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집에 큼지막한 보석이 떨어졌고, 그걸 꼭 끌어안았다는 클라레의 꿈 설명에 어른들이 호호 웃었다.
“어이구, 이거 복권 사야 하는 꿈 아냐?”
“똥강아지가 부자 되려나 보네.”
“어, 그러면 용돈 주세요! 많이 주세요!”
“하하, 그런 꿈을 듣고 안 줄 수가 없지.”
비스는 오랜만에 지갑을 꺼내 클라레에게 용돈을 줬다.
“와아! 꿈 내용처럼 됐다!”
“자, 노아도 받아야지.”
“감사합니다.”
노아도 동생 덕에 불로소득을 얻었다.
아침부터 쏠쏠한 소득을 얻은 자매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언니, 매일 이런 꿈 백 번만 꿔도 금방 부자 되겠다.”
“우린 이미 부자야.”
“참, 그랬지.”
클라레는 받은 용돈의 대부분을 저금통에 넣었다. 그리고 지폐 한 장만 식칼토끼 지갑에 소중히 넣었다.
“아이고, 요 알뜰한 것.”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네.
하는 짓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글로리아도 결국 지갑을 꺼내 들었다.
“나중에 아스도 용돈 줄 거야?”
용돈을 두 번 받아서 신이 난 클라레가 물었다.
“그럼, 당연하지.”
“아스 몫은 여기에 넣어둘까?”
비스는 서재에서 챙겨 온 하얀 봉투에 아스 몫의 용돈을 챙겨 넣었다. 글로리아도 두툼한 지폐를 기꺼운 마음으로 넣었다.
“아스는 언제 올까?”
아침 식사를 마친 클라레가 교복을 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노아는 클라레가 이제 혼자서도 옷을 잘 입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스 보고 싶어.”
“없으니까 더 보고 싶다.”
“아스가 열 밤 넘게 안 오면 어떡할 거야?”
“슬플 거 같은데….”
“언니가 없을 때보다 슬퍼?”
“똑같이 슬퍼.”
교복을 다 입은 클라레는 학교 가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어제 다 끝낸 숙제도 넣었고, 필통 속 연필도 뾰족하게 깎여 있었다.
“근데….”
가방까지 야무지게 멘 뒤.
“언니가 없는 게 쪼오끔 더 슬프다?”
대신 아스한텐 비밀이야, 응?
클라레가 꼭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감동한 노아가 클라레를 끌어안으려던 찰나.
“아스는 야무지고 똑부러져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지만, 언니는 조금 불안하거든….”
“방금 감동했는데, 그렇게 뼈를 때려?”
“그치만 언니는 결혼 안 한다고 해 놓고는, 형부 얼굴에 넘어가 버려서 배알도 없이 결혼했잖아!”
“…너, 날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냐?”
어린 동생에게 뼈가 부러지도록 촌철살인을 당한 노아는 비틀거리며 해군본부로 출근했다.
“대위님.”
피스트 준위가 노아를 불렀다.
“아드벨로 대장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참모총장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아, 예.”
다녀오겠단 짧은 말을 남기고 참모총장실로 가니, 아드벨로 대장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가볍게 했다. 정작 그녀의 시선은 서류에 진득하게 꽂혀 있었다.
정년퇴직이 정해진 탓에 인수인계로 꽤 바쁜 와중이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들어 노아를 바라봤다.
“장례식 날짜가 잡혔다.”
“…….”
노아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일주일 뒤, 토요일 주말 오전에.”
왕실이 친히 장례를 주관해 주기로 했다는 말이 이어졌지만, 노아에겐 하등 상관없는 정보였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저 좁고 차가운 영안실에 누워 계시는 친부모님이 양지바른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랄 뿐이었다.
“…피에타 가문의 정식 망명과 귀화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단다.”
아드벨로 대장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금 나라의 최대 관심사는 피에타 가문이었다.
멸문했다고 알려졌던 천년 가문의 후계자가 왕국에 귀속되고 싶다는데, 이 얼마나 가슴 웅장하고 자랑스러운 순간인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감상은 순수한 축에 속했다.
“왕실이고 귀족들이고, 이걸 어떻게든 자기네들 기 살리는 쪽으로 써먹으려고 안달이거든.”
아마 엄청 부담스럽고 거대한, 말 그대로 보여주기식 행사가 될 거라며 아드벨로 대장이 예측했다.
“…….”
노아는 입술을 가볍게 다문 채 눈을 살짝 왼쪽으로 굴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제 가문의 명예는 누구보다 노아 본인이 잘 알았다.
아들라보르의 짧은 역사 따위와는 감히 비할 바가 안 되는 천년이란 고고한 역사와 긍지 높은 명예.
권력욕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피에타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고 싶을 것이다.
“묘지는 어디입니까?”
“그거 정하라고 부른 거지. 후보가 두 군데야.”
샤프 국립묘지와 아드벨로 영지 내 아드벨로 가문 전용 묘지.
노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드벨로를 택했다.
“클라레가 마탑주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셨으면 합니다.”
“그것만이 이유가 아닌 거 같은데?”
떠보는 듯한 아드벨로 대장의 물음에 노아는 의뭉스러운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아들라보르의 높으신 분들이 감히 명예로운 피에타를 두고 입맛을 다시는 듯한데, 아직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노빌리아 피에타는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미리 그 짓을 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아는 아드벨로의 묘지를 선택했다.
현재의 아들라보르를 만든 마탑 대폭발의 주역, 국왕도 눈치를 살피는 명실상부 부동의 실세.
