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성왕이 사망했기 때문에, 자연히 검찰의 참고인 소환은 없던 일이 되었다.
어쨌거나 한 나라의 국교를 상징하던 지도자가 서거했다.
비록 최근 신성청이 마약 등 수많은 중범죄에 연루되면서 위신이 많이 떨어졌다지만, 그래도 오랜 영광이 단숨에 바래진 않았다.
성실한 신도들은 스켈레로 3세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했다.
한데 신성청은 성왕의 죽음을 발표한 바로 당일에 장례식을 치렀다.
마치 도둑질하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신성청은 비공개로 후다닥 장례를 마쳤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신도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야 했을 국교의 수장은 그렇게 허무하게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죽은 성왕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상투아 영지로 향할 준비를 하려던 신도들은 크게 당황했다. 아들라보르에 조의를 표하려 했던 주변국 역시 의아한 반응을 내보였다.
아들라보르 왕실은 애도를 표하는 동시에 신성청의 기이한 행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신성청의 입장은 딱 하나였다.
검소하셨던 성왕의 유지에 따라 장례를 진행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고, 자연히 사람들은 성왕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성왕의 마지막 모습도 보여 주지 않고 이렇게…?”
“아니, 애초에 죽은 거 맞아?”
“혹시 이번에 검찰 소환에서 뭐, 그런 거 있는 거 아냐?”
“그런 거라니?”
“진짜로 신성청이 범죄에 연루됐다거나….”
의심은 점점 증폭되어 갔다. 하지만 신성청은 함구를 선택했다.
이에 왕실은 서거한 스켈레로 3세의 의문을 풀기 위한 조사단을 결성, 이들을 상투아 영지로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검찰은 신성청 고위 성직자 몇몇을 마약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이들 중엔 죽은 성왕과 친밀하기로 유명한 성직자도 있었다.
***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노아와 레토는 그간 쌓였던 피로를 충분히 풀었다. 늦잠도 자고, 여유롭게 아점을 먹고 다시 낮잠도 잤다.
읽고 싶었던 소설 전집에도 도전해 보고, 아스를 대신해 장을 봐 와 근사한 저녁 식사도 준비했다.
미뤄 둔 방 청소도 했고, 옷장도 정리했다.
클라레와도 못 놀아 준 만큼 실컷 놀아 주고, 아스에게서 저 없는 동안 집에 있었던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다만 아스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뭔가 고민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노아는 일단 그녀가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레토도 종종 오케아누스 저택에 가서 그간 못했던 효도를 뒤늦게 실천했다.
어느 날은 실컷 울다 온 얼굴로 이리 말했었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엄청 우시더라.”
레토는 알버스에게 처음으로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알버스는 그 자리에서 다 큰 손주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노아는 말없이 레토를 안아 줬다.
가을이 익어갈수록, 그들의 순탄찮던 삶에도 비로소 평화로운 결실이 맺혀 갔다.
“…일하러 가?”
그리고 출근하는 날.
클라레는 일하러 가는 노아와 레토를 불만스럽게 바라봤다.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꼭 삐친 강아지 같았다.
일주일 동안 언니, 형부와 즐겁게 놀았던 탓에, 아이는 두 사람이 다시 출근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언니, 그냥 백수 해라. 응?”
“이 녀석이.”
어이가 없어진 노아는 클라레의 말랑한 볼을 두 손으로 아프지 않게 꾹꾹 눌렀다. 아이의 조그만 입술이 물고기 주둥이처럼 뽁 튀어나왔다.
“우우웅!”
클라레는 물고기 입술을 뻐끔거렸다.
“내가 일을 안 하면 누구 돈으로 먹고살려고, 응?”
“형부 돈으로 먹고살면 되지?”
“이리 당당하게 날 지갑으로 써먹겠단 여자는 처제밖에 없을 거예요.”
“그게 바로 나란 여자지!”
“하하하!”
“야, 그거 칭찬 아니야….”
당돌한 클라레 덕에 오랜만의 출근길이 무척 즐거웠다.
“작은 주인님.”
배웅하러 나온 아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돌아오시거든 이야기 좀 들어 주시겠어요?”
아스가 드디어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것을 알아챈 노아가 일찍 오겠다며 싱긋 웃었다. 아스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미소를 지었다.
곧 붉은 애마가 출근길에 올랐다.
“처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레토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툭툭 건드렸다.
“고민이 있어 보이던데.”
노아는 내심 놀랍단 듯이 레토를 힐끔거렸다. 레토도 아스의 기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젠 정말 가족이 다 되었구나, 싶어 노아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 말하겠지.”
“별일 아니면 좋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어때?”
레토가 물었다.
“오늘 출근, 살짝 긴장되지 않아?”
평범한 출근이 아니었다.
해군에서 비밀 엄수를 명령했지만, 노아가 피에타 가문의 후계자란 사실은 이미 쫙 퍼진 상태였다.
이틀 전에 레토가 오케아누스 후작저에 방문했을 때 알버스를 통해 전해 들었다.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레토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난 뒤로 매일 꿈속을 날아가는 상태였지만, 그걸 감안해도 알버스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다.
다만 아무리 비밀을 엄수하란 명이 내려졌대도 분명 이전과 같지 않을 테니, 어느 정도는 각오하란 말도 덧붙였다.
