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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239화 (239/245)

239.

“풀루스 대위는 어떻게 됐나?”

겨우 정신을 차린 아이트라는 풀루스 대위가 누구였는지 떠올렸다. 분명 디모네 닉스의 측근이었던 놈이다.

피니치 구역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범이자, 어렸을 적부터 디모네 닉스의 손에 붙잡힌 불쌍한 피해자.

하지만 아이트라는 이제 그 불쌍한 사내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저를 도와주려는 손길을 거부했고, 끝내 마지막에는 디모네 닉스의 편을 들어 비밀을 감추려 했었다.

만약 마지막까지 비밀 협약서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면, 특함은 큰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아이트라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가정에서 겨우 벗어나, 일단 디모네 닉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풀루스 대위는 갇혀 있어.”

짧은 답변에 디모네 닉스가 인상을 와락 썼다. 그는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원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더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트라는 이 상황에서조차 제 체면을 챙기려는 놈의 같잖은 행보가 우습기만 했다.

이번엔 아이트라가 물었다.

“저주에는 언제부터 걸렸던 거지?”

“…….”

“묵비권을 행사해도 상관없는데, 내가 너의 유일한 창구라는 건 똑똑히 기억하는 게….”

“아이트라.”

순간, 아이트라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들끓는 역겨움과 증오, 눈앞에 있는 상대를 향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디모네 닉스는 처연한 표정으로 아이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아직 다정한 연인이었던 그 시절처럼.

그것이 얼마나 최악의 수인 줄 모르는 채.

“난, 그저 네 옆에서 당당해지고 싶었어.”

“…….”

“너와 헤어지고, 우리의 아이가 죽고. 난 정말 많은 것을 후회했어. 모든 것을 갖춘 네 옆에서 언제나 비교되는 나의 심정을….”

“아퀼라 영지 밖.”

더는 들을 필요 없는 개소리였다.

또 말을 자른 아이트라는 어떤 장소 하나를 읊었다.

“보레알 산맥 네 번째 기슭에 숨겨져 있는 조그만 오두막.”

사형 선고처럼 장소를 언급하던 아이트라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디모네 닉스의 얼굴이 제법 볼 만했지만, 속이 후련해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고.”

“…….”

“설마 정말 몰랐어?”

그런 주제에 무슨 능력을 펼쳐 보겠다고.

아이트라는 대놓고 비웃었다. 이제 디모네 닉스는 당장 손을 뻗어 아이트라의 가는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단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곳에서 네 손에 죽은 여자의 이름은 뭐지?”

“…….”

“그 여자가 지키려고 했던 아이의 이름은?”

“…난 속았을 뿐이야.”

디모네 닉스가 뒤늦게 변명했다.

“그 여자가 정숙했던 날 유혹하고, 우리의 사이를 이간질했어. 아이트라, 난 변함없이 너 하나였어. 그 계집이 낳은 아이도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다행이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트라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디모네 닉스를 내려다봤다.

“그 불쌍하고 용감한 여인이 내게 맡긴 아이가 네 아들이 아니라서.”

“…뭐?”

“하긴, 좀.”

한숨은 짧게. 그러나 혀 차는 소리는 들으란 듯이 크게.

“쯧.”

아이트라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너처럼 급이 낮은 남자에게서, 내 잘난 아들이 나왔을 리가 없지.”

“…….”

“남자 복은 없는데, 자식 복은 내가 좀 있더라고.”

아이트라의 자랑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면회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들어서는 남자를 보는 디모네 닉스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살짝 어둑한 실내에서도 반짝이는 은발과 붉은 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을 아름다운 외모.

훤칠한 키와 다부진 체격.

그리고 푸른 해군 정복.

“어머니.”

아이트라를 공손히 부르는 다정하고 감미로운 음성.

디모네 닉스는 눈앞에 있는 젊은 사내를 믿을 수 없단 듯이 노려봤다.

“너무 늦으시니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괜찮아. 마침 볼일이 다 끝났거든.”

“다 끝나셨으면 저와 함께 데이트라도 하심이 어떨까요? 오랜만에 어머니와 단둘인데,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어머, 그거참 매력적인 제안이구나.”

수줍게 웃음을 터트린 아이트라가 제 앞에 내밀어진 듬직한 팔에 손을 얹었다.

“…아.”

다정하게 휘었던 붉은 눈동자가 뒤를 힐끔거렸다. 순식간에 감정을 지워 버린 날카로운 시선이 마땅찮단 듯이 가늘어졌다.

그러곤 아이트라에게 무어라고 속삭였다.

아이트라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철컥, 하고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디모네 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라도 본 것처럼 희망에 찬 얼굴이었다.

“…웃기는군.”

레토는 자리에도 앉지 않았다.

“무슨 희망을 봤다고 그런 얼굴을 하는 걸까, 응?”

“난 널 알아봤어.”

“그런 것치고는 이름도 모르던데?”

핏빛보다 어둑한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저를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날이 선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디모네 닉스는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수치스러울 틈도 없었다.

지금 디모네 닉스는 자신을 압도하는 존재 앞에서 겁을 먹었고, 그 존재는 디모네 닉스를 대놓고 부정하는 중이었다.

“이름도 없던 꼬마였지.”

“…….”

“아가야, 내 아가.”

“널 사랑한단다.”

“이렇게밖에 못 해 줘서 미안해.”

“도망치렴.”

