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오늘 하루 운영을 마친 샤프 역에는 국왕의 수도행을 위한 급행열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차는 중간에 멈추지 않고 달려, 하루 하고 반나절을 조금 넘겨 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국왕은 이번에도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이러다 우리 왕자가 아비의 얼굴도 잊겠네.”
“잘 알고 계시네요.”
마중 나온 왕후가 가볍게 타박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 위로 안쓰러운 감정이 비쳤다.
“…잠은 편히 주무셨나요?”
“기차에서 눈을 좀 붙였다네.”
국왕은 왕후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이마를 맞부딪혔다. 왕후는 고생하셨다며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입맞췄다.
“벨로 대위는 어땠어요?”
국왕의 옆을 함께 걷던 왕후가 소리 죽여 물었다. 그녀는 국왕을 통해 피에타 가문에 대한 비밀을 며칠 전에 전해 들었다.
깜짝 놀랄 소식이었지만, 왕후는 이내 순순히 납득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아니면 누가 피에타일지 상상도 잘 안 되었다.
“이젠 괜찮아져야지.”
진심을 짧게 전한 국왕은 다시 바삐 움직였다.
내일 아침에 가족들끼리 식사하자고 왕후와 약속을 나눈 뒤, 국왕은 샤프 영지에서 미리 선별해 둔 증거들을 아티를 통해 검찰에 넘겼다.
그리고 외교부 장관과 시종장을 불러 피에타 가문의 망명 신청에 대해 논의했다.
“피, 피에타?”
“설마 그 피에타 말씀이십니까? 시스토 제국의 천년 가문?”
“그럼 이 세상에 피에타가 또 있나?”
국왕의 시큰둥한 답변에 외교부 장관과 시종장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이내 둘은 서둘러 관련 법규에 능통한 전문가들을 호출했다. 그러나 부르는 게 민망할 정도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대략적인 윤곽을 잡았다.
“그렇게도 좋으냐.”
어처구니가 없어진 국왕이 비식거렸다.
“아주 그냥 국왕보다 상전이군. 누가 보면 그네들이 피에타의 가신인 줄 알겠어.”
“국왕 전하.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아시면서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어흠, 시종장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자신들이 아까 유별나게 흥분했던 건 자각한 듯했다.
옆에 있던 외교부 장관도 뒤늦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무려 천년의 역사를 지닌 가문입니다. 이 세상에 피에타보다 긴 역사를 품은 나라도, 가문도 없습니다.”
“시스토 제국도 천년 역사인데?”
“7년 전에 끝났어야 할 망국이 명줄을 끈질기게 쥐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제법 살벌하게 평가한 시종장이 예를 갖췄다.
“국왕 전하.”
그러고는 이내 허리를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천년의 명예와 위상이, 아들라보르와 함께할 것입니다.”
시종장과 외교부 장관의 진심 어린 축복과 경탄이었다.
“…그럼 고생들 하게.”
추후 다시 회의를 거치자는 말을 끝으로, 국왕은 몸을 돌렸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홀로 남게 되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국왕은 신경이 곤두설 만치 불쾌한 기분이었다.
“후우….”
소파에 쓰러지듯 앉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저 반응들이 옳은데….’
들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카일리코 국왕은 심호흡을 몇 번이나 길게 반복하며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모든 상황이 옳다.
빌어먹을 선왕을 끌어내리겠단 다짐은 철들기 전부터 했으니, 기실 이 모든 것을 위해 준비해 온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드디어 끝에 왔다.
거기다 예상치 못한 피에타의 종속까지.
국왕은 훗날 자신이 역사에 위대한 성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것을 알았다.
실제로도 그의 업적은 제법 훌륭했고, 피에타 가문 덕에 더욱 확고해졌다.
그 역시도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내심, 하늘이 드디어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돕는구나 싶었다.
“…….”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사실이 썩 달갑지 않았다.
“괜한 것을 봐서….”
피에타의 망명과 종속이 가능했던 건, 그들 가문에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버지! 어머니!”
“흑, 흐윽…!”
그리고 그 비극의 결과를 직접 봐 버렸다.
그토록 굳건하고 아름답던 사람이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는 모습을 봐 버렸으니.
“…그래.”
국왕은 주름진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전쟁이란 게, 이런 거지.”
전쟁은 누구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입히느냐로 승패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가해자가 된다. 의도했든 안 했든, 결국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게 될 테니까.
가해자가 욕을 먹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에서 이겨 승리자란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뿐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짓밟은 범죄자는 제 목적을 정당하게 지켜내는 승리자로 추앙받는다.
그리고 카일리코 국왕은 오늘, 완벽한 승리자가 됐다.
동시에 완벽한 가해자도 되었다.
비록 전쟁의 시발점은 저와 관련이 없을지언정, 스스로 왕이 되길 선택하고 그 책임을 도맡았으니 저도 전쟁의 가해자였다.
국왕은 그 사실을 부정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불쾌하고, 슬펐다.
“…역시 전쟁은 할 게 못 돼.”
누군가는 죽어서도 깨닫지 못할 뼈저린 교훈을, 그는 오늘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았다.
눈을 질끈 감은 국왕의 귓가엔 아직도 어느 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평생 잊어선 안 될 전쟁의 상흔이었다.