“뭐….”
노아도 어느 정도 짐작한 바였다.
“…그래도 적국 출신이라고 욕은 안 먹나 보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한 마디에 레토도 따라 웃었다.
“누가 벨로 대위를 욕해. 욕을 먹기엔 넌 정말 너무 열심히 살았어. 네가 여태 쌓은 공적들이 그 증거지.”
“열심히 산 보람이 있네.”
사실 노아는 별로 긴장하진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어. 오히려 안 쫓겨난 게 용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
“뭐, 쫓겨나면 검술 도장이나 차려 볼까.”
“그게 더 돈 많이 버는 거 아냐?”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가르치는 검술이라니. 누가 들어도 혹하는 소리였다.
도착한 해군은 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다.
노아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다.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말투와 호기심 어린 시선, 그리고 꽤 노골적인 연민.
대놓고 수군거리지는 않았으나, 노아가 지나간 뒤에는 꼭 군인들이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자신들끼리 모였다.
‘음….’
오랜만에 함상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점검하던 중, 노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래도 악의는 없으니까.”
그리 중얼거린 노아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제 막 출근했는데, 벌써 피곤해지려 했다. 과연 내가 오늘 이 관심들을 마지막까지 무시할 수 있을지도 살짝 염려스러웠다.
“대위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 왔냐?”
“안녕.”
“대위님, 휴가 잘 보내셨습니까?”
“여기 오전 회의 자료입니다. 그리고 훈련 내용도….”
“벌써 동계 훈련을 준비할 때가 왔지 말입니다….”
하지만 특함 사령부실에 들어서자마자, 노아의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다들 모였나.”
마침 레토가 사령부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후줄근한 함상복 차림인데도 혼자 잘생기고 멋진 걸 다 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다시 뺑이치는 근무를 시작하….”
“…….”
“…이런, 이런.”
레토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벨로 대위가 아침부터 또 이리 열렬하게 날 바라보네. 비어 있는 비품실을 찾아야 할까, 응?”
“나중에 노아한테 처맞으려고….”
“치티아 중위.”
“예예, 합니다.”
아미는 이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엎드려뻗쳤다.
“…너는, 그런 삶도 괜찮은 거냐?”
셀린은 그런 제 친구 겸 직장 동료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얘는 이제 자기가 성녀란 사실을 잊은 것 같았다.
“어쨌건 대위. 이제 나한테서 눈 뗄까? 늘 말하던 대로 공사 구분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능청을 부리던 레토가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곤 귀를 슬쩍 만졌다. 지금 내가 뭘 들었지? 환청인가, 싶었다.
하지만 노아는 한 번 더 말했다.
“중장님이 상당히 근사해서, 눈을 잠시 못 뗐습니다. 역시 함상복 차림이 잘 어울리십니다. 그 후줄근한 걸 입고 그리 멋지기도 힘든데.”
“…….”
“근무 중에 실례했습니다.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자리로 향했다.
다들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평소엔 노아가 늘 제게 달라붙는 레토에게 공사 구분하라고 화를 냈는데, 오늘은 완전히 반대였다.
“이러면 나 괜히 엎드려뻗친 거 아냐?”
그 와중에 아미는 퍽 억울해했다.
“…….”
그리고 레토는 그대로 굳은 채 자리에 서 있었다.
“중장님?”
괜찮으십니까?
곁으로 다가온 피스트 준위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쩐지 일이 좀 귀찮아질 것 같았다.
“…하하.”
너털웃음을 가볍게 터트린 레토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볍게 세수하듯 쓸었다.
“준위.”
“예.”
“출산휴가를 지금 미리 신청해도 되겠나? 아, 오해는 말고. 어쩐지 내가 방금 임신한 거 같아서 말이야.”
아름다운 여인이 밤하늘 달빛을 쬐고 임신했다는 옛 신화처럼, 레토는 자신도 노아의 아름다움을 쬐고 그리된 것 같다며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
퍽 심각하게 고민하던 피스트 준위가 말했다.
“저는 병가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준위가 불쌍해지려는군.”
“절 사랑한다면 병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아이고.”
아이스 중령이 반쯤 식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이게 우리 특함이지.”
저렴한 원두 향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날.
글로리아 아드벨로 해군 참모총장의 정년퇴직이 결정됐다. 차기 참모총장에는 볼트리아 해군 사관학교 전 교장이 지명되었다.
***
글로리아의 퇴직 소식은 벨로 저택에서도 화제였다.
“아이고, 드디어 나도 쉰다!”
퇴근하고 돌아온 글로리아는 씻지도 않고 바로 거실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클라레가 밖에 나갔다 들어왔으면 손부터 씻어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세균이 할머니 손에 득실거린다고!”
“아니야, 할머니는 깨끗해. 일은 다 밑의 것들에게 시키거든.”
“…….”
“…….”
마침 같이 살던 밑의 것들, 그러니까 노아와 레토가 할 말 많은 시선으로 글로리아를 응시했다.
클라레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더욱 단호히 말했다.
“할머니라고 봐주는 건 없어! 어서 가서 손 씻어!”
“쪼그만 게 잔소리만 늘어서….”
“잔소리도 들을 수 있을 때 들어. 나중에는 듣고 싶어도 못 듣는 게 잔소리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