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너 울 엄마 만났냐?”
별안간 막내 손녀한테서 돌아가신 엄마를 겹쳐 본 글로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잔소리쟁이 손녀가 시키는 대로 손발 깨끗이 씻고, 옷도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제야 클라레는 콧김을 거칠게 내뿜으며 제 역할을 완수하였음에 뿌듯해했다.
“근데 할머니 쉬어? 이제 일 안 해?”
“어. 안 할 거야.”
“백수야, 그러면?”
“오냐. 곧 백수가 될 거다.”
“학교에 가서 자랑해도 돼? 울 할머니 백수라고?”
“물론이지! 돈 많은 백수라고 크게 자랑해라!”
글로리아가 킬킬 웃었다.
“글로리아.”
때마침 씻고 나온 비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녀딸이 시키는 대로 도착하자마자 깨끗하게 샤워까지 마쳤다.
“퇴직이 언제였지? 유람선 예약을 지금 해 둬야 하지 않나요.”
“당장 하는 건 아니니까, 으음, 일단 아드벨로 영지에 돌아가서 좀 쉬었다가….”
글로리아와 비스는 퇴직 기념으로 세계 유람선 일주 여행을 계획 중이었다.
“할머니 놀러 가?”
클라레가 눈을 반짝거렸다.
“나도 갈래! 나도!”
“넌 학교 가야지.”
“그럼 나 방학 때 가라, 응?”
“똥강아지. 나 없는 동안은 네가 벨로 가문을 지켜야지. 네가 가장이잖아.”
“난 이미 어깨에 많은 중책을 이고 있어. 가장은 언니한테 맡길래.”
요컨대 나도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기가 막힌 글로리아는 귀여운 손녀의 볼을 깨물었다.
오동통한 볼살을 입술로 뽀뽀하듯 쪽쪽 깨물면, 클라레가 간지럽다며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괴롭혀!”
그러곤 후다닥 비스의 품으로 도망쳤다.
그때였다.
“어머, 작은 부군.”
어디 가세요?
위층에서 들리는 아스의 목소리에 클라레가 귀를 쫑긋거렸다.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건 강아지로군.”
비스는 후다닥 달려가는 클라레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호기심 많은 벨로 가문의 똥강아지는 쉴 틈이 없었다.
“형부! 형부!”
2층으로 올라간 클라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토가 조그만 가방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아가씨, 큰 주인님 씻으셨어요?”
“응. 내가 야무지게 명령했어.”
“잘하셨어요.”
“근데 형부 어디 가? 놀러?”
“또 일하러 간단다.”
대신 대답한 노아의 팔에 기다란 바지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레토는 그걸 받아 가방에 넣었다.
“수도에 가요.”
“놀러?”
“일하러 간다니까요.”
쪼르르 다가간 클라레가 레토의 가방을 슬쩍 살폈다.
“…놀러?”
“놀러 가고 싶어요?”
다 챙긴 짐을 들고 일어선 레토가 클라레의 이마를 밀어내듯 가볍게 때렸다.
그대로 오뚜기처럼 뒤뚱거린 클라레가 씩 웃었다.
“나중에 놀러 가요, 응?”
“어디 갈까요? 오케아누스 영지에 한번 가 볼래요?”
“나 가 본 적 있어요! 옛날에, 언니 사관학교 다닐 때!”
“옛날….”
레토는 조그만 짐가방을 1층 현관 앞에 뒀다.
쪼그려 앉아 가방을 만지던 클라레가 물었다.
“언제 가요?”
“저녁 먹고 바로요.”
“기차역까지 배웅해 줄까?”
“나 갈래! 나 갈래!”
“요 똥강아지 때문이라도 배웅하러 가야겠네.”
노아가 촐싹거리는 클라레를 번쩍 안아 들었다. 클라레는 씩 웃으며 레토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형부 빨리 와라요, 응?”
“올 때 선물 사 올게요. 없다고 울지 마요.”
“그 정도로 슬프진 않은데.”
“…너무 솔직하게 대답 안 해도 돼요.”
손가락 걸고 약속한 뒤에야 클라레는 식당으로 쌩 달려갔다. 뛰지 마! 노아가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덧붙였다.
그러곤 다시 레토를 바라봤다.
“…….”
불만과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할 말도 많아 보였고.
레토는 그런 노아의 마음을 알았기에 싱긋 웃어 보였다.
임무가 끝난 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레토는 또 일주일 출장이 잡혔다.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푹 쉬었잖아.”
“더 쉬어야 해.”
“돈 받는 만큼 일해야지.”
“퍽이나.”
“하하. 이번에는 정말 쉬운 일이잖아.”
그러니 표정 풀라면서, 레토는 노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간지럽히듯 만지니, 잔뜩 굳었던 노아의 얼굴 근육이 느릿느릿 풀려 갔다.
그러나 속상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정말 괜찮다니까.”
레토는 노아의 입가에 입술을 쪽 맞추며 말했다.
“그 괴물은 이제, 나에게 아무것도 아냐.”
노아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레토는 사실, 이번 출장을 내심 기대하는 중이었다.
***
봄부터 시작해 여름, 가을 이어져 온 주요 재판들은 꾸준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성왕까지 죽었다.
거기다 며칠 전부터 피에타 가문의 후예가 아들라보르에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왕실은 가까운 시일에 관련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천년의 역사를 이어 온 명예로운 가문이 아들라보르와 함께한다니!
머리 아프고 심각한 범죄 소식만 들끓던 아들라보르에 실로 기쁜 소식이 찾아왔다.
