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240화 (240/245)

240.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은 수도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어느 한적한 영지였다.

“…….”

그리고 아스는 기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기차는 편했어?”

“방금 막 불편해졌어요.”

“특등실을 통째로 빌려줬어야 했나….”

준비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 아티가 아스의 작은 짐가방을 들고 앞장서 걸어갔다.

“…내놔요.”

따라붙은 아스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티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아스가 묵을 호텔까지 직접 차로 태워다 주기까지 했다. 운전도 그가 직접 했다.

아스는 치미는 짜증을 겨우 억눌렀다. 어쨌거나 묵을 곳도 본인이 알아서 준비해 주고, 심지어 구하기 힘든 급행열차 표도 떡하니 주지 않았나.

“…….”

아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는 아티를 힐끔거렸다.

“…자만심에 물어보는 건 아닌데.”

아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테네브레에 들어간 게 이거 때문이에요?”

“어떤 거?”

“그러니까, 내 친부모님….”

말을 하다 만 아스는 조금 창피해졌다.

아티는 분명 저를 좋아한다. 아니, 아주 미쳐서 제대로 돈 놈이 더 돌아 버릴 정도로 사랑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상당히 다른 문제였다.

“…내 친부모님을 찾으려고, 그러니까 나 때문에….”

“테네브레가 된 거 맞아.”

“…….”

“내가 말했잖아. 널 위해서 헤어진 거라고.”

“X발.”

아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진짜, 고작 이거 하나 때문에 가문에서 그리 반대하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뭐 이런…!”

“여기서 욕하지는 마라.”

나 흥분하니까.

아티는 진심으로 경고했다.

아스는 정말 아주, 제 손톱 사이에 있지도 않은 때를 강물에 희석해서 퍼낸 한 방울만큼의 고마움 때문에 이 차에 성큼 올라탄 몇 분 전의 자신을 욕했다.

***

“왜 또 내 옆방에 묵어요!”

“휴가라서. 이렇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인데, 사이좋게 지낼까?”

“…….”

쾅!

문짝이 떨어질 정도로 문을 세게 닫은 아스는 주체 못 할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던 하얀 베개가 터질 때까지 주먹으로 푹푹 내리찍었다.

‘…나 지금, 사기당했나?’

혹시 친부모님 주소라는 것도, 저랑 여기에 같이 있으려고 치밀하게 준비한 거짓이 아닐까.

“…….”

누웠던 몸을 슬쩍 일으킨 아스가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닌데.”

아티가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개망나니라고 해도, 인간의 도리는 알고 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범인들의 상식을 따르는 노력은 한단 소리였다.

그러니 이 주소도 거짓은 아닐 거다.

“…내 친부모님을 찾으려고, 그러니까 나 때문에….”

“테네브레가 된 거 맞아.”

그래서 더 화가 났고.

“후우….”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오른 아스가 한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스는 저 말이 가장 싫었다. 날 좋아한다고 해 놓고, 그렇게 사람 마음을 뒤흔들고 끝내 저 싫다던 날 제 것으로 만들어 놓고는.

‘날 위해서라면, 옆에 있어 줬어야지.’

내가 바란 건 그거였는데.

‘이딴….’

도로 침대에 풀썩 누운 아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에 난 거스러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쪽지가 온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휴….”

이젠 한숨을 내쉬는 것도 피곤해졌다.

아스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하지만 이제 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한 친부모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힘들게 손에 넣은 제 삶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장래희망은 샤프 영지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늙어 죽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즐거운 일상,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아티는 제 소원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나쁜 놈이었다.

늘 그랬다.

절 사랑에 빠지게 한 것도 그 미친 새끼였고, 그 믿음에 상처를 주고 헤어진 것도,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나 신경을 살살 긁는 것도.

그리고 지금도.

전부 아티였다.

“…….”

하지만 아스는 결국 아티가 바란 대로 움직였다. 기차표를 버리지 못했고, 이 쪽지에 적힌 주소가 있는 영지까지 왔다.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휘둘리게 움직이는 걸 내버려 두는 건 아스 본인이었다.

똑똑.

“아스.”

아스는 매서운 눈초리로 문을 노려봤다. 하필 또 이렇게 때맞춰서 찾아오다니. 예의 바르게 똑똑 두드리며 제 방문을 알리는 꼴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가 볼래?”

“…….”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냥 종일 기다리게 둘까.

“…….”

거기까지 생각한 아스가 겉옷을 챙기고 터벅터벅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벌컥 열어젖히니, 마치 네가 나올 줄 알았단 듯이 방긋 웃고 있는 아티가 있었다.

“…밑에서 기다린다더니?”

겉옷을 두르고 스쳐 지나가던 아스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밖은 춥잖아.”

아티는 아스의 뒤를 큰 걸음으로 여유롭게 따라갔다. 집요한 시선이 저를 계속 따라왔지만, 아스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

“저기 보여?”

운전기사를 자처한 아티는 차를 몰면서 여기저기 눈에 띄는 곳을 설명해 줬다.

