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아스가 홀로 부부를 만나러 간 사이.
“…….”
그녀가 부부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티는 몸을 돌려 차로 향했다.
‘안 보이네.’
공원 밖에서는 아스와 부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티는 굳이 20년이 지나서야 만난 가족의 상봉을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앞으로는 무얼 할지 고민했다.
일단 무얼 해서 먹고 살지는 대충 윤곽이 잡혔다.
‘국왕이랑 생각보다 합이 잘 맞았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마탑주 자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 성미가 아니니, 이대로 국왕과 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엔 테네브레와 병합한 안보국 초대 국장 자리를 맡지 않겠느냔 제안을 받았다.
집안에서 반대할 게 뻔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재밌을 거다.
‘하다가 재미없으면 관두면 되고.’
돈이야 백수로 3대가 배불리 먹고 살 만큼 가지고 있다. 취미 삼아 국왕과 일하는 쪽으로 흥미를 굳혔다.
그리고.
“그리고….”
애써 소리까지 내어 다음을 생각하려 했건만.
“…….”
누구보다 제 잇속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는 아티가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아니,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멍하니 앞만 봤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으로 한 번.
그렇게 고갯짓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오뚝이처럼 움직이기만 반복했다. 도저히 이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이 똑똑한 머리가 좀처럼 생각을 못 해냈다.
“…아아.”
한참을 조용히 다물렸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헤어졌지, 한참 전에.”
아티는 새삼 깨달았단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스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 너머에 아스가 있는 게 틀림없는 쪽을.
“그럼 할 게 없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아티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똑똑.
똑똑똑.
“…….”
운전대에 상체를 기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아티가 옆을 돌아봤다. 그러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차 문을 열어 주는 대신, 본인이 직접 차 밖으로 나갔다.
“부모님은?”
“아직 공원에 계세요.”
아스가 충혈된 검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며 손목 소매며, 가슴께 옷자락까지 눈물로 범벅이었다.
“안 울 줄 알았는데.”
“저도 안 울 줄 알았어요.”
“손수건 줄까?”
“아, 아버지, 아니, 아빠, 아니 그러니까….”
아스는 어색해진 호칭에 적응하지 못해 말을 더듬거렸다. 아티는 그게 아주 조금 안타까웠다.
원래라면 아스가 가장 많이 입에 담았을 호칭이었을 거다.
태어난 뒤로 줄곧 들었고, 가장 먼저 배웠을 단어가 이젠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단어가 되어 버리다니.
“저랑 같이 식사하고, 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잘됐네.”
아티는 진심이었다.
아스는 겨우 진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찾은 거예요?”
“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저분들이 널 찾았던 거지.”
만약 저 사람들이 제 딸을 찾는 걸 포기했다면, 아무리 아티였어도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저분들은 매년 자기 딸의 실종신고를 갱신했대. 나이와 생김새 등, 별거 아닌 정보를 늘 그렇게 수정했어.”
“테네브레에 들어가선 무얼 찾았던 거예요?”
“이번에 없앴던 불법 사병 단체의 전신.”
아티가 알고 싶었던 건, 피니치 구역에서 섬멸시켰던 불법 사병 단체의 전신이었던 단체의 자료였다.
하지만 아티가 테네브레가 된 이후에 남은 자료는 거의 없었다. 선왕이 관련 자료를 전부 없앴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은 자잘한 것들로 어찌어찌 피니치 구역에 숨은 나머지 잔당들을 찾아냈지만, 거기서도 딱히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흔적을 찾았다.
“신성청에 네 자료가 있더라.”
“신성…!”
놀란 아스가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뒤를 힐끔거렸다. 두고 온 친부모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검찰 수사관들하고 함께 신성청을 수색했던 그때인가요?”
“맞아.”
검찰 수사관들과 함께 신성청을 수색하던 중에 어떤 성직자가 남긴 자료를 찾아냈다.
“널 유괴했던 놈이 남긴 거였지.”
바로 첫 번째 불법 사병 단체의 운영 내용이었다.
대부분이 창립 과정과 운영 과정 등이었지만, 유괴한 아이들에 대한 정보가 아주 조금이지만 적혀 있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까진 아니어도 나름 순항이었다.
“멍청하게도 그걸 보고 나서야, 네가 나한테 했던 그 욕이 떠올랐지. 여덟 개의 동전을 잃어버릴 놈이라던.”
“…….”
동그랬던 아스의 젖은 눈이 단숨에 가늘어졌다.
“아우스테르.”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녀는 도련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난 너한테 이런 걸 부탁한 적 없어.”
“알아.”
“네 멋대로 저지른 일이야.”
“누가 뭐래? 다 알고 있어.”
“도대체 왜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조사하고, 저분들을 찾아 준 거야?”
“그 전에, 아직 진짜 친부모님인지 의심부터 해야지.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아무….”
“네가 아무런 확신도 없이 친부모님이라고 떡하니 보여 줬을 리가 없지.”
아스가 당당히 말했다.
“넌 날 아직도 사랑하잖아.”
“맞아.”
해사한 미소를 띤 채, 아티는 영원불변할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아티는 저 부부의 머리카락과 피를 구해내, 아드벨로의 친자 검사용 마법약을 몰래 훔쳐 미리 검사해 봤다.
저들은 피가 이어진 가족이었다.