누군가가 단단히 막아 놓은 문짝을 손가락이 피범벅이 될 때까지 뜯어내 하나뿐인 아들을 살렸던 여자.

이제 그 아들은 절 낳아 준 생모보다 나이를 먹었다.

“다시 물으마.”

레토는 짓이기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이름을 아는가?”

“…….”

“날 낳고 지켜 준 그 여자의 이름을 기억하나?”

“…….”

“…그래, 결국 그런 거였지.”

오늘이 부자의 마지막 상봉이 될 것이다.

“디모네 닉스.”

그러니 레토는 기꺼이 아량을 베풀어, 절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정도만큼의 친절을 선물하기로 했다.

“넌,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에게 진 거야.”

네가 그렇게 무시했고.

네 발목을 붙잡는 치부라 여겼던.

때리고 괴롭힌 끝에 죽음으로 몰고 간 여자에게.

“완벽한 패배로구나.”

쾅!

유리벽 너머 철장을 세게 쥔 디모네 닉스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제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해, 할 수 있는 건 고작 패악질과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회의 해충.”

“내가 네 아버지다! 넌 내 핏줄이라고!”

“날 낳고 기르신 어머니는 두 분이며, 오케아누스 장군님이야말로 유일한 내 아버지시다.”

“그래봤자 네가 내 아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널 낳았다! 내가 널…!”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레토에게 디모네 닉스는 이제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이 비루하고 찌질한 남자가 어디 무섭다고.

“어디 한번 떠들고 다녀 봐.”

과연 저 망상을 누가 믿어 줄까.

굳어 버린 디모네 닉스를 응시하던 레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감흥 없는 눈동자는 이내 지루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면회실을 나가기 전.

“…그거 아나?”

레토가 수수께끼를 던졌다.

“늙은 늑대는 그래도 가죽을 남겼고, 썩은 백합도 꼴에 꽃이라고 불리는데.”

“…….”

“재밖에 남지 않은 시가의 마지막은 어떨까?”

답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레토는 면회실을 한 번, 그리고 디모네 닉스를 한 번 힐끔거리곤 싱긋 웃었다.

“잘 어울리네.”

그리고 돌아선 레토는 다신 디모네 닉스와 만나지 않았다.

***

“…응, 그랬구나.”

그날 저녁.

노아는 수도에 무사히 도착한 레토와 통화를 나눴다.

“여기는 평소랑 똑같지.”

“똑같지이이!”

“하하, 어. 밑에 클라레야.”

“형부야? 형부! 형부 거기 추워요?”

“클라레, 언니 지금 통화 중이잖아.”

“나도 형부랑 전화하고 싶은데!”

“에휴, 잠깐만….”

노아는 클라레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뺨에 야무지게 수화기를 가져다 댄 클라레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형부, 뭐 해요? 저녁 먹었어요?”

[우리 처제는 저녁 먹었어요?]

“오늘 우리 뇨끼 먹었어요! 아스가 만든 건데, 오늘 엄청 많이 만들어서….”

클라레가 재잘재잘 떠드는 동안, 노아는 씻고 나온 아스와 마주쳤다.

“작은 부군 전화예요?”

“오늘 디모네 닉스와 만났대.”

“어머나.”

“그치만 괜찮은 거 같아. 후작님하고 같이 갔대.”

“그래요….”

다행이라고 중얼거린 아스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힘없이 탈탈 털었다. 노아는 수건을 빼앗아 들어 아스의 젖은 머리를 직접 닦아 줬다.

“오늘 엄청 친절하시네요.”

“피곤할 거 아냐.”

“확실히 좀 피곤하긴 하네요.”

“야, 돌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퇴근하고 왔더니 부엌에 파스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감자와 시금치로 만든 뇨끼는 욕조만 한 대야에 가득 담겼고, 하루 종일 끓였다는 파스타 소스는 무려 클라레가 들어갈 법한 큰 냄비 세 개를 가득 채웠다.

마치 꼭 여행 떠나기 전에 가족들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어머니의 그것과 같았다.

‘한동안 파스타 축제겠네.’

짧은 감상을 끝낸 노아가 물었다.

“언제 출발할 거야?”

“이틀 뒤에요. 금요일 저녁에 갈 거예요.”

“그럼 주말에는 내가 집에 있으니 괜찮고, 다음 날에는 오케아누스 장군님께 클라레 좀 봐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네.”

노아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아티가 너한테 해 되는 걸 알려 주지 않았을 거야.”

“그 인간과 사랑에 빠진 게 내 인생 최악의 해악이에요.”

“뭐….”

그건 그렇지만.

할 말이 없어진 노아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수건을 치웠다. 아스의 머리가 어느 정도 말랐다.

사실, 아스는 지금도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네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안 내키면 버려.”

아티는 아스의 친부모님이 사는 주소를 알아 왔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기차표까지. 수도행 급행열차 1등급 칸, 출발이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이었다.

아스는 며칠 전에 노아에게 이에 대해 털어놓았고, 이야기를 나눈 후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친부모님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저 혼자 세포 분열해서 태어난 건 아닐 테니, 절 품고 낳아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다.

다만, 그들을 그리워하기엔 아스의 삶이 너무 처절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불법 사병 단체에서 치열하게 훈련하던 순간이었다. 아스는 그곳에서 감정을 죽이고 병기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친부모님에 대한 막연한 감상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제 어린 시절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아스는 금요일 저녁,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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