이번에 가리킨 곳은 제법 번화한 광장에서 유일하게 허허벌판으로 있는 널찍한 공터였다.

“원래 커다란 교회가 있었다고 하더라. 신성청에서 직접 파견한 성직자가 이곳에서….”

“도련님.”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아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관광하러 온 거 아닙니다.”

“관광이지.”

“난 당신이 준 이 쪽지를 확인하려고 온 거예요.”

“아, 관광이 아니라 고향에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그러니까 제발 좀 닥치라고 말하려던 아스가 멈칫거렸다. 그러곤 얼떨결에 떠 버린 눈으로 창밖을 슬쩍 둘러봤다.

샤프 영지나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영지도 제법 규모가 컸다.

“…여기 이름이 뭐라고 했죠?”

“아시스 영지.”

“…….”

“네 이름과 비슷하지?”

아스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아스를 힐끔거리던 아티가 운전대를 가볍게 돌렸다. 커다란 교회가 있었다는 터를 우회한 마동력차는 곧 주거 구역으로 진입했다.

“설마, 알고….”

“알고 지은 건 아니야.”

드물게 당혹스러워하는 아스에게, 아티 역시 드물게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와 표정으로 설명해 줬다.

“7년 전에 널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묘한 말을 했거든.”

“욕 말고 한 게 없는데?”

“그때부터 너한테 욕 듣는 취미가 생기긴 했지.”

“아이씨….”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은밀한 취향을 강제로 들어 버린 아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티는 킥킥 웃었다.

“…옥투아시스(여덟 개의 동전).”

그러곤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아스가 어릴 적에 했던 묘한 말을 읊조렸다.

수도 없이 남몰래 되풀이했던 말이라 마치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주 오래된 아들라보르 고대어야. 넌 나보고 여덟 개의 동전을 잃어버릴 새끼라고 욕했지.”

“제가요?”

“그래서 내가 이름 없던 너에게 아스(동전)라고 이름을 지어 줬지. 넌 그걸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고.”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진….”

“아스.”

두 사람이 탄 마동력차는 어느 공원 앞에 멈춰 섰다.

“싫었으면 넌 벌써 개명하고도 남았지.”

변명이 꼭 클라레 수준이라면서 아티가 눈꼬리를 얄망궂게 휘었다. 아스는 꾹 다문 입술을 비틀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안에 머물렀다.

“여덟 개의 동전은 이곳 영지를 다스렸던 귀족 가문의 상징이야. 가문의 시조가 동전 여덟 개부터 시작해 부를 쌓았다지….”

수도 근처의 영지를 다스릴 정도였으니 분명 힘 있는 가문이었을 거다.

하나 그곳도 100년 전 마탑이 폭발한 뒤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여덟 개의 동전만큼은 여전히 행운의 상징으로 통했다.

“일단 내릴까?”

아티는 아스가 맨 안전띠를 직접 풀어주며 물었다.

이번엔 아스도 군말 없이 얌전했다. 지금 아스는 어느 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릿속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차에서 내린 둘은 바로 옆에 있던 조그만 공원으로 향했다.

“아까 지나가면서 본 공터, 기억나?”

“…흐름을 보아하니, 저와 관련된 건가 보네요.”

아스는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아티는 옆에 같이 앉는 대신에 그녀의 앞에 떡하니 섰다. 기다란 코트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고는 슬쩍 웃으며 어딘가를 지긋이 바라봤다.

‘뭘 보는 거지?’

아스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그곳엔 웬 나이 지긋한 부부가 벤치에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유치원생들이 모여 있는 놀이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주가 저기에 있나, 하고 생각하던 중.

“교회에서 유괴 사건이 일어났대.”

부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스의 몸이 번쩍 들렸다. 아티가 두 손으로 아스를 번쩍 일으켜 세운 탓이었다.

놀란 아스가 반사적으로 욕을 퍼부으려던 순간.

“4살 여아가 교회 성직자에게 유괴당했다더라.”

범인이었던 성직자는 파면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범죄 현장이었던 교회는 방화가 일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다.

“그 성직자는 출소한 뒤에 다시 복직했다는군.”

“신성청이, 신성청했네요.”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아스는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피해 아동의 부모님은,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지.”

“왜요?”

“시체가 안 나왔거든.”

“…….”

“그래서 그들은 제 딸을 찾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어. 하지만 결국 머리카락 하나 찾지 못했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버지의 검은 머리칼이 새하얗게 세고, 어머니의 보드랍던 손등에 검버섯이 필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티는 아스의 등에 느리게 손을 올렸다.

“그들이 과연 딸을 포기했을까?”

등에 얹어진 손이, 마치 처음으로 심부름하러 가는 어린아이를 응원하듯 살포시 두드렸다.

아티는 그렇게 아스의 등을 밀었다.

“답은 저곳에 있어.”

산책 나온 유치원생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

그 아이들을 지켜보는 나이 지긋한 부부의 눈빛에 스며든 오래된 슬픔과 절망.

그리고 채 버리지 못한 얄팍한 희망.

“…….”

아스는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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