“저분들껜 미안하지만, 난 친부모님이 없어도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그런데 넌 또….”
“네 삶을 뒤흔들었지?”
아스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 말이 맞았다. 아티는 일부러 아스를 흔들기 위해 제 노고를 쏟아부었다. 정말 갸륵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계속 이러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넌 이미 알고 있잖아.
아티가 성큼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아스의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
“…….”
욕심으로 똘똘 뭉친 초록색 눈이 위험한 이채를 띠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어지간한 일에 꿈쩍도 않는 아스도 저 속내 모를 눈을 마주할 때면 호흡이 잠시 멈출 정도였다.
“난 네 행복이 싫어.”
아티는 맥 빠진 웃음을 가볍게 흘렸다.
“네가 왜 노아랑 클라레의 언니가 되려고 해. 왜 그렇게 날 도련님이라고 못 불러서 안달이야.”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제 속이 얼마나 지저분해지는지, 눈앞에 있는 여자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난 너랑 남이고 싶은데.”
싫다는 사람 겨우 설득해서 연애하면 뭐 하나.
“가족처럼 굴지 마.”
처음으로 속내를 드러낸 아티는 아스를 이제 잡아 삼킬 것처럼 노려봤다. 아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새 눈치챈 아티가 팔을 뻗어 아스의 허리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넌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그는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남이 된 걸 축하해.”
***
‘역시 보통 또라이가 아니야.’
아스는 낯선 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그녀는 어릴 적의 자신이 썼다는 방에 있었다.
“남이 된 걸 축하해.”
아티에게 축하 아닌 축하를 받은 뒤, 아스는 그대로 그와 헤어져 친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향했다.
“하아….”
아스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친부모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른 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냉정한 이성이 빠르게 현실감을 도로 불러일으켰다.
낯설고 불편했다.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들은 아스를 보자마자 처음 듣는 이름을 부르며 얼싸 끌어안았다.
스페이아. 이게 아스의 진짜 이름이었다.
낯설기만 한 이름은 안 맞는 옷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나중엔 저를 부르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친부모님은 어떻게든 아스와 그간 헤어져 지낸 세월을 빠르게 메꾸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여기가 네 방이란다.”
“네가 쓰던 그대로 남겨 뒀단다.”
“스페이아, 기억하니? 네가 가장 아끼던 인형인데….”
그래도 나름 마음이 느슨하게 풀리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어린 아스가 늘 안고 다녔다는 토끼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 토끼는 지금 아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친부모님께는 잠시 방을 혼자 구경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들은 아쉬워했지만 기꺼이 자리를 비켜 줬다.
‘클라레 아가씨도 토끼 좋아하는데.’
토끼를 보자마자 샤프 영지에 있는 제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냥, 아스에게 가족은 샤프 영지에 있는 그들이었다. 제 소중한 동생들.
“가족처럼 굴지 마.”
나 참.
아스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 듯 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딴 이유로 제 속을 뒤집어놓은 거라면, 그 망할 놈은 절 괴롭히는 재능 하나만큼은 타고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스는 아티에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 냉정하게 선을 긋고 가족이 아니라고 매정히 말하던 모습은, 아스가 여태 보았던 아티의 모습 중에서 가장 진솔하고 나약해 보였다.
‘그러니까 요컨대….’
가족이 되면 연애도, 결혼도 못 하니까.
저를 도련님이라고 계속 부르던 나한테 짜증이 나서.
‘…그래서 그 지랄을 했다고?’
도로 몸을 벌떡 일으킨 아스는 쥐고 있던 토끼 인형을 냅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삑, 하고 떨어진 인형이 억울한 소리를 냈다.
“아아, X발 이 XX 같은 시X 애XXX XX에 X를 XX할 새끼가…!”
하얀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욕을 읊조리며 이를 바득 간 아스가 방문을 쾅 열었다.
“스페이아?”
마침 점심을 다 차렸다고 알리러 온 나이 든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아주, 아니, 어머, 아니 그러니까…!”
다시 보니 저와 쏙 빼닮은 어머니를 더듬거리며 겨우 ‘엄마’라고 부른 아스가 말했다.
“저 잠깐만 나갔다가 돌아올게요.”
“어, 어딜 가려고!”
당황한 어머니가 아스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아스는 정중하게 손을 물리며 보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절 여기에 데려다준 은인에게 해 줄 말이 있거든요.”
그리고 아스는 다시 호텔로 향했다.
***
“언니이아아아….”
하아아암.
아침부터 하품하는 클라레의 쩍 벌려진 입과 아래턱이 잔물결처럼 부르르 떨렸다.
“어우, 못생긴 거 봐라.”
지나가던 글로리아가 농담처럼 툭 내뱉었다. 클라레는 심술궂은 표정을 팍 짓고는 할머니 등에 몰래 혀를 메롱 내밀었다.
“나 이상한 꿈 꿨어….”
다시 노아에게 돌아온 클라레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찡찡거리며 말했다.
노아는 클라레의 팔을 잡아 기지개를 쭉쭉 켜는 걸 도와줬다.
“잘 잤어? 그리고 무슨 꿈?”
“으어어, 그러니까아아아….”
팔다리 쭉쭉 높이 늘리며 시원하게 잠을 깬 클라레가 한결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크고, 반짝반짝하는 보석이 우리 집에 떨어져서, 내가 그걸 두 팔로 꽉 안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