그 광경에 넌지시 감탄했다.
점멸하던 은빛은 점점 커다래지더니, 반딧불이처럼 부유하며 어둑한 성당을 환하게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