남부에서는 피에타의 후계자가 해군에서 근무한다는 둥, 소문이 꽤 구체적으로 퍼지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뭐든 좋았다.
사람들은 이제 머리 아픈 범죄 소식에 질렸다. 아무리 자극적인 게 흥미롭대도, 잠깐 쉴 필요가 있었다.
그런 때에 전해진 피에타의 망명은 딱 알맞은 시기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데.
이토록 다사다난한 아들라보르 왕국 뉴스에, 디모네 닉스와 관련된 내용은 단 한 줄도 언급이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전직 육군 소장, 그것도 국경 지역에서 근무했던 고위 군 장교가 내란이란 무거운 죄명으로 조사받는 중이다.
그런데 다른 관련 재판은 매일 속보로 보도되는데도, 디모네 닉스의 재판 소식은 전해지는 바가 없었다.
물론 신문에는 실렸다.
아주 구석진 곳에.
한 칸도 아니고, 끄트머리에 한 줄로.
“전 육군 소장, 내란죄 1심에서 유죄 확정.”
아이트라는 그 작고 비루한 기사 한 줄을 친히 소리 내어 읽어 줬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친절이고 배려인지는, 그녀의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 절로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내가 이 기사를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눈을 가늘게 뜬 아이트라가 정면을 응시했다.
구치소에 방문한 아이트라는 평소와 변함없었다. 이지적인 그녀의 기품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깊고 그윽해졌다.
소매와 옷깃을 하얗게 박음질한 짙은 남색의 투피스와 굽이 조금 낮은 구두. 그리고 고급스러운 진주 목걸이까지.
이런 초라한 구치소에서도 아이트라의 우아한 품격은 빛을 잃지 않았다.
“아, 이제야 격에 맞는 기사가 나왔구나.”
“…….”
“솔직히, 당신은 거품이 많이 끼었잖아.”
안 그래?
아이트라가 물었다.
“소문에 비해 제대로 된 실력은 갖추지 못했지. 해낸 건 없고, 괜히 판만 크게 벌려서 애먼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치고.”
꼭 허위 매물 같다며 아이트라가 비웃음 가득한 입꼬리를 한 손으로 슬쩍 가렸다.
“…디모네 닉스.”
아이트라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을 큰맘 먹고 불러줬다.
구치소 여름 수감복이 요상한 하늘색이었다면, 겨울 수감복은 색감이 쨍한 주황색이었다.
그리고 그 옷을 입은 디모네 닉스는 아주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하얗게 새치가 듬성듬성 난 머리는 제대로 감지도 못했는지 기름져 뭉쳐 있고, 면도를 제때 못했는지 턱밑이 거뭇거뭇했다.
늘 깔끔하게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디모네 닉스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네 격과 어울리는 꼴을 하고 있구나.”
그 말에 디모네 닉스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윽!”
하지만 곧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아이트라는 남자의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관자놀이가 꿈틀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저게 저주구나.’
사람을 위해야 할 성력으로 사람을 해치면 생기는 부작용.
어떤 의미론 저 괴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형벌이었다.
“알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아이트라는 들고 있던 신문을 흔들었다.
“정보가 차단되어서 불만이지?”
그 말대로, 디모네 닉스는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차단되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버틸 만했다. 자기 변호를 신청한 덕에 재판과 관련된 자료나 흐름 등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열흘 전부터 이 모든 것이 아예 불가능해졌다.
모든 재판이 중지됐다. 표면적 이유는 검찰 측이 새로 제출한 증거 분석이었다.
디모네 닉스는 이에 대해 자신도 알 권리가 있다고 했으나, 법원은 아직 답이 없었다.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준다면 알려 줄 수 있어.”
아이트라는 선심 쓴단 듯이 신문을 척 내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세워진 투명한 유리 보호막과 단단한 쇠창살. 그 너머에서 디모네 닉스는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쥔 아이트라를 하염없이 노려봤다.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상황이 아니지 않아?”
아이트라는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 미친놈은 저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지 못해 분에 겨워했다.
“싫으면 말고.”
아이트라는 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아이트라가 완전히 나가기 직전.
“뭐가, 궁금한 거지?”
“…….”
“귀한 걸음을 헛되게 하지 마.”
“알고는 있네.”
내 걸음이 귀한 거.
“그러니 날 실망시키지 말아 줘.”
도로 자리에 앉은 아이트라가 먼저 질문했다.
그녀를 비롯하여 이번 일에 관여된 모든 이가 가장 궁금해하고, 동시에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뭐지?”
디모네 닉스는 꽤 순순히 답했다.
“내 능력을 펼치고 싶었으니까.”
“…….”
그리고 그 답은, 아이트라를 한동안 굳어 버리게 했다.
할 말을 잃은 그녀는 넋 나간 얼굴로 디모네 닉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 남자와 잠시나마 함께 살았던 시절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저 말은 진심이었다.
눈앞에 있는 저 미친놈은,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7년 전에 전쟁이란 비극을 일으킨 거다.
제 그 졸루한 능력을 펼치고 싶어서.
“나는 누구보다 대단한 실력을 지녔어. 그건 아이트라 너도 알잖아. 하지만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웠고, 나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디모네 닉스는 묻지도 않은 이유를 잘도 떠들어 댔다. 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 저 남자의 말도 안 되는 서사 따윈, 아이트라의 귀에 단 하나도 꽂히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로군.”
제 할 말을 다 마친 디모네 닉스는 꽤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