***
수도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일 뉴스를 통해 전국으로 전해졌다. 사실 수도는 언제나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름 내내 뜨겁게 달궈졌던 군 관련 범죄 재판들이 가을의 초목을 한 번 더 들썩거리게 했다.
특함이 가져온 증거는 엄청난 여파를 불러왔다.
프세드 렐리의 2심 공판에선 그가 만든 마약이 7년 전 전쟁에서 암암리에 퍼졌던 세뇌용 마약의 원료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세드 렐리에겐 한 번 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신성청 쪽에서 보낸 변호인단은 그의 상고를 포기했다.
뒤이어 안보국 전 국장의 2심도 진행되었다. 지난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던 간첩 조작 사건이 쟁점으로 올라왔다.
의도적 악의가 없어 무죄라던 어처구니없는 판결 사유는 특함이 가져온 증거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안보국 전 국장이 시스토 제국과 몰래 접선했단 사실이 밝혀졌고,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거래가 여러 차례 진행되었음도 드러났다.
이에 대해선 그의 심복이었던 나비 칼루스의 협조도 한몫했다.
이번에는 중형을 피하지 못할 거라는 사법계 전문가들의 의견이 신문 사설에 실렸다.
마찬가지로 플랜시 전 소장에게도 중형이 선고될 거란 것이 법조계의 공통된 예측이었다.
알려지진 않았으나, 이제 그의 아내는 더는 법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신성청.
그리고 디모네 닉스.
신성청에선 성왕이 직접 참고인 소환에 응한다고 하였고, 디모네 닉스는 여전히 제 무죄를 주장하며 자기 변호를 이어 갔다.
성왕의 참고인 소환은 본래 예정된 날보다 이틀 뒤로 미뤄졌다. 성왕의 건강이 이유였다.
하지만 성왕의 소환은 끝내 불발되었다.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이 유달리 화창하던 오후, 라디오에선 성왕의 서거 소식을 긴급 속보로 알렸다.
사인은 고령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사람들이 성왕의 서거에 놀라 당황하는 중, 속보가 끝나고 이어진 정오 뉴스에선 어느 사이비 종교 단체의 범죄 소식이 전해졌다.
어린아이들을 납치한 사이비 단체는 현장에서 바로 진압되었고, 납치된 아이들은 무사히 구출되었다고.
그리고 사이비 단체의 수장은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
“…멍들었네.”
졸음으로 반쯤 감겼던 노아의 눈이 잔뜩 찌푸려졌다.
“안 아팠어?”
“아팠으면 아팠다고 했지.”
“…….”
“그만 노려보고, 어서 자자.”
레토는 밤을 새울 자신이 있었지만, 내일 클라레가 학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참은 레토가 노아의 허리 아래까지 내려간 이불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노아는 도로 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되려 두 팔로 레토의 가슴을 제 품 아래에 가두듯이 침대 위에 기대듯 뻗었다.
“꺅, 부끄러워.”
노아의 가슴 아래 갇힌 레토는 앙증맞은 소리를 내며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
한쪽 눈썹을 꿈틀거린 노아는 그제야 세웠던 상체를 눕혔다. 레토는 노아의 목 끝까지 이불을 고쳐 덮어줬다.
훌쩍, 노아가 코를 움찔거렸다.
우는 줄 알고 놀란 레토가 황급히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다행히 노아는 울지 않았다. 그냥 몸이 차가워져서 반사적으로 코를 훌쩍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미안.”
“뜬금없이.”
레토는 정말로 가슴에 난 멍에 별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는 며칠 푹 쉬면서 약 꼬박 바르면 사라질 흔적이었다.
“진짜로 미안하면….”
레토가 슬쩍 눈을 찡긋했다.
“뽀뽀?”
“고작 그걸로?”
“고작이라니. 네 뽀뽀가 얼마나 황송한 건데.”
그래서 안 해 줄 거냐고 삐친 투로 물어보니, 노아는 미안했던 감정을 떨치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 슬쩍 몸을 일으켜 입을 맞췄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물고 빨았던 탓에 붉게 부어오른 입술은 어떤 사탕보다 달콤했다.
레토는 노아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이제 정말 자자. 이러다 몸 더 식겠어.”
이불 속 노아의 몸을 팔로 꼭 끌어안은 레토가 졸린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겨우 제 체온으로 뜨겁게 덥혀놨더니, 조금 전에 이불 밖으로 잠깐 나온 것만으로 그새 식어 버렸다.
두 사람은 이불 아래서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제법 서늘해진 가을의 밤공기가 끼어들 틈새조차 없었다.
“…성왕이 죽었대.”
여전히 남편의 멍든 가슴에 눈을 고정한 채, 노아가 말했다.
“허망해?”
레토가 노아의 등을 느리게 쓸며 물었다.
“나는 성왕에게 별 관심이 없어.”
노아가 걱정하는 건 아미와 셀린이었다.
그나마 셀린은 저와 같은 반응일 것 같았다. 셀린이 성왕에게 분노하는 걸 본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미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크게 분노할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 성왕을 제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을 테니까.
노아는 라디오로 뉴스를 듣자마자 영사로 전화를 해 봤지만, 아미는 받지 않았다.
같은 영사에서 동거하는 셀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그 시각.
“유후!”
아미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도로에서 외쳤다.
“내가 성왕을 죽였다!”