피에타가 아드벨로를 등에 업으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악하긴.”
아드벨로 대장이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보아하니, 제게 작위도 주려는 것 같습니다만.”
“주려고 하지 않겠냐.”
국제 사회가 지켜보는데, 주는 것도 없이 피에타의 명예만 날름 핥아먹으면, 이는 시스토 제국과 다를 게 없다며 아드벨로 대장이 빈정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이야기가 얼추 끝났다고 생각한 노아가 나가려던 찰나.
“아, 잠깐. 잠깐만.”
이야기가 얼추 끝났다고 생각한 노아가 나가려는 것을, 아드벨로 대장이 서둘러 붙잡았다.
“노아, 너 이거 가져가라.”
아드벨로 대장이, 아니, 글로리아가 대뜸 노아를 이름으로 불렀다. 돌아서려던 노아의 미간에 주름이 희미하게 패였다.
여기서 갑자기 내 이름을?
의외로 공사 구분이 확실한 글로리아의 호명에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던 노아는, 어느새 제게 다가온 할머니가 손에 쥐여 준 것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뭐야!”
“보면 모르냐. 임신했는지 확인하는 막대기지.”
“그걸 아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아니, 내가 오늘 클라레가 꿨다는 꿈이 계속 신경 쓰여서 말이야….”
그거 태몽 같지 않냐?
글로리아는 살짝 상기된 채로 노아의 팔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어째 목소리도 들뜬 것 같았다.
“할머니.”
그래서 노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나 지금 달거리 중이야.”
“…….”
실망을 감추지 못한 글로리아가 슬쩍 물었다.
“…영 아니야?”
“할머니 그거 성희롱이고, 레토는 장난 아냐.”
신혼여행 전까지만 해도, 노아는 레토가 상당히 점잖고 담백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담백함’도 엄청났지만.
그런데 신혼여행을 핑계로 호텔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 날들, 그때 본 레토는 그간의 모든 것이 노아를 향한 배려였음을 가감 없이 보여 줬다.
노아는 그때 처음 알았다.
‘복상사가 왜 있는지 알았지….’
어쨌거나 노아는 남편과의 부부 생활에 무척 만족했고, 현재 임신 중은 아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아냐? 할머니나 엄마, 아스….”
“주책 같은 소리 마. 이 나이에 무슨….”
오만상을 쓰며 손사래를 치던 글로리아가 별안간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입을 크게 벌렸다.
마찬가지로 같은 생각을 했던 노아도 설마, 하는 눈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둘은 이내 동시에 풉, 하고 자신들의 가정을 비웃었다.
“아스는 그 전에 네 오빠를 죽이고도 남을걸?”
“그렇지? 거기다 둘이 만날 접점도 없었잖아.”
“아이고, 역시 그건 재복 꿈이었나.”
“할머니는 하여튼 이상한 해석이나 하고….”
괜히 저까지 심장이 철렁했던 노아가 이제 정말 가겠다며 몸을 돌리던 찰나.
“대장님!”
급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온 비서실장이 노아에게 눈짓했다.
나가려고 했던 노아는 조금 전에 그가 들어온 문을 빠르게 닫았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서실의 분주함을 감지했다.
비서실장은 곧장 라디오를 틀었다. 주파수를 맞추기 무섭게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라디오 아침 뉴스였다.
[…다음 뉴스는 앞서 전해드린 소식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수도 구치소는 방금 전 사망한 디모네 닉스 전 육군 소장의 사인을 자살로…]
디모네 닉스가 죽었다.
자살로.
***
당연하지만, 노아는 디모네 닉스가 자살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뉴스를 들었던 아드벨로 대장과 비서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틀 뒤.
“다녀왔습니다.”
레토가 양손 가득 선물을 든 채로 돌아왔다.
“형부우우!”
“처제!”
절 보며 환히 웃는 처제에게 감당한 레토가 냉큼 선물을 내려놓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우다다 달려온 클라레는 레토의 품에 안기는 대신, 옆에 있던 선물들을 살폈다.
“뭐 사 왔어요? 이거 다 내 거예요?”
“…….”
착잡해진 레토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어서 와.”
어린 처제에게 상처 입은 레토를 위로해 준 건 노아였다.
“고생 많았어. 그리고 자살 아니지?”
“다녀왔어. 그리고 자살 아냐.”
일주일 만에 만나는 아내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레토가 숨을 깊이 내쉬었다.
노아는 간지럽다면서도 레토의 허리에 감싼 팔을 풀지 않았다.
“어떻게 한….”
“일단 뽀뽀부터.”
레토는 그간 못 나눈 입맞춤부터 했다. 말을 하려던 노아의 입술은 단숨에 집어 삼켜졌다.
깜짝 놀란 노아는 곧 눈을 감고 저 역시 그리웠던 남편의 호흡을 따라 맞춰 갔다.
“…그래서?”
겨우 입술을 떨어트린 노아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작품인 거야?”
“누구겠어.”
레토가 엄지로 노아의 젖은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어머니의 작품이지.”
이 세상에서 디모네 닉스에 대해 누가 가장 잘 아느냐, 하면 답은 딱 하나였다.
아이트라 오케아누스.
비록 괴물과의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혔지만, 그런 만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것이 많았다.
디모네 닉스는 과시욕이 상당하며, 남들에게 우월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과 이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타고났다.
제 능력을 펼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의 얼토당토않던 이유는 거짓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아이트라는 이를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